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 출산, 집에서 산후조리, 그리고 깊은 산후 우울
환상과 현실의 결혼 생활
손이 많이 가는 오래된 시골집에서의 육아는 오히려 나를 더 지치게 할 거라며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높은 툇마루, 편하지 않은 동선, 부족한 난방시설. 그곳에서의 육아는 누가 봐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오롯이 나 혼자 살아가며 짊어지고 마주해야 했던 불편함들이 어느 순간 뱃속에 자라고 있는 존재를 통해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 하나쯤은 어떻게든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던 삶이 이제는 지켜야 할 존재가 생겼다는 이유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전한 둥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은 선택이 아니라 본능처럼 올라왔다.
그전까지의 나는 떠날 수 있는 삶을 살았다면 그때부터의 나는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자유롭게 흘러가던 삶 위에 책임이라는 감각이 내려앉았고 그 무게가 버겁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를 더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과 생각들이 낯설었지만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계속해서 이전의 나를 지나 다른 나로 건너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붙잡고 있던 것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알지 못했던 감각들을 하나씩 받아들이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흐름이 때로는 너무 빠르게 흘러가서 두렵고 때로는 어색했지만 그 안에서만 느껴지는
묘한 안정감도 함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저 그 변화 속에 나를 맡기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 더 좋은 조건의 시골집을 구하기 위해 보러 다녔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집이 없을 줄은 몰랐다. 살고 있는 집보다 더 어수선하고 심란한 집들도 두 배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낯설고,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배는 점점 불러오고 있었고, 집을 손보고 수리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한 한 아이를 편안하게 맞이하고 싶었다. 그 당시 나는 안전한 공간보다 편안한 마음이 더 중요하기도 했다.
설사 출산 전에 집을 구하지 못한다면 그냥 지금 살고 있는 시골집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서두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아파트로 가야 한다며 남편을 재촉하셨고, 남편 역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연애 할 때남편이 시어머니와 전화할 때 휴대폰을 뚫고 나올 정도로 목소리가 크시고 말이 많으셨다. 상대적으로 남편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듯 작았고 대답만 짧게 하는 편이었다. 입김이 쎄신 분이라는 짐작은 있었는데 자기 주장이 별로 강하지 않은 남편은 시 어머니 말에 휘둘리리고 있는 모습에 반감이 일어나서 나는 결혼 전에 선포를 했었다.
“내 인생에 간섭하시면 난 이 결혼 안할거라고“
결혼식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식장부터 장소까지 본인 위주로 생각하시면서 나를 휘두르기 시작하셨다. 결국 나는 존중과 배려가 없으신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하고 이 결혼 해야 될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큰 소리를 쳤더니 시 어머니는 “ 됐다. 니 맘대로 해라” 며 고개를 돌리셨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까 신혼집 간섭이 들어오게 될 줄이야.
나는 그냥 월세 10만원 내고 이 시골집에 살아도 상관없다며 주장 했지만 시 어머니는 그런 풍신나고 오래된집에 손 볼게 얼마나 많은데 니 애비 고생한다며 아파트로 이사를 가라신다. 나의 존재가 무너지는 듯한 비참함이 들었지만 그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이내 삼켜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분개했던 기억이 난다.
