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 시골살이를 시작하다
낯선 변화
한국으로 돌아와 도시에 있는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없던 고층 아파트의 공기는 답답했고,
창문을 열어도 바람 대신 높은 건물들만 보였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소리, 의미 없이 반복되는 뉴스와 광고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리듬이 내 심장 박자와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시간을 쫓기듯 대화를 나눴고,
서로의 눈을 오래 바라보기보다는 쉴 새 없이 휴대폰을 확인하며
끊임없이 무언가에 반응하고 있었다.
알림 소리에 고개를 떨구는 순간마다 대화는 미세하게 끊겼고,
마음은 끝까지 닿지 못한 채 흩어졌다.
그들의 속도는 도시의 속도와 닮아 있었다.
빠르게 말하고, 빠르게 판단하고, 빠르게 다음 약속으로 넘어가는 리듬.
그 속에서 내 안의 에너지는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다.
나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고,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감이 가슴 깊은 곳에 천천히 쌓여 갔다.
나는 이미 다른 속도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점점 이상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숨이 막히는지, 왜 이렇게 예민해졌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나는 이미 다른 공기를 마셔 본 사람이었다는 것.
산 위에서 맞았던 새벽 공기, 모닥불 옆에서 들리던 나무 타는 소리,
말없이 흘러가던 시간의 감각을 내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도시는 편리했지만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감각은 서서히 둔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숲에서 살려낸 감각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감각. 그리고 나의 에너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경계심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도시를 돌아다닐수록 점점 나의 에너지가 닳아가는 것만 같았다.
사람을 만나러 도시로 나가면 나는 쉽게 지치고, 쉽게 피로해졌다.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면 그다음 날은 꼬박 집 안에서 나를 다시 충전해야만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예전에 즐거웠던 일들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아 졌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만나야 에너지가 채워지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했다. 침묵이 대화보다 깊었고, 고요가 자극보다 따뜻했다.
그 무렵, 오랫동안 마음 한편에 묻어 두었던 바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욕구를 듣다
언젠가는 해야지 하며 계속 미뤄 두었던 그 마음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듯 또렷해졌다. 나는 중고 거래 앱에 올라온 물감과 붓을 저렴하게 구입했고, 누군가 버린다는 캔버스를 얻어 조심스럽게 첫 선을 그었다.
버려진 캔버스 위에 다시 색을 얹는 일은 어쩌면 그동안의 나를 다시 살려내는 일과도 닮아 있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들이 나를 다시 나로 돌려놓고 있었다.
붓 끝이 캔버스를 스칠 때마다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천천히 가라앉았고, 설명할 수 없던 피로는
색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반응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누군가의 속도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점점 숨이 깊어졌다.
도시의 소음이 잠시 닿지 않는 작은 숲을 나는 방 안에 만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아무도 나를 요구하지 않았고,
나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존재하고, 느끼고, 색을 얹을 뿐이었다.
더욱더 강렬하게 그림을 그리고 살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잠깐 해보는 일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 두고 싶다는 마음.
나는 편히 쉬고 마음껏 작업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졌다.
늘 떠돌며 살았고, 가벼움과 자유를 사랑해 왔던 내가
처음으로 ‘머물 자리’를 상상하고 있었다.
낯선 변화였다.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나를 담아낼 그릇을 원하고 있었다.
떠돌던 시간은 나를 비우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채우고 싶은 시간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신기한 변화였다.
살아있다는 감각
도시에서 내가 원하는 공간을 찾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느껴졌다.
햇빛이 충분히 들고, 조용하며,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오고 계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무엇보다, 맨발로 흙을 밟고 살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숲 속에서의 맨발 생활.
차갑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촉촉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했던 흙의 감각.
발바닥으로 전해지던 땅의 온도와 습기, 작은 돌멩이의 굴곡까지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도시는 나를 위로 올려놓았지만 나는 아래로, 땅으로, 다시 연결되고 싶었다.
머리로 사는 삶이 아니라 발로 느끼는 삶.
