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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ㅇㅅㅇ Sep 17. 2016

<시간을 달리는 소녀>

영화에세이

정신없이 달렸던 적이 있다. 네가 떠나는 당일 우리는 약속한 적 없었지만, 갑자기 걸려온 네 전화에 나는 그게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것처럼 뛰쳐 나갔었다. 이미 너를 볼 수 있는 날은 지나간 줄 알았는데, 오늘이라는 하루의 기회가 더 생긴 것이었다. 벌떡 일어나 아침부터 그리 달려본 적이 없었다. 그 어떤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몇시인지도 모른채로 달리는데 이상하게 행복했다. 곧 너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더 바랄 것도 없었다. 발목에 족쇄라도 달은 듯 그동안 네게 늘 주춤하며 어쩔 줄 몰라하던 발걸음이, 네게 달려가는 그 순간 가벼워졌다. 기어코 나눈 '잘가'라는 인사에 너에 대한 후회도 미련도 아쉬움도 모두 사라졌다.


네가 없지만 나는 외롭지 않다. 사람간의 인연에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서로를 위해 이별을 잘 정리하는 법은 중요했다. 네 덕분에 처음으로 이별이라는 게 힘들지 않았다. 왠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강렬한 믿음 같은 게 들었다. 네가 건낸 말 한마디는 그 어떤 약속보다도 희망적이었다. 시간은 자신과 함께 달릴 때마다, 지나간 시간들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내가 아닌 너를 위해서 시간을 썼을 때 나는 많을 것을 느꼈다. 없던 일로 해버리고 싶었던 순간들 또한 모두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너라는 경험이 돌아갈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끝없는 시간 속에서 나를 강해지게 만들어주었다. 수많은 계절이 흘러가고, 너와 보낸 몇번의 여름이 지나가면 그때는 우리,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시간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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