시 어머니가 봤을 때는 그냥 내가 가난한 집안에 가난한 딸인줄 아셨던 걸까. 자발적 가난을 선택해서 실험해서 살 뿐 평생 없이 살았던 적 없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었는데 시어머니는 내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하셨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라고 하시지를 않나, 남편 내조 잘 하면서 살라고 하지를 않나. 정말 앞에서는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집에 오면 뭔가 얹힌거 처럼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고 허전했다. '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거지. 이 결혼 진짜 미친 짓인가? '
결혼하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집안은 우리 집이 아닌 본인 집이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게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나 사이에서 벙어리 삼룡이가 된 남편을 두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나는 며느라기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이왕 결혼까지 했고 뱃속에 아이도 있고 신경전으로 에너지 소모 하고 싶지도 않은 생각에 나는 적당히 타협하는 방향으로 서로의 의견을 좁혀갔다
시골집에 갇혀 지내는 것보다는 읍내에서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카페도 가고, 사람들도 만나면 조금은 덜 답답하지 않을까. 가까운 시댁에도 자주 들리면 좋고. 그렇게 막연한 기대가 조금씩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출산을 한 달 앞두고 급하게 읍내의 신축 빌라 전세 계약을 했다. 아파트보다는 덜 답답했고, 안방은 황토방으로 되어 있었으며 세대마다 작은 텃밭이 딸려 있었다. 시골에 내려온 이유가 흙을 밟고, 만지며 살고 싶어서였기에 그때의 나에게 그 선택은 나름의 최선이었다.
결혼을 하고, 혼인계약서를 쓰고, 집을 계약하면서도 나는 좀처럼 '부부가 되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대출을 받고, 모자란 자금은 그동안 모아두었던 적금을 깨서 남편에게 건네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이 와닿기 시작했다. 공동자금을 출자해서 인생을 설계하는 한 팀이되었구나. 그제서야 나는 정말로 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전세 계약 당시 껄끄럽고 찝찝한 부분들이 분명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 불편한 감각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이사와 출산 준비로 정신없이 바쁘고 조급해진 마음에
나는 그때 느꼈던 작은 불편함들을 애써 외면해버렸다.
결혼식, 이사, 출산 준비까지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움직였다. 해야 할 일들은 끝이 없었고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다 보니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남편은 그저 옆에서 묵묵히 따라주는 사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해봤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책임이 결국 나에게 쏠리고 있다는 걸.
자연주의 출산
출산은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하고 싶었다. 뱃속의 아이가 오기 전 부터 생각하고 있던 자연주의 출산을 택했고, 병원이 아닌 조산원에서 아이를 맞이하기로 마음 먹었다.
자연주의 출산은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신뢰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 삶을 대하는 나의 방식과도 닮아 있었다.
나는 내 삶의 주도권을 가능한 한 스스로 쥐고 싶었다.
그래서 그 선택은 출산에 대한 선택이자 삶에 대한 태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연주의 출산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면 병원 출산도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과 산파, 그리고 아이를 믿기로 했다.
아이가 원하는 때에,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그게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믿었다.
세상을 살아가며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 단 하나의 힘.
자신을 믿는 힘.
출산은 고통과 환희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준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건 내가 처음 마주한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마치 또 다른 인생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자연주의 출산을 준비하며 나는 나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았다.
노산의 두려움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걸고, 기도를 올리며 출산의 순간을 수없이 반복해 그려보았다.
예정일을 앞두고 양수가 터졌다. 새벽의 고요를 깨우듯, 놀란 마음으로 남편을 깨워 응급실로 향했다.
검사를 받는 동안 걱정과 두려움이 점점 몸을 잠식해왔다.
의사는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지금 당장 수술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순간 마음이 크게 흔들렸지만, 나는 그 선택을 따르지 않았다.
병원을 나와 차 안에서 잠시 잠이 들었고, 눈을 뜬 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몇달간 조산원에서 함께 출산을 준비하던 산파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은 첫 아이라 바로 출산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며 나의 상황을 차분히 짚어주셨다.
그리고 혹시라도 위급해지면 언제든 근처 병원으로 가면 되니 지금은 걱정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오라고 하셨다.
병원에서 들었던 말들은 최악의 상황을 향해 있었고, 그 말들을 듣는 동안 내 몸은 점점 더 단단하게 굳어갔다. 하지만 조산원에 와서 선생님의 따뜻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신기하게도 몸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그 이완되는 감각 속에서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이렇게 몸이 열리고 편안해진 상태에서 맞이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조산원에 도착하자 산파 선생님은 자궁을 보시더니 이미 열리고 있다며 출산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당장 진행되지는 않을 거라며 저녁을 든든히 먹고 오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 어떤 긴급함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태도였다.
