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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Jun 28. 2021

죽고 싶을 때 읽는 기사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삼일간 동굴에 있었다.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아무것도 눈에 담기 싫었고, 그 무엇도 마음 속에서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마음 속에 담긴 온갖 것들을 구기고, 구기고, 구겨서 점으로 만들고 싶었다. 어떤 생각을 하든 비관의 가지가 덮쳐와서 발산은 안될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수렴시키고 싶었다. 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심지어 나조차도.


우울의 노크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어떻게든 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삼일 간은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10년 간 내곁에 있는 게 당연해서 내가 토 위를 기어다니면서 술주정을 할 때도 그 친구만큼은 곁에 있었으면 하던 친구도 위로가 안됐다. 이틀 전 영화관에서 듣고 머리카락이 바짝 서는 듯 전율을 느꼈던 비틀즈의 노래도, 적당히 달콤한 샛노란 커스타드 크림이 가득한 뚱뚱한 크로와상도 소용 없었다. 입 안 가득 수박을 넣고 씹을 때마다 여름을 느껴도, 아끼는 옷을 꺼내 입고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를 걸어도 기분이 좋아지질 않았다. 갖가지 방법을 시도해도 소용이 없어지자 나는 모든 방어막이 다 뚫려 요새로 진군해오는 적을 바라보는 군인처럼 무력해졌다.




http로 시작하는 도메인이 만약 만질 수 있는 것이라면 끝이 다 헤져서 닳아버렸을 것 같은 주소가 있다. 내가 수도 없이 들락거려서다. 그 주소는 이어령 학자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기사화한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기사의 웹페이지다.


2019년에 나온 이 기사를 수십 번을 읽었다. 이 기사를 읽으면 영화 인터스텔라를 떠올린다. 기사 꼭지 이름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면 '고차원'이다. 고작해야 3차원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화면에 5차원을 표현하고 전달했다. 그 영화를 보면 생각이 한 가지 방향이 아니라 수많은 방향으로 확장하고, 내 세계관이 넓어지는 게 느껴진다. 이어령을 인터뷰한 김지수 기자의 기사도 마찬가지다. 분야를 넘나 들며 수십 년간 학문을 탐구한 학자의 지혜와 틀에 갇히지 않는 기자의 문장력이 만나 독자에게 세계의 확장을 선사한다.  


보통 이 기사를 읽을 땐 깨끗한 마음을 준비하게 된다. 죽음을 앞둔 학자의 마지막 인터뷰 기사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에서 탄생을 연구하는 학자의 문장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겸허하고 성스러운 기분을 준비한다.


하지만 오늘은 도무지 그럴 수 없더라. 나는 죽음을 향한 충동이 마음 저 밑에서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메모 어플에 저장된 익숙한 도메인을 클릭했다. 다시 살고 싶어지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어디 한 번 지금 이 기분에서도 좋은가 보자"는 심보였다. 뚱하고 텅 빈 눈동자로 기사를 훑어 내려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사를 다 읽고서도 죽고 싶단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마음이 하나 더 생겼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침대에서 깨어 눈 맞추던 식구, 정원에 울던 새, 어김없이 피던 꽃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돌려보내요. 한국말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죽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학자는 불평에 차 있지 않다. 똑똑한 나를 왜 더 살게 하지 않느냐고, 병에 걸려 왜 고통스럽게 만드는 거냐고, 우리 딸도 병으로 먼저 데려가놓고 왜 나마저 병의 고통을 알게 하느냐고 신을 원망치 않는다. 그는 돌아보니 삶은 선물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으니 자신이 받았던 선물을 돌려주려 한단다.


그의 인터뷰를 보며 생각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죽고 싶다'고 한탄하는 인간은 어떻게 보일까. '~를 하고 싶다'는 표현엔 선택의 자유가 내포돼 있다. 나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아니라,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에 "죽고 싶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는 얼마나 오만한가 하는 자책이 몰려오더라.


또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죽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바로 위에서 내가 지금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 문장은 어떻게 보면 사실이 아니다. 나도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아니 당장 10초 뒤라도. 결단코 죽을수밖에 없는 인간의 '죽고 싶다'는 외침은 얼마나 우스운가. 얼마나 공허한가. 얼마나 무의미한가.


-그런데 요즘엔 탄생 자체를 비극으로 보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내 의지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래서 안 태어나는 게 행복했다, 어쩔 수 없이 태어났으니 빨리 사라지는 게 낫겠다, 이렇게 반출생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건 무의미해. 제일 쉬운 게 부정이에요. 긍정이 어렵죠.


"부정은 쉽다. 긍정이 어렵다" 이 문장에 격하게 공감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땐 공감하면서도 투정이 솟았다. 긍정이 너무도 어려운 삶을 살기에 삶을 부정하는 거라는 푸념. 하지만 학자는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인간에겐 "왜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을 할 기회가 없다. 오로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만이 지속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철학자 김형석 선생은 인격의 핵심은 성실성이라고 했지요. 선생은 인격의 핵심을 뭐라고 보십니까?
"하하. 핵심은 인격과 신격은 다르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흉내 내기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려고 했던 괴테가 그 인간다움으로 구제를 받았어요. 나는 유다가 베드로보다 예수님을 더 잘 이해했을 거라고 봐요.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유다는 교회가 아니라 피의 밭을 남겼어요. 그런데 인간의 인격은 유다에 가까워서 더욱 신격을 욕망해요. 그래서 고통스럽죠.


그럼에도, 학자는 말한다. 삶을 부정하고 싶은 당신의 그 마음을 이해한다고. 이는 지극히 인간스러운 인간의 숙명이라고. 끝까지 예수를 이해하려 한 베드로보다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예수를 더 잘 이해했을 거란 생각처럼. 확실히 대다수의 인간은 베드로보단 유다에 가까울 것이다. 고통의 끝에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나말고도 참 많으니까.


인터뷰를 읽으며 생각했다. 여전히 죽고는 싶었지만, '죽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데 감사하다고. 죽고 싶은 마음이랑 감사한 마음이랑 공존하게 되는 이상한 마음이었다.


-어떤 기도를 하십니까?
"옛날엔 나는 약하니 욥 같은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지금은…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는 안 해요. 역사적으로도 부활의 기적은 오로지 예수 한 분뿐이니까. 나의 기도는 이것이에요. "어느 날 문득 눈뜨지 않게 해주소서." 내가 갈피를 넘기던 책, 내가 쓰던 차가운 컴퓨터… 그 일상에 둘러싸여 눈을 감고 싶어요."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는 안 한다는 학자처럼, 나도 기도했다. 다시는 죽고 싶단 생각이 안 들게 행복만 달라고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죽고 싶어져도, '죽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해달라고. 그 마음이 살고 싶은 마음인지, 죽고 싶은 마음인지는 모르겠다.


인터뷰 기사 말미를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최악은 없다고. 노력하면 양파 껍질 벗겨지듯 삶에서 받은 축복이 새살을 드러낸다고. 빅뱅이 있을 때 내가 태어났고, 그 최초의 빛의 찌꺼기가 나라는 사실은 ‘수사'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고. 여러분도 손놓고 죽지 말고,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끝까지 알고 맞으라고. "종교가 있든 없든, 죽음의 과정에서 신의 기프트를 알고 죽는 사람과 모르고 죽는 사람은 천지 차이예요."


그저 살아간다. 이 여섯 글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죽고 싶다'는 외침은 얼마나 살고 싶은 발버둥인지. 오늘도 나는 이 기사에 하루를 더 빚진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18/20191018030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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