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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태진 Oct 20. 2021

에필로그: 마음과 머리를 잇다 (2)

머라로 하는 생각은 합리적이고 마음으로 느끼는 또는 여겨지는 감정이나 욕구비합리적이라는 오랜 전통(?) 마음에 욕구, 다시 말해서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와 관련된 욕구가 담겨 있고 그런 이유로 인해 인간은 오랫동안 마음이 고 있는 욕구를 범죄시 하거나 악으로 규정해 왔기 때문에 마음을 홀대하거나 심지어는 적대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전에 제가 본 어느 영화에서 미치광이 히틀러 때문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해외로 망명한 독일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2차 세계대전 전범인 아이히만을 재판하는 예루살렘 전범재판 현장에 참석했는데 그녀는 그 재판장에서 아이히만이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아 무덤덤하게 "나는 그저 히틀러가 시키는 대로만 따라 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쓴 책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란 용어를 쓰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글에서 저는 실존주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빅터 프랭클을 언급했는데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그의 책에서 "죄책감은 인간만의 특권이다"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 표현을 읽고 저는 "왜" 죄책감이 인간의 특권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얼핏 인간이 저지르는 나쁘고 사악한 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듯한 인상을 받아서 그에게 조금 반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악의 평범성이란 표현처럼 범죄를 저질러 놓고서  "남들 다 그러는데 내가 무슨 잘못이냐" 또는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라고 하면서 뉘우칠  줄 모르거나(저는 바닷물에 플라스틱을 버려서 물속 생물들이 그걸 먹이로 착각해 먹고 죽거나 외국인 노동자를 초과 노동시키고  추운 겨울날이나 더운 여름날 난방시설이나 냉방시설을 갖추 않은 열악한 컨테이너 숙소에 여럿이 머물게 하면서  꼬박꼬박 부당한 액수의 월세를 받아 챙기는 등의 평범한(?) 악을 염두애 두고 있습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적반하장 식으로 "내가 한 행동은 범죄가 아니라 내가 세상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룬 훌륭한 행위이다. 분한 것은 세상의 악을 일소하지 못하고 붙잡힌 것이다"라고 뻔뻔스럽게 자신의 흉악한 범죄를 합리화시키는, 사이코패스라 불러도 과하지 않은 범죄자들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책감이란 인간 의도적으로 또는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 없는 정직한 마음의 표현인데 이때 중요한 점은 마음이 간절히 전해 오는 죄책감, 즉 양심의 가책; 그것도 허황되거나 순간적이고 감상적이면서 동시에 도취적인 사이비 죄책감이 아니라 증거를 들이대면서 "이래도 네가 저지른 범죄가 나쁜 짓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그 범죄로 인해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이 마음은 너 자신의 마이 아니야?"라고 묻는 듯한 죄책감은 이런저런 이유로 방해받을 수 있어서 가능성으로 존재하지만 만약 그런 죄책감이 인간에게 전혀 존재하 않았다면 세상은 반성할 줄도 후회할 줄도 모르고 제 이익만을 챙기느라 서로 싸우고 죽이고 착취하고 기만하는, 철학저 홉스의 표현을 빌면 이미 오래전에 "만인에 대해 만인이 투쟁만을 일삼는" 끔찍한 지옥이 되어버렸을 것이라는 생각 말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자 "죄책감은 인간의 특권이다"라는 빅터 프랭클의 말 비로소 이해되었고 그에 따라 그 말을 한 그에 대한 반감도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성이 그런 행동이 옳지 않다 혹은 나쁘다고 판단할 수 있는 밑바탕, 즉 근거는 무엇일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 밑바탕이 "마음", 즉 제멋대로 또는 저가 편하자고 멋대로 바꿀 수 없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의 윤리적 판단 능력이 갓난아이 때부터, 어쩌면 태아 때부터 외부로부터 배우지 않고도 선천적으로 느낄 수 있는 쾌감과 불쾌감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아유는 쾌감(즐거움)과 불쾌감이라는 느낌으로서의 단 범주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가 걸음마를 익혀서 제 발로 걸을 수 있게 될 때 처음 그 아이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배변 활동입니다. 그 전에는 부모, 특히 엄마가 기저귀에 배변을 하고 그 불쾌한 느낌 때문에  아이가 울면 그 신호를 알아듣고 기저귀를 갈아주었지만 이제 스스로 걷 되었다는 조건의 변화 때문에 부모는 아아에게 스스로 화장실로 걸어가서 배변할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때 아이가 기저귀에 배변하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엄마가 데리고 가서 어떻게 변를 사용하는지를 가리켜 준대로 화장실에 가서 배변을 하는 어린 아는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엄마로부터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 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측면이 없을 것이라고 부정할 순 없지만 기저귀를 하고 배변할 때 축축한 느낌과 더러운 냄새 등이 화장실에 가서 배변하도록 하는 자극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종으로서 인간은 내게 불쾌한 것은 남에게도 불쾌하다는 원형으로서의 선천적인 판단 능력을, 분석심리학자인 구스타프 융의 용어를 빌자면 인간에게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공통된  유전자의 형태로 "집단 무의"을 가고 있어서 어떤 대상(뱀이나 파리 또는 거미 등)에게서는 두려움이나  혐오스러운 불쾌감을 공통으로 느끼고 반대로 어떤 대상에게서는 선천적인 쾌감(꽃 향기나 나무 냄새 또는 원한 람 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즐겁거나 불쾌한 공통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사회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의 윤리의 성립이 가능해졌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때 중요한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건 학습을 거의 또는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본능에만 의지해서 생존하는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욕구에 바탕을 두고 학습하려는 선천적인 충동이 존재하는데 그 유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학습을 통해 생존 조건을 마련하지 않으면 생존이 심하게 위협받거나 아예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무리를 이루고 인간적인 공통적 속성들과 함께 재능, 재주라고도  불리는, 씨앗의 형태로 자연이 준 개인적 능력은 흔한 표현으로 마땅히 갈고닦아서 성장시켜야 하는데 무리를 이룬 인간 집단 앞에는 먹고 입고 쉬고 자는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과 함께 안팎의 적으로부터 무를 지키지 않으면 무리의 생존과 안녕이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법과 제도를 통해서 사회질서를 강제하게 되었는데 저는 이때부터 무리(공동체)의 위계질서가 천천 확립돠어 왔다고 짐작합니다. 그런데 사회의 위계질서는 나보다 우월하다, 열등하다는 범주를 통해 기능하는데 이때 그 지표는 특정한 분야나 활동에서 그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는가 아닌가 여부입니다. 자금은 거의  전 세계적으 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지만 아득한 옛날에는 신령한 능력, 즉 신체적이나 심리적인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약초의 성분을 이용하거나 두려움까지 불러일으키는 신비한 주술을 통해서 무리를 통치하고 지배하는 주술사(shaman)가 존재했었습니다. 그리고 사냥 능력이나 창 같은 무기를 다룰 줄 아는 능력 등을 바탕으로 무라의 위계는 점점 더 정교해졌는데 이때 상위의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가고 있는 권력의 대가이자 상징은 다름 아닌 축적하고 소유한 재물의 정도였습니다. 물론 한 무리에서 무리의 생존과 안녕에 기여한 정도애 따라 공동으로 재배하여 수확한 농작물이나 기른 가축을  불균등하게 분배하는 것기계적 평등의 원칙과는 맞지 않더라도 반드시 공정함, 즉 사회적 정의와 대립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사회에 대한 또는 소속된 조직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마르크스의 용어를 빌자면 "투여된 노동력에" 따라 어떻게 공평하게, 즉 정의롭게  분배하는가입니다 그런데 요즘 표현으로 말하면 슈퍼 갑의 위치에 있는 이른바 지도저 계층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공동으로 창출한 재화를 몹시 부당할 정도로 많이  차지하게 되었고 무리의 구성원 중 누가 그에 대해 반발심을 가지더라도 지도자 계층이 소유한 권력을 바탕으로 한 폭력 때문에 쉽사리 또는 함부로 자신의 불만을 발설하거나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재화 또는 부의 몹시 불평등한 분배는 오랜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 왔고 현재도 진행형인데 그런 부의 심각한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여 평등한 사회를 지향했던 사회주의마저도 현실계에서는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심지어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더 불평등한 사회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자금 인공지능이나 사물 인터넷 또는 스마트폰과 같은 정보 통신기술의 혁신적 발달로 인해 상위계층에 속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중세를 무너뜨린 이동 기술이나 제조기술의 혁신이 부르주아지라고 불렸던 돈 많은 상인 계급과 제조자 같은 자본가들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던 것처럼 미래가 마냥 장밋빛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공포스러운 SF 영화처럼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르고 그래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유효 수요, 즉 상품이나 서비스를 돈을 주고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어서 사회적 긴장감과 불만이 점점 커져만 가다가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인 임계점에 아르게 되면 예전 9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난 흑인 폭동처럼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구세주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일거에 자신들의 심한 불안과 고통을 없애 줄 영웅을 바라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태인들을 학살한 미치광이 히틀러 같은 인물을 다시 현실로 소환해낼지도 모릅니다.


