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 이상한 걸까? (2)

by 조태진

최근에 재방송으로 다사 본 어느 교양 프로그램에서는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였던 이퇴계와 젊고 그다지 높지 않은 관직을 가지고 있던 기대승이 몇 년간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벌인 사단칠정론 (四端七情論)쟁이 소개되었습니다.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졸지 않고 수업을 들었거나 "다음 중 사단칠정론의 사단(四端)에 속하는 것이 아닌 것은?" 이라는 시험 문제를 틀린 분은 이 사단칠정론이라는 개념에 익숙할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짤막하게 사단칠정론에 대한 설명을 드리자면 사단(四端)은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겸손하게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마음(사양지심)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시비지심)으로 이 네 가지는 유교의 중요 덕목인 인, 의, 예, 지에 상응합니다. 반면 칠정(七情)이란 기쁨(喜)ㆍ노여움(怒)ㆍ슬픔(哀)ㆍ즐거움(樂)ㆍ사랑(愛)ㆍ미움(惡)ㆍ욕심(欲)) 같은 감정을 가리키는데 이퇴계는 사단으로 칠정을 통제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그 유명한 이기 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퇴계의 이런 주장을 접한 젊은 학자 기대승은 이퇴계에게 서한을 보내 사단과 칠정이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마음이 아우르고 있는 같은 차원의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그리고 아를 계기로 몇 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며 긴 논쟁이 시작됩니다.


제가 아주 오래전 유교가 지배하고 있던 조선시대의 두 지식인들의 논쟁을 언급한 이유는 그들이 벌인 논쟁이 현재에도 표현이나 단어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져 보다가 사단은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속하고 칠정은 형이하학에 속한다는 글귀를 발견했는데 이 표현을 접하고서 저는 서양의 성( 聖)과 속(俗) 구분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합리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성과 비합리적이라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수식어가 붙는 마음 사이의 관계, 때론 사회적으로 공유된 적대적인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생각이야 머리를 써서 하는 것이니 통제나 조절이 가능해 보이지만 그와 달리 마음은 머리를 써서 통제하거나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런 성질의 마음의 자율적인 반응에 대해 적지 않은 두려움과 함께 심하면 자기 마음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지요. 정이지만 그런데 만약 칠정이 없다면 사단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를테면 동생과 같이 나누어 먹으라고 엄마가 준 간식을 혼자 다 먹고 싶은 마음(욕심)이 없다면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사양지심)과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고 하는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분별을 가능케 하는 마음(시비지심)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조금 더 나아가자면 사회적으로 부당하게 취급을 받는, 이를테면 선배에게 돈을 뜯기거나 심심풀이 땅콩(?) 취급을 받으면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집단폭행을 당하는 친구를 봤을 때 비록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지만 그 선배나 집단폭행을 가하는 친구들 때문에 생기는 화, 즉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타인과 자신에 대한 측은지심은 또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황당한 얘기지만 분노나 슬픔 그리고 무엇을 얻기를 또는 이루기를 원한다는 의미에서의 욕심(욕구)을 제대로 통제하고 바꿀 수 있다면 인간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제 생각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미쳐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비지심이라는 측면을 확장시켜 생각해 볼 때 정말로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아니 더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지 느끼고 알 수 없어서 결국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두려운 질문 앞에 서게 되고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분명히 자신의 얼굴이 맞지만 심하면 거울 속의 내가 낯설어지면서 "쟤 누구야?" 하는 심각한 이인증(離人症: depersonalization)으로 악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글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생명체의 기본 조건은 자연이 선물한 거부할 수 없는 선천적인 욕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자연이 부여한 성질과 속성에 따라 욕구의 충족을 바랄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철학의 한 갈래인 목적론(teleology)에서는 세상의 모든 생명체에게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듯 인간에게도 거부할 재간이 없는 선천적인 욕구들이 존재하는데 욕구 위계설을 주장한 심리학자 마슬로우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먹고 마실 것, 추위나 외부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 또는 쉬거나 잠잘 수 있는 거처 같은 것에 대한 생리적 욕구 외에 심리적 또는 정신적 욕구, 즉 소속감을 느끼고 싶고 보호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고 자신의 선천적인 재능과 소질을 키워서 실현시키고 싶은 욕구 등아 존재한다고 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저마다 타고난 능력과 관심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속한 사회가 그런 타고난 소질과 재능을 얼마나 인정해 주는가, 그리고 그 타고난 재능을 건강하게 실현시킬 수 있는 제반 조건들을 그 사회가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현재 한국사회는 아이들의 선천적인 관심과 타고난 재능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분위기이긴커녕 심하게 방해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하루애 최소한 14 시간 동안 공부하지 않으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 같은 섬뜩한(?) 괴소문 같은 표현 말이지요. 일시적으로라도 불면증에 걸려 보신 분들은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는 게 얼마나 사람 신경을 예민하게 하면서 녹초로 만드는지 잘 아실 테고 칼퇴근은커녕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분들은 사람의 삶에서 휴식이 얼마나 절실한 욕구인지 긴 말을 드리지 않아도 절감하실 텐데 요즘 어린 학생들은 조금 과장하자면 별로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흘러가 버린 오래 된 어느 대중가요 속 노랫말처럼 "공포에 자고 공포에 눈 뜨면서" 하루하루를 신경이 곤두선 채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서 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때 자연스럽게 사람 마음에 간절하게 찾아오는 욕구는 "좀 쉬고 싶다"일 텐데 이때 중요한 점은 쉬면서 하는 활동이나 또는 쉬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외부 환경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입니다.


보지는 못했고 소개 영상만을 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요즘 국제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는 향수를 자극할만한 예전 구닥다리 놀이들이 등장하는 모양이던데 그런 향수를 짙게 느끼시는 분들 중에는 요즘 아이들이 좀처럼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게임을 하거나 SNS로 문자를 주고받거나 유튜브 등으로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듣는 걸

좀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놀고 싶고 쉬고 싶은 마음은 같을지라도 놀이의 여건이나 도구는 그 당시 사회가 창출한 놀이 조건과 따로 떨어뜨려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더 재미있는 놀이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데 이를테면 다방구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놀이에 익숙했던 저도 대학생일 때 갑작스레 등장한, 뿅뿅 게임이라고도 불렸던 컴퓨터 게임방의 놀이기구나 초창기 예약을 해야 간신히 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노래방 같은 곳에서의 놀이는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놀이 수단이자 피곤하고 지친 신경을 달래는 휴식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제는 예전에 그토록 신기하고 혁신적이었던 놀이 수단들도 추억 속 한 장면이 되었거나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놀이 수단이 되어버렸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놀이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달리 말해서 우린 왜 놀고 싶어지는 것일까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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