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에서 저는 사람은 왜 놀고 싶어지는 것 알까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 질문은 아이들은 어째서 그 지겹고 스트레스 쌓이는 공부를 하는 걸까?라는 질문과 비교해 보면 뒷 질문에는 어렵지 않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을 얻을 목적으로"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앞의 질문에는 어떤 목적을 위해 고통이나 어려움을 감수한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주로 그동안 쌓인, 즉 지겹고 단조로운 업무나 별 설명도 없이 윽박지르듯 업무지시를 하는 상사 또는 근거도 없이 자신에 대해서 숙덕대는 동료 때문에 쌓인, 그와 비슷하게 끝도 없는 비교를 하면서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제대로 된 답을 주지도 않고서 역시 윽박지르듯이 성적을 올리라고 강요하는 선생님과 엄마의 만성적인 채근과 마치 전제군주처럼 군림하는 한 반의 짱인 친구와 그 아이를 추종하는 다른 친구들의 눈 밖에 벗어나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느라 쌓인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흔한 표현으로 심심하거나 무료할 때도 놀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곤 합니다. 즉 라캉의 주이상스 (jouissance) 개념을 사용하면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이라는 주이상스를 위해 고통과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함입니다. 오래전 구입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는 책에서는 놀이와 일을 구분하는 척도를 언급했는데 제 생각으로는 놀이도 어느 정도 하다 보면 싫증이 나거나 피곤해져서 그만두게 되는데 일(work)과 놀이(play)를 구분하는 중요한 척도는 우선 스트레스 풀기용이나 심심함을 달래려고 하는 일인지 아니면 일정한 물질적인 보상을 받고자 외부에서 정해 놓은 업무시간이나 마감시간까지 해야 하는 일인지 여부일 것입니다.
그런데 "님도 보고 뽕도 딴다'는 속담처럼 비록 외부에서 강제로 정해 놓은 시간 동안 하는 일일지라도 자기 적성과 능력에 맞아서 관심을 끄는 알이라면 놀이와 일의 경계가 좀 모호해집니다. 흔한 말로 "즐기면서 하는 일(work)"이라면 말이지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노동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일(work)은 경제적 어려움, 그것도 형편이 언제쯤에나 필 수 있는지도 모르는 막막한 경제적 어려움을 각오하지 않고서 자기 적성에도 맞고 잘할 수 있는 일(노동)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순전히 상상이지만 그래서 관심도 있고 적성에도 잘 맞아서 하는 일(work)을 적당한 보수를 벋으면서, 그래서 자신과 가족의 생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때 놀이는 적성에 맞는 일에 몰입해서 기분 좋게 긴장된 몸과 정신의 긴장을 풀어주고 동시에 다음 날의 노동을 위한 재충전을 하도록 해 주는 "편안한" 놀이, 그러니까 쌓인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한 기분 더러운 일들을 어떻게든 의식에서 몰아내려고 악을 써 가며 하는 놀이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즐기는" 성질의 건강한 놀이가 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요즘 아이들은 신체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욕구에 바탕을 두고 있긴 하지만 기분 좋게 마무리한, 즉 최종적인 완성이 아니라 "오늘의 할 일"처럼 마무리한 일(work)로 인한 긴장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들여야 할 시간이 너무도 엄청나게 길고 그 일이 요구하는 수준도 너무 엄청나서 끝이 보이지 않아 딱히 풀 길이 없고 짜증과 분노와 실망과 절망 그리고 줄어들지 않는 불안을 애써 잊으려고 컴퓨터 게임이나 SNS 또는 유튜브의 동영상 등에 몰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학원을 뺑뺑이 돌다가 시간에 쫓기면서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저녁식사를 때울 때 잠깐 짬을 내어서 말이지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제멋대로 바꿀 수 있지도 않지만 몹시 속상하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자꾸만 반복되다 보면, 그것도 그렇게 힘들어진 마음에게 좀 회복될 시간도 여건도 허락되지 않고 게다가 마땅한 해결책이나 마음이 좀 안정될 통로조차 없는 경우라면 마음속에서는 짜증이 일어나서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를 풀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이때 자기에게 이런 끔찍한 고통을 준 또는 주었다고 믿는 대상에게 화를 내면서 따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건 자기에 대해 뒤에서 수군거리며 험담하는 친구나 동료에게 화가 나서 "너는 무슨 근거로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에 나에 대해 말도 안 되는 험담을 퍼뜨리는 거니?" 