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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롬 Nov 17. 2020

'오늘'의 전태일

<경향신문>이 전태일을 기억하는 방법


  1970년 11월 13일은 불꽃이 피어난 날이다.

  50년 전 청년 전태일은 종로 평화시장 앞에서 몸에 불을 붙이고 노동자의 권리를 외쳤다. "인간은 기계가 아님"을 죽음으로 천명한 날이었다.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22살. 나만을 위해 살기도 빠듯한 나이다. 살날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은 나이. 전태일은 그 나이에 '모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그 답으로 "당연한 것이 지켜지는 사회"를 내놨다.


  올해 11월 13일 즈음 많은 매체에서 전태일 50주기를 기념한 듯한 기획 기사를 내놓았다. 사실 가장 화제가 됐던 기사는 <서울신문>이 기획했다. <서울신문>은 죽음을 아카이빙했다. 산업재해로 사망한 야간노동자 148명의 부고 기사를 인터렉티브 형식으로 보도한 것이다.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끝나지 않는 죽음의 기록은 야간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아래로 밀려났는지 깨닫게 한다. <한겨레>의 경우 취재 대상을 프리랜서 웹툰 작가로 좁혀서 밀도 깊은 취재를 진행했다. 기획 시리즈 제목도 '청년 전태일, 세밀화로 보다'로, 특정 직업군의 열악한 현실을 심도 있게 보여주겠다는 의도가 보였다. 반면 <한겨레 21>은 '전태일50'을 제호로 정하고 여러 직업 군의 노동환경을 다각도로 보여줬다.


  천재의 또다른 정의는 "모두가 당연시하는 것이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제일 처음 알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알리는'이다. 전태일은 '앎'에서 그치지 않고 '알렸다'. 지금은 시시비비가 좀 있는 모양이지만 당시 천재 전태일의 '알림'에 민감하게 반응한 매체는 <경향신문>이다. 책 <전태일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이 조직한 삼동회는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조사하는 설문지를 돌렸고, 그 처참한 결과를 <경향신문> 기사를 통해 알렸다.


  <경향신문>이 전태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조명할지 궁금해하며 11월 13일의 <경향신문> 지면 읽었다. 매체와 전태일의 상관관계를 염두에 두고 기사를 읽어서인진 모르지만 다른 매체보다 <경향신문>의 기사가 유독 좋았다. <서울신문>의 인터렉티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좋았다. 사실 <서울신문>의 '인터렉티브 부고 기사'는 <경향신문>이 지난 기획인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에서 시도한 바 있다. 따라서 완전히 새롭다고 볼 수 없었다.


  경향신문이 11월 13일에 내놓은 노동 분야 기사는 크게 두 가지다. 두 기사는 내용은 다르지만 하나의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 "그 후"라는 키워드다. 하나는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 이후 삶을 그린 기획이다. 편집자주에서 <경향신문>은 기획 의도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전태일이 산화한 지 50년이 되는 2020년, 경향신문은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대량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추적했다. 대기업·대공장 정규직의 가장자리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가 한 번 더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의 이야기엔 갈수록 심각해지는 일자리 양극화 등의 노동 현실이 담겨 있다.

  취재진은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649명 가운데 138명을 설문조사 했다. 그중 32명은 인터뷰를 했다. 해고자 28인의 이야기는 신문 지면 그래픽에 축약해서 담았다. 해고 이후 노동자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노동 형태(정규직/비정규직)과 직종, 노동 시간, 임금 등을 통해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을 접촉해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은 취재력이 돋보인다. '가까스로 매달려 있다가 한 번 더 밀려난 사람들'을 통해 전태일이 원한 세상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도 좋았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32&aid=0003042920


  두 번째 기사는 르포기사다. 전태일 다리 주변를 취재해 전태일이라는 과거와 지금의 현재를 잇는 다리같은 기사였다. 취재진은 전태일처럼 평화시장 인근에서 의복업체를 운영하는 청년 자영업자를 인터뷰하고, 전태일 다리를 청소하는 환경 미화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 전태일 다리 밑 청계천 주변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전태일이 과거에 돌렸던 설문조사의 문항을 물었다. 전태일의 공간을 찾아서 과거의 현실에 오늘의 현실을 비춰본 접근방식이 돋보이는 기사였다. 전태일이 과거에 던진 질문과 외침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일깨워주지 않았나 싶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32&aid=0003042859


  언론인을 준비하면서 매일 여러 매체의 주요 기사를 훑는다. 11월 13일 즈음엔 이 행위가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우선 새삼스러운 갈망을 느꼈다. <경향신문>을 비롯한 여러 언론이 있었기에 전태일의 '앎'은 '알림'이 될 수 있었다. 분명 누군가의 죽음이 변화의 계기가 되는 사회는 비정상적이다. 외양간은 소 잃기 전에 고쳐져야 한다. 하지만 '구조적 죽음'을 알리는 역할을 언론이 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전태일과 달리 나만을 위해 살고 있는 스물 여섯의 취준생이다. 그러므로 나는 천재를 꿈꾸진 않는다. 다만, 천재들의 '알림'을 전하는 범인이 되고 싶다는 꿈은 꾼다. 이 꿈이 유독 와 닿는 한 주였다.


  물론 학생 기자, 인턴 기자 등 기자 관련한 활동을 몇 번 한 게 전부지만 언론사가 기획 기사를 쓰는 방식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 언론사는 아무 때나 특정 이슈에 대한 기획 기사를 쓸 수 없다. 뉴스는 시의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건, 즉 일이 터져야 관련된 기획도 내보낼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용균 씨가 죽고 '위험의 외주화'와 관련된 기획이 쏟아졌던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번 11월 13일 즈음에는 큰 사건이 없었지만 다수의 언론사에서 노동자의 현실을 기획 기사로 다룰 수 있었다. 전태일의 기념 주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전태일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 이름에 빚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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