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혁명기 7탄

사랑, 내려놓음, 다시 삶으로

by 초연



보이지 않는 천사들


시골살이를 결심하기 전, 나는 인도 라다크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 여정은 사실 호주에서 시작되었다.

호주 여행 중, 나는 갑작스럽게 급성 신우신염에 걸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몸살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단식을 하며 버텼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친구의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향했다. 검사를 마친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상태로는 경과를 지켜봐야 하니 입원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병원비는 어떻게 하지?’


결국 나는 입원을 했지만, 그 이틀 동안 단 한순간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1인실 병실에 혼자 누워 있는 시간은 길고 무거웠다.
몸의 통증보다 더 크게 나를 괴롭힌 건 후회와 불안이었다.

수많은 여행을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던 여행자 보험.
하필 그 호주 여행에서만, 나는 보험 없이 떠났다.
그리고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이 터졌다.

인생은 이상하게도, 준비하지 않은 순간을 정확히 찾아온다.


담당 의사는 “병원은 아픈 환자를 치료할 의무가 있다”며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간호사는 “병원비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사회복지 담당자가 도와줄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 말들은 내 불안을 완전히 덜어주지는 못했다.

퇴원 당일,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계산대 앞에 섰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였다.


“그냥 가셔도 됩니다.”

순간,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뭐라고 하신 거지?’

천천히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그냥 가라는 건가?
이 모든 치료를… 아무 비용도 없이?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믿기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길을 열어준 것처럼.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예상 밖의 친절이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벙벙한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충분하다는 감각


당시 나는 레인보우 게더링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봉고차를 타고 호주의 숲과 바다를 떠돌며 지내고 있었다.

이틀간 입원을 마치고 퇴원을 했지만 몸은 생각처럼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이어가는 여행은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계속 이동하는 것도 이제는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이미, 그 여행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병원에 있는 동안 입맛이 없어 이틀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 병원 밖을 나오자마자 이상하게도 따뜻한 밥이, 엄마가 해주던 집밥이 간절하게 떠올랐다.


나는 작은 마을을 몇 바퀴나 돌며 한국 음식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중국 음식으로 허기를 달랬지만 그건 배를 채워줄 뿐, 마음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럴수록 그리움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설렘이 없는 여행을 억지로 이어가는 건 더 이상 여행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돌아가기로 했다.

두 번째 호주였지만 계획했던 1년을 채우지 못한 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쉬움보다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나는 생각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한 달 정도는 엄마 밥을 먹으며 꽤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편함에서 낯선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영문으로 적힌, 내 이름이 쓰여 있는 봉투였다.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봉투를 뜯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건, 이미 지나간 줄 알았던 호주 병원에서의 입원비 청구서였다.


'8000달러.'

숫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조여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며칠간 고민 끝에 그 빚을 갚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나는 페이스북에 나를 팔기 시작했다.

내가 잘하는 일, 할 수 있는 일들을 쭈욱 적어 올렸다.

무엇이든 하나라도 걸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돈이 없으면 벌면 되지.’

문제가 생길수록 나는 더 단순하게 생각하려 했다.

복잡하게 얽히기보다 가장 경쾌한 방향으로 해결 방법을 찾는 것.

그게 언제나 나의 원칙이었다.



응원한다는 댓글들이 달리고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꽃집 하루 알바, 아이를 돌보는 일, 행사장 단기 아르바이트까지.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나를 향해 열려 있었다.


복잡했던 머리는 몸을 움직일수록 조용해졌다.


단순해지는 감각이 오히려 나를 살렸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몸을 쓰는 일을 선택했다.


그렇게 병원비를 갚기 위해 나는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일을 구하는 것도, 낯선 곳에 가서 다시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이 끊기는 순간마다 불안은 더 선명해졌다. 빚이 생겼다는 마음의 짐을 빨리 털어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일본 산장에 가서 일할 생각 있어?”

순간, 조금 당황한 채로 되물었다.

“제가… 일본 산장에 가서 무슨 일을 해요?”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손님 응대하고.
그런 일들이야. 두 달 정도 일하면 돈 쓸 일도 거의 없어서 꽤 모일 거야.”


솔깃했다.

동시에, 다른 나라에 가서 일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호기심이 올라왔다.

그리고, 산장이라니.

알 수 없는 낭만까지 느껴졌다.


그랬다.

나는 늘 모험과 호기심에 반응해 왔다.

그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이왕 빚을 갚는다면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단순한 소모가 아니라 무언가 남길 수 있는 경험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 남는 것은 결국 이야기가 된다고 믿었다.


