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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실 Jan 01. 2024

결국 시간은 밀도다

모래주머니 효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 윤문 없이 적어 내려가는 오늘의 일기>

 https://brunch.co.kr/@chostarsil/228

(지난 근황에 이어 수년 만에 근황을 전합니다)


 2024.01.01 새로운 한 해를 열며


 아이를 기르며 문득씩 모래주머니를 찬 채로 물속을 걷는 상상을 했다. 한 없이 행복한 장면들이 나를 사로잡다가도 지독히 유한한 시간이란 녀석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곤 할 때, 아 나는 지금 물속을 걷고 있구나. 찬찬히 둘러보니 물 위에선 볼 수 없었던 산호초가, 스쳐는 온갖 생물체의 신비로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신 숨을 참고 견디는 인내, 모래주머니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한 발짝 두발 짝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십이 년 차, 영원할 것 같던 계절이 끝나고 새로운 문이 열렸다.



 내게 안겨야만 했던 이들이 나를 보듬어 주고

나의 격려를 바라던 이들이 그 격려를 내게 되돌려 주고 있다. 이토록 놀라운 육아의 신비라니!


 아이를 키우며 나는 성경에 나오는 요한복음 12장 24절을 떠올리곤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섭리에 관하여. 여성에게만 개인에게만 육아를 떠 넘기는 구조적 문제는 별론으로 하고, 생명을 살리고 나아가 사람을 돌보고 키우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롭고 아름다운 과정이다. 큰 아이가 돌쟁이였을 무렵, 대학교 동아리 선후배들 앞에서 <육아(育兒)는 육아(育我)다>라는 주제로 간단한 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나의 근황을 소개하려니 떠오른 슬로건이었다.


 2024년 새해를 맞아 다시금 그 이야기를 곱씹어본다. 매 순간 곡예 타듯  온갖 일을 저글링 해야 했 시절을 지나, 아이들과 함께 웬만한 대화 거의 모든 일을 함께 할 수 있게 된 지금. 나는 얼마나 자라왔나 반추해 보면서.


 올해는 아마도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새로운 나이테를 열었던 해로 기억될 것이다. 십여 년간 지속해 온 저글링 생활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고 최소 3년간 학교 집만을 오가며 전업 수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대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평일엔 기숙사에 주말엔 서울에 머물게 되었고, 아빠의 독박 육아가 시작됐다.


 네 명 각자가 여러모로 난관에 부딪히게 되겠지만,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된 순간부터 합격까지의 여정이 그러했듯, 앞으로의 3년도 부르신 뜻을 따라가며 은혜를 누리는 항해이기를 기도할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간만의 공부재밌고 설레는 요즘을 나고 있다.


 공부의 방향과 쓸모가 명확해서인지 매시간을 더욱 밀도 있게 쓰게 된다. 우리 집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엄마가 자랑스럽다는 아들의 말에 아주 큰 힘을 얻어가면서(돈으로는 살 수 없는 보약이랄까).


 무엇보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사라진 모래주머니만큼 가볍게 달려 나가는 내가 보인다. 함께 선 아이들도 이제 스스로 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팀전이 시작되었다. 밀어주고 끌어주며 함께하는. 이전보다 훨씬 더 커진 맷집과 빠른 속력으로.


 다음 계절엔 오늘의 우리를 어떤 표정과 그리움으로 회상하고 있을까. 그날의 시점에서 오늘을 바라보며 나아가야지. 아이들과 함께 때론 소소하게 그러나 책임감 있게 마무리해 온 하루하루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 레이스를 잘 마무리해보려 한다. 그 경험이 또 다른 시작이 될 테니까.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도

2024년 올 한 해가

시작하는 용기와 끝내는 힘으로 가득한 한 해이 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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