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저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에 대해 짧게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심리상담센터 등에서 그 구분을 위해 정형화되고 표준화된 설문지를 사용한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독일에서 심리검사와 관련된 강의의 마지막 시간에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를 어떤 설문 문항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언급한 이유는 우라가 일상에서 선입견이나 편견에 의해서든 아니든 "직관적으로" 어떤 사람(의 특성)을 구별하고 판단할 수는 있지만 객관적인 지표들을 사용해서 수량화하기는 녹록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테면 정상과 비정상, 또는 특정한 심리적 질환을 가졌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표준화된 관련 설문지를 사용할 때 우선 설문들에 답변하는 사람의 성실함과 끈기가 필요하겠지만 그와 함께 어떤 특정하고 구체적인 경우가 아니라 뭉뚱그려진 일반적인 상황을 묻는 설문, 예를 들어서 "지난 2 주간에 우울하거나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했는가?"라던가 "당신은 얼마나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거나 당신 자신과 가족을 실망시켰다고 생각하는가?" 등의 설문 문항에 대한 답변자의 문자 해독능력뿐 아니라 그 질문이 불러일으키는 일반화하기 곤란한 특정하고 개인적인 경험들의 영향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전혀 아니다"부터 "매우 그렇다"로 평가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준거, 즉 비교의 대상이 필요한데 도대체 "얼마나 자주 우울하거나 희망이 없다고 느꼈는지"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수량화된 수치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어느 심리상담 밴드애 올라온 어린 중학생의 고민 글에는 "다른 아이들은 학원을 뺑뺑이 돌면서 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해도 다들 별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저는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은 마음이 자주 들기도 해요"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만약 이 학생이 설문지의 설문에 답한다면 "자주 우울하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에 동그라미를 치겠지만 이때 비교를 통한 "자주"라는 것이 과연 객관적일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자주"라는 표현은 반드시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비교 대상이 되는 다른 일반 사람들이나 준거집단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의 내밀한 마음속을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며 설사 그게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자신의 마음 상태를 타인의 마음 상태에 견주어 어떻게 양적으로 비교 가능한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자연과학에 속하는 의학의 특성상 정신질환을 주로 내인적(內因的) 또는 기질적(氣質的)으로 설명하는데 이에 전적으로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심리학을 공부한 저로서는 그와 함께 환경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는, 때로는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오랫동안 노출된 열악한 환경을 살펴보면 전문가처럼 세부적인 정신질환의 명칭을 붙이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일일이 말로 다 표현은 못하더라도 한숨을 내쉬면서 느낌을 통해 그 딱한 사정을 마음으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경우를 상상해 보거나 과거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연속극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주인공이 당하는 모질고 억울한 일들을 보면서 한숨도 나오고 분해서 화도 나고 안타까워지기도 하듯이 말이지요.
앞서 설문지 문항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비교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설문 문항에 답하는 사람은 "예전보다" 또는 기간을 특정해서 "지난 한 달 동안"이라는 설문 문항을 접하면 기억을 더듬어서 "예전" 또는 "한 달 전의 시간"동안 자신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볼 텐데 잠시 기억에 대한 심리학 이론 하나를 소개해서 이 경우에 적용해 보자면 기억되는 내용은 "주관적으로" 자신에게 익숙하거나 의미 있는 것 또는 사건의 과정적 맥락을 통한 "의미적 기억"을 통해 주로 형성되고 저장된다고 합니다. 