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중학생일 때 밤에 제 방에서 FM 라디오를 틀어놓고서 공부를 하곤 했는데 개인적으로 그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올리비아 뉴튼 존의 노래를 많이 좋아했습니다. 그녀는 그런 큰 인기 때문에 영화에 주연으로 나오기도 했는데 70년대 중후반에 디스코 열풍을 불러왔던 존 트라볼타와 함께 찍은 그리스라는 영화에도 주연으로 나왔습니다. 그녀는 시골에서 도회지 학교로 전학한 학생으로 분해서 나오는데 영화에서 존 트라볼타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의 사랑은 일방적이어서 그녀의 속을 태웁니다. 그런 그녀가 밤에 잠옷을 입고 혼자 짝사랑 때문에 괴로운 심정을 밝히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 제목은 "hopelessly devoted to you입니다. 오래전 영화 삽입곡이어서 대부분의 노랫말은 잊어버렸지만 유독 아직까지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노랫말은 "My head is saying, forget him My heart is saying, don't let go"인데 이를 번역해 보면 "내 머리는 그를 잊으라고 말하지만 내 가슴은 그를 가게 내 버려두지 말라고 말해"입니다. 제가 그런 케케묵은 기억을 떠올린 이유는 노랫 속 그 표현이 요즘에도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예전과 비교하면 더 심각해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입니다.
제가 운영하는 심리상담 센터의 이름은 프시케(psyche)인데 이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리말로는 흔히 "마음"이라고 번역됩니다. 그런데 제가 심리상담센터의 적당한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알게 된 사실은 라틴어인 프시케처럼 우리말 "마음"도 원래는 머리와 가슴을 함께 아우르며 떼려야 뗄 수 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기능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잠시 생각해 보면 자명한 사실로 우리가 어떤 생각, 예를 들어 고민거리나 갈등을 풀기 위해 생각을 하면 마음의 색깔과 밝고 어두움의 결들이 그에 따라 때론 복잡하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가까운 친구와 사소한 말다툼을 해서 속상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이 오해를 했거나 말실수를 한 사실이 자각되면 속상하고 화난 마음이 계면쩍고 당황스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친구가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생긴 화는 조금 수그러들긴 했어도 여전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마음이 좀 복잡할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superego)라는 개념으로, 라캉은 소타자(small other)라는 개념으로 은연중에 사람의 정신으로 틈입해서 내면화된 외부의 폭력적인 가치나 윤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내면화된 가치나 윤리는 " 왜" 그것이 옳은지 또는 "어떻게" 그것이 실천 가능한 지에 대해 침묵합니다. 다만 현란하고 우아해 보이는 명사나 수식어로 자기를 포장해서 멋지게 보이게 할 뿐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문제에 봉착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할 때 이 내면화된 폭력적인 윤리가 개입하게 되면 정신과 마음의 상호작용은 때로는 심하게 방해받거나 그 연결고리가 끊어질 것 같이 위태로운 상태가 되거나 심지어 그 연결통로가 거의 막혀 버릴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내면화된 가치나 윤리가 멋져 보이더라도 그것이 왜 옳은지 또는 어떻게 가능한지를 정신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마음이 그에 공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외부의 비난과 조롱이나 은밀한 협박으로 은연중에 강제된 또는 현란한 언어나 이미지로 치장하여 사람의 정신을 현혹해서 내면에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왜? 와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서 침묵하는 외부의, 즉 타자의 가치나 윤리에 대해 마음이 반발하게 될 수 있는데 이 경우에 사람들은 그럴듯하게 치장된 타자의 가치나 윤리의 성질 때문에 이를 "합리적" 또는 "이성적"이라고 여기면서 그에 반발하는 마음을 "비합리적"이라고 치부해 버리곤 합니다.
위에 언급한 갈등, 즉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까를 머리로 생각하면서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아유를 따지지 않고 또는 아유나 가능성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내면화된 타자의 판단이나 윤리가 개입할 때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마치 성난 듯이 엄청난 크기와 세기의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와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지 않은 겁을 집어 먹으면서 때론 간절하게 자신의 고통을 해소해 줄 외부의 도움을 방황하며 찾기도 하는데 이때 중요한 점은 폭풍우처럼 광란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이고 따라서 그 마음을 궁극적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인간은 타자와 구별된다는 의미에서의 독자적 개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하나의 종(種)으로서 공통된 인간적 성질들도 공유하기 때문에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언어적 비언어적 소통을 통해 말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말속에 담겨 있는 마음을 전달하거나 수용할 수 있어서 타인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이상하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점은 혼자 고민하거나 그 고민을 남에게 털어놓으면서 도움을 청할 때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생각이나 타인이 제시하는 도움의 내용을 어떻게 여기는지, 즉 자율적 반응으로서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비합리적이라고 무시하고 홀대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잘 보듬으면서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