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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막) 짝사랑이 끝나고 남은 것

(안부귀영화2)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초별


*공지 없이 한 주 늦게 올리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영화를 사랑했다.

13살부터 시작된 첫사랑은 내가 고지식했던 탓인지 서른여섯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짝사랑만 했던 13년, 그리고 실제로 영화를 만들고 영화 일을 해 봤던 10년. 장장 23년간의 사랑이었다. 아래는 2018년, 아카데미 수업 중 정성일 선생님의 마지막 과제('나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로 제출했던 글의 발췌다.

그럼 다시, 글을 마무리 짓기 위해 나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돌아가 볼게요. 영화는 저에게 첫사랑이라고 말했었어요. 첫사랑은 각자의 환상이 씌워져 있기도 하고, 뭣도 몰라 풋풋 하고,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는 그런 사랑 아닌가요? 그런데 그런 말을 들었어요. 사랑을 할 때의 그 두근거림은 사실 좋아서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고요. 그게 아니라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해 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거래요. 그게 딱 지금 제가 느끼는 두근거림의 근원과도 같더라고요. 저도 영화만 생각하면 여전히 두근거리는데 그 가장 큰 이유가 “영화가 나를 좋아해 주지 않으면 나는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 때문이거든요.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요... 저는 아무리 제가 영화를 하려고 발버둥 쳐봤자 만약 재능이 없어서, 운이 없어서, 여러 이유들로 영화를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상상만 해도 사실 많이 두렵고 엄청 슬퍼져요.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무서울 정도로요.. 정말 엉엉, 대성통곡하며 밤낮없이 오랫동안 울 것 같아요. 17년간 정말 열렬하게 짝사랑해 오던 사람한테 차인 거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아닐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계속 콩깍지를 쓴 채, 절대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첫사랑만 쳐다보며 평생을 살다가 죽고 싶은 건 또 아니에요. 저는 이 사랑이 끝나야만 한다면 (제 첫사랑을 마지막 사랑으로 못 만든다면) 한시바삐 끝나길 바라요. 그래서 진짜 몇 날 며칠을(몇 년까지 우는 건 안 되겠죠?) 엉엉 울고, 훌훌 털어버릴 거예요. 그렇게 털어내고 난 후에는 이제 영화를 첫사랑으로서가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로서 사랑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간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이 꼭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라면 사실 빨리 왔으면 좋겠고요.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온다면 좋을 것 같기도 해요... 음... 그런데 이 논리가 맞는 논리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사실 안 맞는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만 이젠 모르겠어요. 이렇게 자꾸 영화를 사랑에 비유하며 어쩌고 저쩌고 하고 있는데 저 스스로도 사실 이런 식의 비유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너무 오글거려 손발이 안 펴지고 뇌가 쪼그라든 것 같아요. 그러니 이제 그냥 그만 설명하겠습니다.


아주 중증이었다. 몇 년 뒤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기간에 상담 선생님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영화를 그만 둔다면‘ 이라는 것을 언어화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상상하기 싫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그런 순간이 오면, 그래서 영화를 그만두게 된다면 어떨 것 같냐고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나는 한국을 떠나버리고 싶다, 한국에서 못 살 것 같고 아예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었다. 흥미롭다고 하시며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그게 어떤 감정인지 잘 들여다보자고 하셨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들여다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고, 계속 시나리오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만 이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참 많은 사람들이 영화와 사랑에 빠져있었다. 눈이 멀어서 학교나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빚을 내고 전세금을 빼가면서 까지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영화가 무엇이길래. 영화가 만약 인간이라면 양귀비 정도의 여자인 것일까? 도대체 어떤 파괴적인 매력이 있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일까. 궁금해하면서 나도 열심히 허우적대며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이 왔다. 저예산이지만 꿈만 꾸던 장편 영화를 운 좋게 만들어본 현재다. 지금의 내가 느낀 감정은 '허망함'이었다. 허망함... 지리멸렬한 짝사랑의 끝에, 나에게 남은 감정이 허망함이라.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처럼 영화에게 배신당할까봐 불안에 떨고 있지 않다. 한국을 떠나버리고 싶지도 않다(물론 다른 의미로 떠나고 싶긴 하지만). 이미 짝사랑이었음을 알게 됐고, 이미 배신당했음을 알게 돼서 이제 초월해 버린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영화라는 환상에 대한 콩깍지가 드디어 벗겨진 것일 수도 있다. 더럽고(?) 치사한(?) 영화 만들기의 과정을 낱낱이 겪어봤기 때문일지도. 실제로 너무나 사랑해서 영화를 시작했지만 그 과정이 너무 지저분하고 상처투성이라 상처만 입고 영화를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