하지만 도시에서 집 앞마당을 누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늘은 잘려 있었고, 땅은 대부분 주차장이었으며, 흙은 화분 속에만 존재했다.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공간은 공원 한쪽 잔디밭뿐이었고,
그마저도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점점 더 또렷해졌다.
내가 원하는 것은 조금 더 넓은 집이 아니라, 조금 더 높은 층이 아니라,
땅과 연결된 삶이라는 것을.
창문 밖 풍경이 아니라 문을 열면 바로 이어지는 바깥.
흙을 밟고,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작은 씨앗을 심고, 계절을 몸으로 통과하는 삶.
도시는 나를 보호했지만, 나는 이제 나를 열어두고 살고 싶었다.
무엇보다 도시의 공간은 비싸거나, 좁거나, 어딘가 숨이 막혔다.
벽은 가까웠고, 창밖은 회색이었고, 임대료는 나의 자유를 다시 계산하게 만들었다.
나는 또다시 묻게 되었다.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은 이 도시 안에서 가능한 걸까.
그러자 도시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선명함이 다가왔다.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기준에 나를 맞추지 않아도 되는 삶.
나는 처음으로 ‘여기 말고 다른 곳’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편리함보다 숨을, 속도보다 리듬을, 소유보다 감각을 택하는 삶.
그건 도망이 아니라 방향 같았다.
무언가를 피하려는 움직임이 아니라 나에게 더 맞는 곳으로
조용히 기울어지는 마음.
그 순간, 막연했던 갈망이 하나의 질문으로 바뀌었다.
시골에서의 삶.
그건 단순히 도시를 떠나는 선택이 아니라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상상해 보았다.
아침이면 문을 열자마자 바람과 햇빛을 맞이하고, 흙을 밟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삶.
계절이 바뀌는 속도를 달력이 아니라 피부로 아는 삶. 작은 텃밭을 가꾸고, 비 오는 날엔 빗소리를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해가 지면 자연스럽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리듬.
감각이 둔해지지 않고, 에너지를 과하게 쓰지 않아도 되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충분한 삶.
시골에서의 삶, 그건 낭만이 아니라 내 몸이 기억하는 방향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깊은숨이 쉬어졌다.
마음의 북소리
내 가슴에서 선명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처음에는 희미했지만 점점 또렷해졌고,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척하기 어려워졌다.
그 소리는 불안이 아니었다. 충동도 아니었다.
오히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확신에 가까웠다.
그 소리는 내 삶이 나를 부르는 소리 같았다.
조금 더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고, 그 울림에 온전히 귀 기울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나는 열흘간의 침묵 명상 코스에 참석했다.
말하지 않고, 눈을 마주치지 않고, 휴대폰도 없이 오직 나와 함께 머무는 시간.
처음 며칠은 오히려 머릿속이 더 시끄러워졌다.
그동안 미뤄 두었던 생각들, 억눌러 두었던 감정들, 설명되지 않던 두려움과 갈망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고요해질 줄 알았던 시간은 나를 더 깊은 소용돌이로 데려갔다.
그리고 어느 날, 이유를 알 수 없는 복통이 시작되었다.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며 몸이 급격히 비워졌다.
나는 명상하러 왔는데 몸은 마치 오래 쌓여 있던 무언가를 토해내듯 반응하고 있었다.
괴롭고 힘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는 낯선 직감이 스쳤다.
아, 지금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구나.
몸이 먼저 정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코스가 반을 지나 막바지로 향하던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선명하게 한 문장이 들려왔다.
“마이산으로 와라.”
그 소리는 크지도 않았고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또렷해서
깨어난 뒤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 명상을 하는 내내
그 문장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고요 속에서, 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다시 그 울림이 올라왔다.
“마이산으로 와라.”
코스가 끝난 날, 배낭을 메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그때 트럭을 타고 지나가던 아저씨가 내 앞에 잠시 멈추더니 창문을 내리고 말을 걸어왔다.