이를 설문지 문항에 답변하는 사람의 경우에 적용해 보면 그는 관련 설문 문항의 특정한 표현이 연상시키는, 즉 주관적으로 불러일으켜지는 관련 기억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를 거칠게 설명하자면 주관적 의미, 즉 기쁘다던가 슬프다던가 우울하다던가 화가 난다던가 하는 정서 또는 간절히 충족을 원하는 욕구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거나 시간 근접성, 다시 말해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시간에 경험한 강력한 외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주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의 자신과 비교해서 요즘 또는 현재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어떤 특이하고 강렬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외적 사건, 즉 일회성이더라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환경의 변화나 사건의 영향을 받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심각한 문제나 갈등 또는 두려움과 공포가 제대로 해소되거나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 사건은 마치 마법의 주술과도 같이 그의 마음에 똬리를 틀고서 고전음악의 주요 모티브처럼 그의 삶 전반에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의식적으로 깨닫거나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그래서 설문 문항에 답하는 사람은 이 강렬하고 불쾌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특정 사건과 관련된 관념(예를 들어 어째서 나한테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무엇이 원인일까? 하며 그 사건이나 상황과 관련된 맥락, 그것도 파편화된 기억들을 꿰매는 것 같은 성격의 맥락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 같은)이나 인상(파편화된 이미지들)을 바탕으로 답변하거나 정확한 인과관계를 찾지 못하거나 떠오른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원인과 결과의 인과성을 이어주는 관계적 맥락을 인정하기 싫어서 답답하거나 불안한 마음 때문에 억지 춘향 식의 왜곡된 원인 아닌 원인을 스스로에게 사살상 강요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우울증에 빠지는 중요한 이유는, 심리학적 용어를 사용하면 잘못된 "내부 귀인(歸因)", 즉 관련 맥락과는 무관하게 또는 그와 모순되게 "자기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거나 "모두 내가 잘못해서" 등으로 이유를 대며 스스로에게 그 황당하기도 한 이유를 사실상 강요하는 것입니다.
쓰다 보니 얘기가 좀 복잡해진 느낌인데 정리하자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낙인이 찍힌 감정이나 열악한 환경적 조건이나 상황 때문에 번번이 좌절되어 실현되지 못한 욕구로 강렬하게 충전된 기억은 그 전의 자신과 비교할 때 왜곡된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수량적인 지표로 표현하려 할 때 그 사건이 맥락을 통해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또는 해결되지 않아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주목을 계속 받아왔고 여전히 받기 때문에 남들의 눈에는 한낱 일회성 사건으로 보여도 당사자에겐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해결 또는 해소되고자 하는 욕구를 밑바탕으로 한 연속적인 내적 경험이어서 심리상담가조차도 내담자로부터 그와 관련된 내밀한 이야기를 꽤나 상세히 듣지 못한다면 설문 문항의 답변만으로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변 사람들은 "고작 그런 일회성 일로 오랫동안 또는 아직도 우울해하고 몹시 불안해하다니 정신이 좀 어떻게 된 사람인가 봐" 할 수 있지만 당사자는 남들이 알지 못하거나 주목하지 않는 비슷비슷한 성격의 부정적인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동시에 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온 산경이 그 문제로 쏠려서 예민해지고 따라서 비슷한 성격의 조그만 자극이 주어져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우울증 같은 심리적 질환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부에서 그를 판단하는 사람, 이를테면 심리상담가나 정신과 의사는 그 우울증의 원인을 그의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 탓으로 돌려 버리는 과오를 저지를 위험도 존재합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어릴 때부터 관련 상황이나 맥락을 잘 고려하지 않고서, 게다가 아이의 정직한 감정과 욕구는 무시해 버린 채 부모 말 안 듣는다고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훈계와 지시를 강요당하고 "문득 스스로 과거에 저지른 실수나 잘못을 되돌아보면서 후회도 하고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한다"는 본래 뜻과는 많이 다른, 물론 어떤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경우일 수도 있겠지만 부모에게 부모와 다른 주장을 하거나 다른 욕구를 밝혀서 부모의 화나 짜증을 돋웠다는 이유로 무조건 두 손을 들고 30분 동안 "반성하기"를 강요당한 씁쓸하고 언짢은 경험을 자주 했고 그 기억이 마음속에 켜켜이 짙고 어두운 그림자로 남은 사람은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세뇌된 개인적이자 관습적인 도식(schema) 때문에 습관이 아니라 판에 박은 세뇌된 도식에 따라서 문제의 원인을, 그것도 일차적 원인을 자신에게 돌려버리는 왜곡된 "책임 돌리기", 또는 "탓하기"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