하며 따지고 싶은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힘들게 해서 스트레스를 유발한 상대가 엄청난 존재, 이를테면 같은 반의 실세인 짱이나 그를 추종하는 다른 친구들이거나 또는 공고한 성채처럼 꿈쩍도 않는 법과 제도 또는 기성의 질서처럼 여겨지는 관행이나 관습이라면 한 개인은 비록 마음속으로는 이를 갈더라도 그에 맞설 엄두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비뚤어졌다"라고 말하는데 이 경우 "어른들이 미리 정해 놓은 정도(正道)를 벗어났다"는 자의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이기도 하지만 만성적인 스트레스, 즉 자존감을 유지하고 지켜줄 수 있는 자기 생각과 감정과 욕구의 표현이 방해받거나 아예 봉쇄되어서 그렇게 오랫동안 좌절된 욕구로 인해 화는 나는데 그 화를 제대로 풀 길이 없기 때문에 희생양, 다시 말해서 자기의 쌓인 스트레스를 풀 만만한 상대를 찾게 되는 경우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산도 만만한 상대를 찾아서 쌓인 화를 푸는 것이 치사하고 졸렬한 일인 줄 알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온갖 합리화, 즉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의 졸렬하고 치사한 짓거리를 합리화시켜 가면서 만만한 희생양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반대로 충동적으로 만만한 상대에게 화풀이를 해 놓고 그로 인해 불편해진 마음을 달래느라(?) 억지를 써 가면서 합리화의 근거를 찾기도 하는데 이때 자신을 책망하며 자신 탓을 하는 게 아니라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 사실을 은폐하려고 머리를 굴려서 허구적인 알리바이를 만들듯이 자신의 쌓인 스트레스를 풀 목적으로 해코지를 하거나 몹시 괴롭힌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그가 그만한 일을 당해도 싼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쌓인 스트레스를 안전하게(?) 풀기 위해서 만만한 상대를 골라 해코지하거나 괴롭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그에 대한 합리화를, 즉 온갖 변명거리를 애써 찾는 것일까요? 그 사실은 역설적으로 선천적인, 즉 아무리 외부에서 바꾸려고 하거나 조작하려 들어도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난 씨앗의 형태, 즉 원형적 성질의 양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증명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굳이 "원형적인" 양심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비유하자면 뼈대는 갖추고 있어서 무슨 모양이 될지 짐작할 순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이 될지는 잘 모르는 인형의 뼈대와도 같이 타고난 양심은 방향성은 가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경험의 결핍이나 부족으로 인해서 내용적인 측면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얘기가 깊이 삼천포로 빠지는 느낌이지만 그에 대한 설명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굳이 더 이어 말하자면 설사 커 가면서 이런저런 경험들을 쌓아서 양심의 내용이 이전보다는 풍부해지고 세련되었다고 하더라도 양심은 나침반의 바늘처럼 여전히 방향을, 때로는 불안하게 흔들리면서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기능하는데 이 현상을 흔한 표현으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가슴이 뜨끔뜨끔하다"는 신체적 반응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심의 가리킴을 계속 무시하거나 심지어 계속 억압한다면 우리 내면은 그에 대해 반발하면서 우리에게 절박한 신호를 보내는데 그건 불안, 초조, 자신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느낌으론 알 것 같은데 머리로는 이해하기, 아니 납득하기 힘든 또는 인정하기 싫은 분노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생기고 마는 불면증 등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몹시 당황하게 되고 두렵기도 해서 "내가 왜 이러지?", 또는 "내 마음이 왜 이러지?" 하며 그 원인을 찾으려고 애쓰는데 이때 악순환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내면이 우리가 머리를 짜서 간신히 만들어낸 허구적인 온갖 합리화를 당연히 꿰뚫어 보고 자신의 진짜 의도나 생각을 의식계로 돌려보내면서 솔직한 인정과 내적인 자백을 받아내려고 하는데 그 내적인 신호(경고)를 자꾸 무시하면서 자신이 불안한 진짜 이유를찾겠다는 건 마치 자기를 완벽하게 속여서 마음을 편하게 만들겠다는 말도 안 되는 헛된 짓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