나 역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상처를 주고, 받느라고 윤리적, 도덕적 고민들이 생겨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영화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가야 하는 연출로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며 함께 일을 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시간들이었다. 마키아벨리 군주론을 뒤적이며 "군주는 단 한 번만 잔혹함을 보여주고 은혜를 베풀어 민심을 잡아야 한다. 대중은 해를 끼칠 것으로 생각한 자에게 은혜를 입으면 몇 배나 더 큰 고마움을 느낀다. 사랑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들에 밑줄을 좍좍 그었던 때도 있었다. 권모술수와 결과 지향을 정당화하는 군주론은 악독한 연출이 되려는 마음을 먹게 해 주는데 아주 훌륭한 교과서가 될 수 있겠다(그래서 연출지망생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내 가치관과는 정반대를 주장하는 위험한 책이기에).

그러나 이건 비단 영화판에서만 나타나는 고민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다른 영역이든 그 일이 진행되는 과정 안에는 더럽고 비열한 면면들이 다 있을 것이고 어떤 종류의 리더든 사람들을, 한 팀을 이끌어야 하는 리더라면 비슷한 고민들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더러움은 눈 감아버리고 감내하면서 꿋꿋이 일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사회 속 어른들의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런 어른이 되고 싶은가는 또 별개의 문제지만, 이런 것들을 알아버렸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는 정말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쯤 되면 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진절머리가 났을 수도 있다. 이 정도면 정신병자 아니야? 지가 피터팬이야? 이미 한참 어른이구만 왜 자꾸 자기는 어른이 아닌 척 하지? 그러게나 말이다. 이 정도면 나도 피터팬 증후군 환자임을 인정해야겠다(그러나 나는 피터팬 증후군 환자임을 인지하고 있는 어른 환자다).


어쨌든 이렇게 10년간, 영화를 하는 시간을 통해 나도 어른이 되어 버렸기에 짝사랑의 불안에 바들바들 떨던 아이는 사라졌다. 이제는 더 이상 “영화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어떡하지?”를 묻지 않는다. 대신 나는 이제 이렇게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계속 사랑할 것인가?


첫 장편영화 개봉을 기다리던 최근 1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방황했던 것 같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주변의 연출 동기들은 다음 시나리오 작업에 바로 착수하고, 계속 열심히 다음 작품, 또 다른 작품들을 만들기 위해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은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불안감에 일단 시나리오를 하나 더 썼다. 데드라인이 필요해 창의인재지원 사업에 지원했던 덕분에 쓸 수 있었다. 데드라인을 앞두고 이야기 안에 푹 빠져 있으니 또 재미있었다. 아직 완성도가 떨어지고, 내 머릿속에만 환상처럼 존재하지만 이 이야기도 영화로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나 혼자) 들었다. 원래 이게 영화 제작 과정의 시작 아닌가. 그러면 빨리 재밌어하며 다음 고를 쓰고, 사람들에게 돌려보기도 하고, 강렬한 믿음을 가지고 사기를 치기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가 재미있는 영화가 될 거라고 나부터 눈을 가리고 아웅 해야 하는데 그 단계로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재미는 있는데, 다른 것들도 쓰고 싶은 것들이 있긴 한데... 자꾸만 어딘가 해소되지 않는 갈증이 느껴졌다. 무언가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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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편파적이고 제멋대로 해석한 영화제작 과정입니다. 혹시나 저를 아신다면 (제발) 모른척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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