“어디까지 가요?”
전주까지 간다고 하니 마침 그쪽으로 간다며 태워주시겠다고 했다.
낯선 이의 차에 오르며 이상하게도 경계심보다 평온함이 앞섰다.
한국에서 이렇게 우연한 친절이 낯설었지만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가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시골집을 구하려고 하는데
이 근처에 빈집이 있을까요?”
아저씨는 잠시 나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동네 이장 형인데 , 한번 동생한테 물어볼까?”
그 말은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이 되었다.
차 안에서 바로 전화를 연결해 주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이장님의 연락처를 받았다.
그리고 이상할 만큼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며칠 뒤, 나는 작은 마을의 빈집을 보러 갔고,
햇빛이 들어오는 마루와 바람이 통하는 창문, 마당의 흙을 밟는 순간
알아버렸다.
아,
여기구나.
전주로 향하던 우연한 차 한 번이 삶의 방향을 바꾸는 다리가 되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들었던 그 이름이
현실의 좌표가 되었다.
마이산이 더 이상 상징이 아니라 내가 걸어갈 땅이 되었다.
명상 센터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오래된 시골집은 내가 딱 원하는 흙마당 집이었다. 흙을 밟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시골 살이를 결심했기 때문에 제일 내 눈에 들어오는 것도 흙마당이었지만 주인아저씨는 마당에 잔뜩 자란 잡풀들이 성가신 듯 이런 집에 살려면 풀을 잘 베야 된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으셨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어떻게 이 집이 변신할지 기대감에 부풀어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100일의 여름, 집을 살리다.
시골에 내려와 처음 마주한 집은
오래되고 낡은 집이었다.
나는 그 집을 정리하는 데
꼬박 백일을 보냈다.
쓸고, 닦고, 버리고,
남길 것과 떠나보낼 것을 구분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흙마당을 파면 숟가락도 나오고, 호미도 나왔다.
그리고 길고 통통한 지렁이들이 꿈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행여 다칠까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흙을 팠다.
조금이라도 정리되면 씨앗을 뿌리고, 아침마다 햇빛을 쬐며 물을 주었다.
새싹이 하나둘 올라오는 모습에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설레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는 버려진 물건들에 그림을 그렸다.
쓸모없다고 여겨졌던 것들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시간이었다.
집을 살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함께 살리고 있었다.
7년 전 블로그에 기록해 놓은 시골살이를 결심한 이유
유목민의 삶에서 정착인의 삶으로.
유목민의 삶을 잠시 멈추고 산골마을에서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십 년을 넘게 내가 살고 싶은 곳을 찾아 집을 옮겨 다니며 살다가 내 이름으로 처음 내 집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물론 집을 산 게 아니라 아직 내가 소유한 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주인의 눈치 없이 내 맘대로 꾸미고 살 수 있는 공간이라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고 심장이 뛸 정도로 설레기도 하는 의미 심장한 집이다. 전 세계 다양한 나라를 여행 다니며 현지인과 여행자 사이를 오가며 수많은 집에 머물기도 했지만 배낭을 풀었다 쌌다를 반복하며 채우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힘들지 않게 비우는 게 최대 과제였던 삶에서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공간에 온전히 나의 취향으로 채우며 내가 원하는 삶을 가꿔가기 위해 나는 이미 다 완성되거나 완벽한 집보다는 내가 나답게 온전하게 살고 싶은 집에서 살고 싶었다.
아파트나 오피스텔처럼 시멘트로 만들어진 집이나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구조에 부담되는 월세값을 내면서 살아가기보다는 월세값 부담 없이 흙을 밟으며 흙을 만지며 살고 싶었다. 아파트가 싫었고 답답한 도시는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마당 있는 집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답답한 도시가 싫을 때마다 배낭을 메고 어디론가 떠났다. 적게는 한 달 길게는 몇 년씩 그렇게 배낭을 메고 살고 싶은 마을이나 나라에 가서 살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서울에 돌아올 때마다 내가 태어난 서울이 점점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항상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고 남들과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비교하며 불안해했다. 길을 걷거나 지하철에서 스치고 지나가도 미안하다는 말대신 욕이 먼저 튀어나올 정도로 분노가 가득했고 가진 게 많아서 버려야 될 것도 많지만 항상 부족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며 불행해했다.
