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가 정신분석 이론을 세우기 전에도 심리학은 철학의 한 분파로 존재했는데 6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행동주의가 심리학의 핵심적인 패러다임이 되면서 좁은 실험실 안에서 쥐나 토끼 같은 동물을 상대로 한 실험에 의해서 증명되지 않는 심리학 이론들을 비과학적이라고 깍아내리는 자연과학적인 실증주의를 고집했고 그러한 추세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서 주류 심리학계에서는 정신분석을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면서 깎아내리고 았지만 저는 원칙적으로 프로이트가 세운 인격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이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잠시만 생각해 보면 토끼나 쥐도 동물이어서 인간처럼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면 본능적으로 물을 찾거나 음식을 찾지만 쥐나 토끼가 윤리적 본능을 가지고 있어서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다고 어느 심리학자가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를 정신이 좀 어떻게 된 사람쯤으로 여길 것입니다.
독일에서 돌아온 뒤 어느새 훌쩍 늙어버린 친구들을 술자리에서 반갑게 만났는데 저는 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물론 그저 말에 그쳤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젊었을 때 어떻게 사는 것이 옳고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었는데 그들은 마치 다른 사람들이 된 것처럼 그들의 입에서는 "인생 뭐 있어, 먹고 마시고 노는 게 인간의 본성이고 그게 제일 좋은 거야"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오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이라는 사회에는 여전히 공자님 말씀 같은 딱딱하고 엄격하고 잔인한 사회윤리가 대중매체를 통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설파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찬구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적지 않게 저를 당황케 한 말의 표현 중에 "그게 인간의 본성이고" "그게 제일 좋은 거야"라는 표현이 나중에 다시 기억으로 소환되었고 저는 그 표현들이 나중에 느닷없이 기억 속으로 불러일으켜진 이유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 표현에서마저도 윤리적 판단, 즉 어떨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을까라는 판단이 들어 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또는 "어떻게 살아야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비껴갈 수도 없어서 어떻게든 그 질문에 답변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저의 무의식이 환기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조적으로 말한 친구들을 보면서, 그것도 예전의 싱싱한 젊음을 거의 다 잃어버리고 눈가나 입가의 잔주름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어느새 나이 들어버린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이 조금 서글프고 짠해졌는데 그 이유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얼마나 자주 또는 얼마나 심하게 마음을 다치곤 했으면 저런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대학 초년생이었을 때 접했던 카프카의 어느 단편소설에 나오는 표현인 "출구 없음(Ausweglosigkeit)이라는 표현과 우울증에 대한 어느 심리학 실험에 나오는 개념인 "학습된 무기력"을 같이 떠올렸습니다. 제 눈엔 두 표현 다 현살 속의 어떤 상황을 잘 가리키긴 하지만 둘 모두 좀 극단적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사람의 삶이 흔한 표현으로 온통 고통일 뿐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삶은 고해 그 자체"이기만 하다면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라는 말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아니지만 오래전 대중가요 속애 나오는 "젊은이여, 꿈을 가져라"라는 아주 식상한 표현이 있는데 젊은이라면 마땅히 꿈을 가져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기보다는 젊은이라면 자신의 앞날에 대한 기대와 긍정적인 변화에 대한 꿈이 아직 꺾이지 않은 때여서 꿈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꿈을 앗아간다"는 표현도 가끔 쓰는데 이때 "무엇"이 꿈을 (빼)앗아 가는 것일까요? 그리고 젊은 날의 꿈을 빼앗기고 나이가 들면서 타락한다고도 말하는데 사람이 타락하게 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식상한 답변은 "돈과 권력을 얻으려고, 그것도 부당한 방법으로 얻으려 하다가"인데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기가 막힌 정답일 수도 있지만 타락이 젊은 날의 꿈을 달아나게 하는 이유로 작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꿈이 달아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젊은 날의 꿈은 무슨 이유로 달아나 버리는 것일까요? 물론 완벽하게 일반화하기는 곤란하겠지만 저는 그 이유를 그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우리가 젊을 때 가졌던 막연한 희망에 대한 내용이 제대로 일상의 삶과 연결되어 살을 붙이자 못해 너무 추상적이었거나 그저 아웃사이더의 외부적 시선으로 옳다, 그르다 라는 차원에서 세상을 보며 윤리적 판단을 했을 뿐 자신의 이해관계가 달린 문제 앞에서 "내가 손해를 보면서도 이 가치를 지지하고 옹호할 것인가, 또는 그럴 수 있을까?"라는 실존적이고 절박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제기할 경우가 그리 흔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문을 나온 뒤 예전에는 눈여겨보지 않아서 낯설게 접하는 현실이 내 문제, 즉 내 이해관계와 연결됨을 느끼면서 내가 지지하고 옹호했던 추상적인 가치를 계속 유지하고 지키려면 일정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거나 그때까지 지니고 있었던 추상적인, 즉 그 가치는 고상하고 멋져 보아지만 일상의 삶과는 많이 동떨어져 있어서 그 내용은 보잘것없고 빈약한 가치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는지 또는 구현되려고 하는지를 알게 되면서 추상적인 말로 표현된 그 가치가 풍기는 느낌을 제대로 느낄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현실 속에 제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그 가치로부터 고개를 돌려 버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가치가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될 때, 예를 들어 "아직도 세상이 그렇게 될 거라고 믿니? 참 고지식하고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놈이군.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그런 순진해 빠진 생각을 하는 거야?"라든가 "그런 말은 네 아들 딸에게나 해. 세상이 도덕 교과서처럼 돌아간다고 생각해? 중이 절이 싫으면 절을 떠나듯이 억울하고 분하면 그냥 옷 벗고 나가던가. 아무도 말리지 않을 테니. 아니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입 닫고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토 달지 말고" 같은, 사람의 마음을 환장하게 하는 말을 계속 듣다 보면 몹시 억울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겠지만 두려움과 함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끝도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피곤에 찌든 절망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결국 "애써 봤자 나만 손해이고 아무 소용도 없구나" 하면서 체념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단단한 줄로 정박된 자기 배를 저 먼바다 너머로 떠나보내고 싶다는 헛된 체념처럼 말이지요.