흘러간다는 것은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시간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쌓이고,
결국 서사가 되어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산으로 갈까

몇 년 전, 나는 전 재산을 정리하고 한국을 떠나 하와이로 향했다.

그곳에서 살아보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남자친구와도 헤어지고,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정리했다.

그렇게 마련한 돈은 지진으로 집이 무너진 네팔의 친구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배낭 하나로 사는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꿈은 단 하루 만에 무너졌다.

나는 그곳에서 설명되지 않는 여행자가 되었고,

결국 구치소에 갇힌 채 강제추방을 당했다.


구치소에서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알몸수사를 당하며 느꼈던 수치심과 괴로움은 몸 어딘가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 감각을 씻어내고 싶어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나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아무 계획도 없이 그저 두 발로 전국을 걸어 다니고, 산에 올랐다.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산을 오르다 보니

신기하게도 비슷한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라산을 겨우 올라간 사람이었는데,

내 주변의 사람들은 에베레스트를 올랐다고 했고, 히말라야를 마치 고향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서핑을 하며 바다에서 사는 삶을 동경해 왔다.

그래서 하와이로 향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자꾸 산으로 가고 있었다.



세계의 확장

그 해 겨울, 나는 네팔로 향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 겨울도, 그다음 해 겨울도 다시 네팔로 갔다.

왜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던 히말라야가 그리웠던 건지, 그들의 눈 속에서 반짝이던 무언가를 다시 보고 싶었던 건지.

설명할 수 없는 끌림에 나는 매년 그곳으로 향했다.

어느새 바다보다 산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서핑을 꿈꾸던 나보다 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 오래 머무는 내가 되어 있었다.


바다만 알던 사람이 산을 알게 되며 새로운 세계가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그 확장 결국은 균형적인 시각을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세계만으로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서로 다른 경험들이 쌓일 때 우리는 비로소
치우치지 않는 시선을 갖게 된다.

어쩌면 나는 그 균형을 배우기 위해 이 길을 지나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하와이에서의 상처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결국 삶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기보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같은 사건도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남고, 누군가에게는 방향이 된다.


나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돌이켜보면 나를 다른 길로 이끌고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보다 그 일을 어떤 시선으로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버티게 하는 것들


그렇게 산을 오르며, 나는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시작했고 조금씩 ‘산’이라는 세계를 알아가게 되었다. 그러다 산꾼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꾼다는 히말라야에도 여러 번 가게 되었고,

일본 북알프스의 한 산장에서 산지기로 일하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모든 순간이 참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기에 바빴다.


해발 3,000미터를 홀로 오르던 출근길은 세상에서 가장 고된 길처럼 느껴졌고,
난생처음 겪는 강도 높은 육체노동 속에서 나는 매일 밤 파김치가 되어 쓰러지듯 잠들곤 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 짠내 나는 날들이 지금의 나를 가장 진하게 만들어주었던 시간으로 남아 있다.


힘들다는 이유로 산장 일을 포기하고, 혼자 터덜터덜 산을 내려가는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싫어서
나는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무엇보다도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었다.

그곳에는 따뜻함과 정이, 생각보다 더 깊게 흐르고 있었다.


매일 쪽잠을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잠이 덜 깬 채로 주방으로 향하던 시간.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늘 나보다 먼저 와서 주방의 불을 밝히고 나를 맞아주던 선배가 있었다.


좋아하는 노래를 물어봐주고, 청소할 때면 그 노래를 틀어주던 사람,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먼저 물어봐주고,

시내에 내려갔다가 헬리콥터로 비싼 복숭아를 보내주던 사람.

일을 하다가도 “지금 나와서 봐” 하고 나를 불러 해가 떠오르는 순간을 함께 보게 해 주고, 노을이 질 때도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던 사람. 그는 지치고 고된 산장 생활 속에서도 낭만을 잃지 않고,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삶을 포착해 내던 사람이었다.


매일 하루가 그저 빨리 흘러가기만을 바라던 내가,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조금씩 순간에 머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산장에서의 낭만과 아름다움을 하나둘 느껴보기 시작했고,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도 천천히 익혀갔다.


그리고 어느 날,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내가 힘들어서 포기하고 내려가 버릴까 봐 내 반응을 살피며 조용히 나를 보살피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미안함과 고마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혼자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이 사실은 누군가의 마음 위에 기대 서 있었던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매일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두 달 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이곳의 동료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들. 그렇게 생각하니 하루하루를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을 조금 더 정성껏 살아보기로 했다.