그랬다.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마음은 어두웠고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내가 행복해도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금방 지쳤다. 사람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회복하고 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자꾸 무엇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했고 무엇을 하지 않고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란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행복을 찾아다녔다.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행복한 강의를 쫓아다니고 열심히 돈을 벌고 비싼 음식을 먹고 근사한 식당이나 장소에 가서 행복한 모습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것을 즐겼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보다 행복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가능한 일치하고 몸과 마음과 영혼의 조화롭고 건강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 무엇을 하냐고만 묻고 무엇을 해야만 하고 무엇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난 내 속도대로 살아가고 싶은데 도시에서 다른 사람들의 속도를 맞춰가려면 항상 숨이 차오른다. 그래서 자주 쉬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다들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려고 하지만 잠시 멈춰서 옆을 돌아보거나 뒤를 돌아보며 조금 뒤처져 있거나 넘어진 친구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은 보기 힘들었다.
친구와 만나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쉴세 없이 카톡이 울리면 답장을 해줘야 하고 핸드폰을 만지는 탓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았다. 친구들은 항상 고민과 걱정이 많았고 불안해했다. 친구들을 도시에서 만나면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도 피곤했고 적당히 벌고 잘살자는 생각으로 살면서 내 주머니는 넉넉하지 않은데 그렇게 지출되는 돈은 불편하고 아까웠다. 어디를 가도 시끄럽고 사람 많은 서울에서는 상대에게 집중하기란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날씨가 조금이라도 좋으면 도시락을 싸서 공원이나 고궁에 소풍을 가거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밥 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알았다.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도 유명한 관광지나 여행책자에 나오는 곳을 찾아가는 것은 좀처럼 흥미가 없다. 그 나라에 가서 공원이나 산이나 바다에 가서 놀거나 로컬 마켓에 가서 신선한 재료들을 사 와 요리를 하고 사람들과 나눠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그것이 내가 여행지에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대 자연의 감동만큼이나 큰 것이 사람과 마음을 나눌 때이고 여행에서 돌아와도 마음속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눈에 담은 것보다 마음에 담은 것이었다. 그 이유는 마음에 담을 때는 몸이 기억을 했다.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웃고 울 때 내 몸의 감각들은 살아난다.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은 배낭 여행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물질적인 것보다 감동적인 것이다. 배낭을 최대한 가볍게 하면서 다녀야 되기 때문에 아무리 값비싼 선물을 받아도 소용이 없다. 오히려 잃어버릴까 봐 무거울까 봐 걱정만 늘어난다. 하지만 항상 배가 고픈 배낭여행자에게 따뜻한 밥 한 끼는 눈물이 나게 고맙고 감동이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초대받는 것보다 집에 초대받는 날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특별한 날이다. 그는 나에게 그의 삶의 예술을 더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게 허락했으니까.
오랫동안 유목민으로 지내면서 많은 것을 잃었고 버렸고 떠나보내야 했지만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호기심 가득한 여행자의 눈과 세상에서 받은 사랑이고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나의 영혼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이 없어졌고 여행길에서 훈련된 단단해진 마음 근육으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대한민국에서도 건강하게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난 이곳에 와있다.
흙을 밟고 흙을 만지며 사람들에게 정성껏 건강한 밥 한 끼를 차리며 내 속도대로 살아가고 싶어서.
시골 살이 한 달 하고도 보름 되던 날.