저도 오랫동안 못난 현실을 가려 버리는 언어의 추상적인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는데 언어는, 더구나 추상적인 언어들은 마치 굿을 할 때 무당의 춤에 맞추어 연주하는 기분 나쁜 음악처럼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마음을 홀리는 주술의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사랑, 배려, 공감 또는 이해 같은 추상적인 윤리적 단어들은 그 단어들이 각박하고 비정하고 사악하기도 한 현실 속에서 올바로 그리고 힘겹게 쓰이지 않는다면 구체적인 현실과 맞닿지 않은 채 그저 흐뭇하고 편안한 감상과 그와 어울려 보이는 막연한 이미지만을 아주 잠시 불러일으킬 수 있을 뿐입니다. 철학자 후설이나 유교의 공자도 말의 쓰임새를 경계하고 말이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우리는 흔히 이해나 배려 또는 사랑 같은 단어를 주로 "~ 해야 한다"는 능동태로 쓰면서 속내로는 "~ 한 대접을 받고 싶다"는 수동태로 쓰곤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배려를 받고 이해를 받고 싶은 자기 마음을 에둘러 가리키고자 하면서 말입니다. 이때 이 단어들이 구체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처한, 절박하게 빠져나오고 피하고 싶은 열악한 상황뿐입니다.
저는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몹시 어지러울 때면 마음의 카오스(chaos) 상태, 즉 어떤 이유로 마음이 혼란스럽고 무질서해진 상태를 억지로 거스르려 하지 않고서 그 상태에 온전히 저를 맡기곤 합니다. 물론 그 혼돈과 무질서함을 오롯이 견디면서 말이지요. 그건 마치 심하게 정신과 마음을 구속당하는, 예를 들자면 그저 공부하라는 소리에 치여서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한껏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는 청소년들의 마음과도 닮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무질서는 더 나은 질서(에토스: ethos)의 상태로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만 하는 일시적인 상태 또는 과정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카오스, 즉 혼돈의 상태는 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들거나 아예 불가능한 느낌들이 마치 추상화 속 색채들의 어울림과 충돌 그리고 긴장 관계 속에서 희미하게 어떤 가닥을 드러내듯이 잠깐 함께 어우러지다가 바로 흩어지고 도드라졌다가 물러남을 반복하는데 막연한 추측이긴 하지만 저는 카오스의 그런 성질이 언어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정지되어 있지 않거니와 긴장을 앓지 않은 에토스의 상태, 다시 말해서 언제나 더 나은 가능성의 씨앗을 제 안에 품고 있으면서 그 씨앗을 처한 현실 속에서 계속 키우면서 현실과 긴장된 변증법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에토스로 가려고 마음이 애쓰는 모습을 느낌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를 언어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당혹 또는 당황스러움, 실망 또는 절망, 배신감이나 위태로운 의혹, 그만 놓아버리고 싶지만 좀처럼 놓이지 않는 상태, 눈을 질끈 감고 적응해 보려 애쓰지만 도무지 잘 적응하려 하지 않는 마음 등이 마치 순서를 무시한 수학의 조합 개념처럼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이유는 포기하려야 포기할 수 없고 그래서 놓아버리려고 해도 놓을 수 없는 삶에 대한 희망, 다시 말해서 "나 잘 살아 내고 싶어. 이왕이면 거창할 것 없거나 때로는, 그러니까 아주 드물게라도 가끔은 우연처럼 또는 기적처럼 찾아올지도 모르는 행복을 느끼면서 말이야"같은 여린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