주어진 하루를 끝까지 버텨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머물며 최선을 다해 살아보기로.


어설픈 일본어로 눈치를 보며 소통해야 했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말보다 마음으로 더 많이 전해주는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애쓰고, 진심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장님은 특히 그런 분이셨다. 직원들보다 더 고된 일을 기꺼이 맡으셨고, 말수는 많지 않았지만
늘 조용히, 세심하게 모든 직원들의 마음과 몸을 살피고 계셨다.

누군가가 지치지 않도록, 육체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무너지지 않도록 앞에서가 아니라
옆에서, 그리고 뒤에서 묵묵히 받쳐주는 사람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푸세식 화장실에서 똥을 퍼내는 당번이었던 날이 있었다.

아직 산장 일에 제대로 적응도 못한 내가 놀라서 도망가 버릴까 걱정되셨던 걸까.

사장님은 말없이 내 옆에 서서 함께 그 일을 도와주셨다.

그 모습을 보던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했다.

‘다른 사장님 같았으면 힘든 일은 직원에게 맡기고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을 텐데…

이분은 내가 버티기 힘들까 봐 먼저 옆에 서 주는 사람이구나.’

그날,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고.




해발 3,000미터의 산장에서는 물이 부족해 샤워를 할 수 없다.
씻을 수 있는 샤워실조차 없는 곳이었다.

낮에는 주방에서 일하고, 객실을 청소하며 땀을 비 오듯 쏟아내지만,

해가 지면 기온이 뚝 떨어지고 젖은 몸은 금세 식어버린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나면 물티슈 한 장으로 온몸을 닦아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소박한 마무리 속에서 조용히 잠에 들곤 했다.



산장에 올라간 지 17일 만에, 드디어 목욕하는 날이 왔다.

그날은 아침부터 동료들 모두가 들떠 있었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고, 목욕과 세탁까지 주어진 시간은 단 15분.

알람시계까지 맞춰놓고 시간이 줄어드는 내내 심장이 쫄깃해지는 긴박감 속에서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의 기분이란—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개운 함이었다.


그런데 그날도, 사장님은 늘 그렇듯 마지막 순서를 선택하셨다.

언제나 가장 마지막에 씻는 사람, 남은 시간을 먼저 내어주는 사람.

그 사소해 보이는 선택들이 얼마나 큰 배려였는지 그곳에 있던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사장님은 말없이도 직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셨다.


서로가 서로를 챙기고, 돌보고, 아끼던 산장 공동체.

빚을 갚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일로 연결된 관계 속에서도
서로를 빛으로 비춰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산장에서의 경험은 ‘일본인은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다’라는 나의 오래된 고정관념을 조용히 무너뜨렸다.

그곳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머리보다 마음으로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더 깊이, 더 진하게 연결될 수 있었다. 산이 좋아서 이곳에 온 사람들, 그리고 산을 지키며 살아가기로 선택한 사람들. 대중적인 길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었던 그들은, 그래서인지 마음도 생각도 더 자유롭고, 더 열려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이런 사람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내가 그렇게 살아와서인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서는
나를 꾸미거나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독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나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질문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질문은 얕지 않았다.

대답을 쉽게 내릴 수 없는,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질문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마치 깊은 바다를 헤엄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을 마친 후, 매일 밤 별빛 아래에 앉아 서로의 꿈과 삶을 꺼내놓던 시간.

그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뛰고 있었다.



깜깜한 산 꼭대기 아래에서,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빛과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던 그의 눈동자 속에는

또 다른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어딘가 멀리 닿아 있었고,

나는 그 눈을 바라보며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조용히 그려보았다.

이 친구와 함께라면, 낯선 길도 왠지 두렵지 않고 든든하고 즐겁게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는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언젠가 다시, 길 위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마음속으로 건네고

우리는 담담하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뒤돌아서 산을 내려왔다.


그렇게 산꼭대기에서의 두 달은, 내 삶 속에서 오래도록 남을 하나의 계절이 되었다.



시절인연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는 여전히 산 위에 남아 있었다.

서로 다른 곳에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의 마음은 더 선명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는 산 아래로 내려와 살아갈 삶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일상 속에서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조용히 그려보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만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우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각자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서로가 가장 좋아하는 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곳이 바로,

히말라야였다.


히말라야를 함께 걸으며 우리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믿었다.

네팔을 지나, 인도로 이어진 여행 속에서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길을 걸었지만
조금씩 다른 마음의 결을 느끼기 시작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함께 걷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감각.