시골살이 한지 한 달이 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농가주택에 배낭하나 텐트하나 침낭하나를 들고 내려와 집을 고치면서 지내려고 했는데 그냥 집도 고치지 않고 이대로 살기로 했다. 처음에는 여기저기 구멍 난 벽과 먼지 쌓이고 파리똥들이 가득 묻은 더러운 천장과 곧 무너질 것만 같은 헛간을 보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가늠이 잡히지 않아서 막막해졌다.
손대기 시작하는 순간 어머어마한 노동과 자본이 들어가야 되는데 동시에 철거를 하면서 어마어마한 쓰레기들이 배출되는 상황이 마음이 불편해졌다. 최대한 쓰레기를 줄이면서 살고 싶어서 새로운 물건들을 안 사는데 조금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새로 다 바꿔서 새 공간으로 만들어서 사는 게 영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덜 소비하고 조금 덜 낭비하고 조금 덜 지구를 훼손시키면서 살고 싶어서 왔는데 장판과 벽지를 뜯고 헛간을 철거하면 쓰레기가 한 톤은 쌓일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은 새로운 물건을 사거나 소비를 해서 고치고 수리하는 것은 잠시 미루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온갖 쓰레기들을 보면서 이것부터 정리를 하고 다시 재활용해서 쓸 수 있는 물건들은 잘 닦아서 쓰기로 했다. 참 희한하고 신기한 것은 관심 있게 집안을 구석구석을 뒤질수록 필요한 물건들이 어디선가 뿅 하고 나타난다. 땅을 파면 호미가 나오기도 하고 헛간을 뒤지다 보면 삽이 나오기도 하고 창고를 뒤지다 보면 박물관에 전시할만한 오래되고 귀한 물건들이 발견되는데 별일 아닌 이런 일들이 나는 너무나 신기하고 감사하다.
오래된 소반은 기도하는 제대로 사용되고 있고 뽀얗게 먼지 쌓여 있던 밥상도 창고 구석에서 발견해서 윤이 나도록 반질 반질 닦아서 매일매일 정성껏 밥상을 차려 먹는 밥상으로 아주 잘 쓰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고 소중한 물건들이 하나씩 하나씩 제 빛을 발하고 있다. 나 또한 그러하듯이. 나에게 어울리는 집 아니 나와 같은 집에 와서 내 영혼을 돌보듯 가꾸고 있다. 그렇게 한 달 반이 지났다.
그 사이에 열다섯 명의 친구들이 다녀갔고 아름다운 영혼들이 머물다간 자리에는 생명의 나무가 자랐다. 함께 마음을 나누며 영혼이 연결되고 살아나는 생명의 집에서는 우리도 함께 치유되고 조금씩 영혼의 키가 자라났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우주와 땅 밑의 세상이 언제나 궁금했다.
시골 살이의 삶이 도시에서 삶처럼 편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번 천 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하늘을 많이 보고 흙을 밞고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지구를 덜 헤치면서 사는 그 죄책감을 덜 수 있어서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버튼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던 삶에서 모든 게 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세상이 나는 이상하게 편하다. 벌레가 많아서 불편한 것보다 살충제를 치지 않고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어떻게 물과 전기를 덜 쓰고 살아갈까에 대한 나의 고민과 신념사이에서 나를 지키는 것이 하나뿐인 지구를 지키는 일이니까. 한번 파고들면 끝없이 진지해지는 나의 고뇌와 생각을 덜어주는 일은 결국 몸을 쓰는 일이다.
땀을 흘리고 한바탕 춤을 추고 신나게 웃는 일. 결국 그게 행복이다.
머리와 몸이 균형 있게 사용될 때 조화로운 삶이 만들어지니까. 글을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오랫동안 기계를 만지는 일은 내 몸을 힘들게 한다. 눈도 뻐근하고 손도 마비가 오다. 빗자루로 방을 쓸고 걸레질을 하고 마당에 나가서 달빛 샤워를 해야겠다. 오늘은 반달이 떴네:)
- 2018. 07.25 블로그에 남겨놓은 기록 -
그때 그 시절의 나의 소개
깔깔 마녀 - 무엇인가 키워내고 살려내고 있다. 남들과 같은 듯 다른 꿈을 꾸며 온 우주를 돌고 돌아 지금은 어느 산골마을에서 하나의 우주를 품고 있다. 이곳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고 믿으며 하늘을, 나무를, 별들을, 고양이를 키워내고 있다.