비건을 지향하며 임신 내내 고기를 찾지 않았던 나였지만, 그날 저녁에는 이상하게도 이대로 풀만 먹고는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강한 본능이 올라왔다. 나는 그 감각을 따랐고, 갈비탕 한 그릇을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다 먹었다.
그 전에는 고기를 먹을 때 마다 몸에서 불편함이 있었는데 그날은 신기하게도 속이 든든하고 편안했다,
내가 원하는 편안한 공간에서 좋아하는 향과 아로마를 맡으며, 평소 자주 듣던 명상 음악을 틀어놓고
아이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 순간 문득, 정신 없던 대학병원의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손발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 채 형광등 불빛 아래서 출산을 맞이했을 또 다른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찔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며 통증의 순간마저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 사실에 깊은 감사가 올라왔다. 아이도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머리가 내 자궁밑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아래가 묵직하고 뜨거워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진통은 점점 더 촘촘해졌고,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고통 속에서 소리를 지르는 대신 옴 만트라와 성모송을 읊으며 내 호흡과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출산은 질병이 아니라, 몸이 열리고 생명이 통과하는 길이라고 스스로에게 암시하며 아이가 그 스스로 문을 열고 잘 나올 수 있게 더 깊은 호흡으로 안내했다.
출산의 고통 만큼이나 기쁨도 동시에 너무나도 극에 달했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고통과 환희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감정.
그건 내가 처음 마주한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마치 또 다른 인생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엄마의 세계
엄마의 세계는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세계를 조용히 무너뜨렸다.
출산의 문을 지나왔지만, 그건 끝이 아니라 훨씬 더 깊고 넓은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었다.
죽음의 문턱을 지나 다시 돌아온 세상은 전과는 다른 빛을 품고 있었다.
모든 것이 핑크빛으로 반짝이는 듯하다가도 순식간에 잿빛으로 가라앉았다.
무한한 가능성을 느끼는 순간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한꺼번에 밀려와 나는 그 사이에서 무너졌다.
나는 산후조리원이 아닌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예전 우리 엄마들도 그렇게 해왔고, 그게 더 자연스러운 방식이라고 믿었으니까.
일주일에 몇백만 원에 달하는 산후조리원 비용도 부담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엄마의 품이라고 생각했다.
내 공간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아이를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그 작은 존재의 모든 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온전히 내 안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나 또한 전혀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존재를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내 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힘을 잃어버렸다. 자다가 젖가슴이 터질듯이 아파서 일어나고
손목은 너덜 너덜 해서 핸드폰을 쥐고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고 부족한 수면과 널뛰는 호르몬은 나의 의지로
해결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도움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고, 그 사실이 나를 더 무너뜨렸다.
나는 늘 혼자서 버텨내고 해결하며 살아왔기에, 누군가의 도움에 몸과 마음을 기대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 순간마다 어딘가 불안하고 낯선 감정이 올라왔다.
" 나 좀 도와줘, 이것 좀 해줄래?"
이 말 한마디가 참 어려웠다.
주도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온 나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남편은 시키는 일에는 성실했지만 내 감정과 필요를 먼저 읽어주지는 못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우리는 점점 더 엇갈렸고, 그 간극은 시간이 갈수록 더 크게 벌어져갔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왜 많은 사람들이 산후조리원을 선택하는지.