 제 능력상 더 이상은 미래를 점쳐볼 수 없는 막연한 얘기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기본적인 사회 경제적 조건들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이런 혼란스러운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제가 화두처럼 붙잡고 있는 것은 거창하고 화려하긴 하지만 무기력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까딱 잘못하면 인간을 괴물로 변하게 만들어 버리는, 이기주의와 적대적 관계를 가진 일견 흐뭇해 보이지만 허구적인 이타주의가 아니라 타인을 그저 인간적인 한계와 약점을 지닌, 그래서 때로는 실수도 후회막심한 잘못도 저지르지만 처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 행복해지려고 애쓰는 평범한 인간으로 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온갖 인간적인 감정과 욕구를 가지고 있고 머리와 그에 대해 공명하거나 반대하는 가슴, 양심을 가진 존재, 덧붙이자면 목구명이 포도청인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받아들이면서 애써 돌보려는 "자기애"입니다. 그 거창할 것 없는 사소한, 또는 소소한 이타주의의 씨앗, 즉 가능성소중히 보듬어 품고 있는 그런 건강한 이기주의 말이지요.


이제 긴 글을 드디어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인간의 선과 악은 비교적 간단한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기준은 그것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인 성장을 촉진하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 여부입니다. 그런데 우라는 커 오면서  화려하고 복잡하게 치장하고 꾸며서 멋져 보이 그럴듯한 도덕이나 윤리 내용을  참 많이 접하고 살았습니다. 너무 심각하고 딱딱한 긴 글을 써서 슬슬 작동하는 장난기 때문에 말씀드리면 제가 졸업한 대학교 근처 도 한복판에는 구청장님의 윤리적 가르침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멋있는 바위 조형물이 떡하니 서 있는데  그 바위에는 멋진 글씨체로 이렇쓰여 있습니다. "착하 살자." 참 멋있으면서도 어려운 말이지요? 착하게 사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건 에리히 프롬이 주장한 기준에 따라 잘 따져 보아야 할 화두이겠지요. 그동안 딱딱하고  긴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면서 그만 글을 맺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다들 몸도 마음도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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