그리고 라다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 우리가 바라보는 삶의 방향이 닮아 있는 듯 보였지만
결국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


그는 계속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 했고, 나는 어딘가에 머물러 삶을 깊게 뿌리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 선택 앞에서 서로를 붙잡지 않기로 했다.


미워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서로를 위해 놓아주는 선택.


그는 그가 가야 할 길로, 나는 내가 가야 할 길로 조용히 방향을 나누었다.



그와 헤어지던 날, 그는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감정을 꾹 눌러 담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나, 사랑받았어.”


그 말 하나에 전하고 싶은 마음을 모두 담아내고,

나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고마워.”


나에게 매 순간 진심을 다했던 사람,
계산하지 않고 사랑을 주었던 사람.

사랑이 무엇인지 몸으로 알게 해 준 사람.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이 생에서 너를 만나 인연이 되었다는 것에,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매일 밤, 그의 빈자리는 점점 더 크게 느껴졌고 허전한 마음이 조용히 번져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이 생에 대한 아쉬움도, 후회도 없다고 느껴졌다.

나는 충분히 사랑했고, 또 충분히 사랑받았고,
충분히 세상을 돌아다녔고,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득 이제 남은 인생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절로 향했다.


라다크 절에 가서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 공간에 머물고 있었을 뿐인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염불 소리가
조용히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이유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참고 있던 감정들이 무너진 것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때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 까지라는 것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사랑했고
이제는 놓아도 되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뒤, 내 안에서 전혀 다른 감정이
조용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마음.'


그전까지는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주 본능적인 욕망이었다.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 순간 알았다.

아직은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 욕망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혼자 조용히 다짐했다.

마흔이 될 때까지 엄마가 되지 않는다면 그때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다고.

그 약속을 마음에 품은 채 나는 절을 나왔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명상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도시에서의 삶을 하나둘 정리하고, 사람들 속에서의 나를 내려놓고,
조용히 나 자신과 마주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비우고, 혼자만의 삶에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도, 사랑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크게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하루를 고요하게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나의 삶 속으로 한 사람이 조용히 들어왔다.

억지로 이어진 인연이 아니라, 흐르듯 자연스럽게 스며든 만남.


한때는 별빛 아래에서 가슴이 뛰던 사랑을 했고,

이별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만큼 깊이 사랑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 나는 조용한 삶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 고요한 시간 속에서 만난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의 곁에 머물렀다.


나는 늘 세상을 더 알고 싶었고,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싶어 했지만,

그는 그저 지금의 하루에 머무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더 가지려 하지도, 더 멀리 가려하지도 않는.

그 차이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어딘가로 더 나아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멈춰 있어도,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감각.

나는 그에게서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으로 충분했고, 나는 조용한 삶을 선택했다.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어울리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삶,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일상.

자극적이지 않아도 괜찮았고, 크게 흔들리지 않아서 편안했다.

하루는 느리게 흘러갔고, 나는 그 안에서 내 속도에 맞춰 숨을 쉴 수 있는 삶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와의 관계도 그랬다.


뜨겁게 타오르지는 않았지만, 조용히 옆에 머무는 방식으로 우리는 서로의 삶을 채워갔다.

그리고 내가 가장 충만하고 건강하며 평화로웠던 시절, 우리에게 아이가 찾아왔다.

그 존재는 나에게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결혼을 했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연주의 출산으로 아이를 만나던 날,

고통과 환희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모든 감각이 겹쳐지던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내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장이 펼쳐지겠구나 하는.


이제부터의 삶은, 조금 더 깊은 행복으로 흘러가겠구나 하는 희망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어느 순간 깊은 고립이 되었고, 나는 그 안에서 오랜 시간 산후 우울을 겪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나는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좁아진 세계 안에서 생각은 점점 안으로만 파고들었고,

그 안에서 만들어진 감정들은 제대로 흘러가지 못한 채 조용히 엉켜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이상하게도 관계들이 하나둘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배신을 겪고,
심지어 돈까지 얽히게 되면서 나는 점점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단순히 우연으로만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내 안에서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 흘러가지 못하고 고여 있던 생각들,

그것들이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돈의 문제로 얽히고, 결국은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생각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은 나를 깨우기보다 더 깊은 자책으로 끌고 내려갔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는 단순한 불운의 연속이 아니라

내 안의 감정들이 가장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얽힘은 결국, 내가 외면하고 있던 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들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 얽혀버린 감정과 관계 속에서 나는 어떻게 무너졌고,
또 어떻게 다시 나를 되찾기 시작했는지 조금 더 깊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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