단순히 몸을 회복하는 공간이 아니라, 지친 몸과 마음을 함께 돌봐주고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필요를 알아봐주는 그런 돌봄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출산 이후에는 몸뿐 아니라 마음도 함께 무너진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나는 오로지 출산 하나 목표로만 달려왔지 그 이후의 촘촘한 삶을 미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친정 엄마는 멀리 있었고, 가까운 곳에 도움을 요청할 경험 많은 언니나 아는 엄마 조차 없는 곳에서 유일하게 소통 할 수 있는 곳은 SNS 였다. 도움이 필요할 때도 답답해서 견디기 힘든 마음도 여과없이 올렸다. 그렇게 살아왔었고 그게 답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몰랐다. 이 작고 작은 지역사회에서 말은 왜곡되고 굴절되고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결국 나는 입을 점점 닫고 더 고립되어갔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사람들과의 연결은 끊겼고, 연고도 없는 시골에서 조부모의 도움도 없이 나는 아이와 단둘이 남겨져 있었다. 하루 종일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느리게 흘렀고, 그 안에서 지루함과 답답함이 점점 쌓여갔다.
흙 마당 위를 걷고 새소리를 들으며 꽃과 고양이를 바라보는 시간은 세상과 연결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시멘트 벽 안으로 들어와 문을 여는 순간, 도로를 스치는 차 소리는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고,
그 소리는 조용히 내 마음을 건드리며 나를 다시 답답한 현실로 끌어당겼다.
자연과 이어져 있던 감각이 끊어지자 나는 깊은 외로움 속으로 가라앉았다.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힘이 빠지는 무력감이 서서히 나를 잠식해갔다.
나를 집 안에 남겨둔 채 출근 하러 훽 하니 나가버리는 남편을 향한 감정은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하루 종일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알아주려는 마음은 느껴지지 않았고, 집에 돌아온 그는 아이에게만 시선을 두고 준비된 밥을 아무렇지 않게 먹었다. 그 무심함 속에서 나는 점점 투명해지는 느낌이었고, 우리의 결혼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느라 몸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남편과 함께 있는 순간조차 나는 편안해질 수 없었다.
마음속 감정들은 억눌렸다가 터지기를 반복했지만,남편은 그 감정을 함께 마주하기보다 도망치는 쪽을 선택했다. 그 속에서 나는 벽을 향해 소리치는 사람처럼 철저히 고립된 채 외로움과 무력감 속에서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성인과 나누는 온전한 대화가 그리웠다. 아이를 돌보는 시간 속에서 말이 아닌 소리와 반응만 오가던 나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와 눈빛과 손길은 사무치도록 그리운 것이었다.
고립감과 외로움이 깊어지던 그 시기, 나는 점점 중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아이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일은 사라졌고,
내 감정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안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지쳐 있었고, 외로웠고, 무언가에 기대고 싶고 감정을 나누고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올라왔다.
그 틈 사이로 누군가는 나의 흔들림을 알아봤고, 그 약해진 틈을 따라 조용히 스며들 듯 들어왔다.
누군가가 들어오려 한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나는 무방비 상태였고, 나약해져 있었다.
그것이 나를 노리고 있는 미끼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그저 하루의 안부를 묻는 따뜻한 말 한마디에
얼어붙어 있던 내 마음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그 틈 사이로 흘러들어온 감정들은 이내 홍수처럼 불어나 나를 휘젓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는 금융사기로 전 재산을 잃고 인생의 바닥으로 떨어졌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라 꺼내기까지 많은 고민과 두려움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아픔과 슬픔, 그리고 분노 속에서 괴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 속에서 내가 어떤 심리 상태로 선택하고 결정했는지, 어떻게 판단력이 흐려졌는지를 조금 더 솔직하게 마주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저는 저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채찍질하며 끊임없이 비난하고 자책하고 후회해왔습니다.
그 시간들이 쌓일수록 제 몸과 마음은 점점 더 굳어갔고, 사람에 대한 믿음도, 세상에 대한 믿음도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뼈아픈 경험 속에서 저는 처음으로 제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도의 시간을 통해 그 아픔과 상처, 그리고 슬픔을 조금씩 어루만져 보려고 합니다.
삶을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힘겨운 시간이기도 했지만,
그 시간 또한 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든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조심스럽게 믿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시간을 다시 해석하고, 내 삶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다시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천천히 용기 있게 걸어가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