레인보우 패밀리
여름이 깊어가며 여행자 친구들이 하나둘 집을 찾았다.
" 서연, 나 샤워 좀 해도 될까?"
조심스럽게 묻던 친구는 오랫동안 집 없이 레인보우 게더링* 으로 살아온 일본인 친구였다.
레인보우 게더링은 전기와 화학제품을 사용하지 않고, 가능한 한 살생을 피하며 자연에 해를 최소화하는 삶을 실험하는 유동적인 공동체다. 도시도, 건물도 없는 숲이나 자연 속에 사람들이 잠시 모여 돈 대신 나눔으로 생활한다. 전기가 없으니 밤이 되면 촛불과 별빛이 전부고, 세제 대신 재와 흙을 쓰며,
음식은 함께 만들고 함께 먹는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매년 크고 작은 레인보우 게더링이 열리지만 공식적인 홍보는 없다.
어디에서 열리는지, 언제 모이는지는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고 대개는 누군가의 초대를 통해서만 알게 된다. 그래서 레인보우 게더링은 축제라기보다는 ‘이런 삶이 정말 가능할까?’를 몸으로 살아보는 실험에 가깝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신 자연의 리듬에 더 가까워지고, 소유하지 않기에 오히려 가벼워지는 시간.
나는 그곳에서 사람이 자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배웠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샤워를 하고 나오더니
"와 얼마 만에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건지, 너무 고마워 서연"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서 드라이도 없이 긴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환한 미소를 짓던 친구의 얼굴을 보며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거라도 베풀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서 감사함이 차올랐다. 여행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던 경험으로 나도 언젠가 내가 받을 것을 여행자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꿈을 항상 꿨었는데 그 꿈이 벌써 이루어 지다니! 누군가에게는 심란스럽게 보일 수 있는 시골집이지만 어떤 누군가에게는 꿈의 집이기도 했다.
집 없이 살아가던 레인보우 친구들은 멋진 집을 가졌다며 축하해 줬다.
내가 마당에서 키운 채소로 밥상을 차려 함께 먹으며 웃던 시간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 부자구나.'
통장 잔고 때문이 아니었다. 이 공간, 이 시간, 함께 웃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도란도란 밥을 함께 지어 나눠 먹고, 서로의 인생의 지혜와 재능을 나누며 화폐의 교환이 아닌 마음의 교환이 주는 삶에서 오는 만족감은 나를 부자로 느끼게 해 줬다.
혹독했던 장마를 지나 살아남은 작물들로 차린 여름 밥상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했다.
그 여름은 나를 살려낸 시간이었다.
여행자 친구들이 머무른 덕에 하루도 혼자 있었던 적 없이 꽉 찬 여름을 보냈다.
나 잘 살고 있구나의 감각
잘 먹고 잘 사는 꿈. 시골에서 가능할 것 같았다. 적당히 벌고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월세 10만 원, 전기료 5천 원, 인터넷+ 통신비 3만 원, 비건으로 살아가고 있어서 고깃값으로 나가는 건 없었고 텃밭 채소들로 밥을 해 먹고 가끔 계란, 빵, 맥주 정도 소비. 10만 원 정도, 교통비는 대중교통 이용해서 한 달 만원 남짓. 50만 원 벌면 충분했고 100만 원 이상 벌면 여유 자금은 겨울 보일러 값이니 이것저것 수리비용으로 저축했고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한 일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텃밭 보조 강사, 영어 수업, 명상 강의, 타로 강의, 벽화 작업, 마을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의 품앗이와 알바, 각종 생존기술 등등으로 살아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던 시절이었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고 후회도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누군가 " 행복하니?"라고 물으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응, 행복해"라고 말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