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질문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가가 아닌 일반인은 어떤 사람을 보고서 그가 우울증에 걸린 게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같다, 다르다는 판단 범주를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그러려면 우선 판단하는 사람의 머릿속에 우울증과 관련된 같다, 다르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범주적 판단은 선천적인 성질과 함께 후천적, 즉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학습(경험)을 통해 획득되는 성질의 것도 포함됩니다. 이를테면 만성적인 우울증으로 몹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자해를 한다면 자해라는 행동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이 필요하겠지만 자살충동이 인간에게 고유한 성질인 것처럼 자해 행위도 전문가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이상 행동"임을 선천적인 직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원용해서 말씀드리자면 우울증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행동이나 반응, 이를테면 우울한 경험으로 인한 심한 장기적 불면증, 특별한 원인이 없어 보이거나 사소해 보이는 일로 심한 불안이나 초조함을 자속적으로 느끼는 것,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자극에 심한 불안을 느끼면서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거나 혐오하면서 스스로를 아무런 가치도 쓸모도 없는 인간으로 여기고 삶에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여겨서 심한 무기력 상태와 끔찍한 절망에 빠지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예들을 읽으시면 어떤 분은 "마치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아" 하시면서 "혹시 내가 우울증에 걸려 있는 것은 아날까?" 하며 불안해지실 수도 있는데 위에 든 예들은 원형적, 즉 아직 경험에 의해서 세밀해지고 다듬어지지 않은 선천적 내용을 담은 판단능력과 함께 이를 바탕으로 한 일상의 삶 속에서의 경험을 통한 직관에 의존해 있습니다.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에 따르면 직관은 선척적인 능력으로서 지능, 즉 학습이나 경험을 통해 점점 더 그 개연성과 사실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지능의 능력을 통해서 보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리와는 사뭇 다르게 우울하다고 느끼게 되면 또는 자해행동이나 삶을 완전히 포기한 듯이 자신의 삶에 대해 완전히 절망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게 되면 그를 우울증에 걸린 사람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교적 명백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의 직관은 때론 주로 무의식적으로 우리 머리와 마음속으로 침투한 편협 하거나 드라마틱한 허구적인 내용, 즉 이미지 조작이나 교묘한 짜깁기를 통한 왜곡되고 편파적인 내용(드라마, 영화, 대중가요 속의 내용처럼) 때문에 경솔하고 편협한 그리고 때론 허구적인 성질을 띨 수 있습니다. 저는 앞서 선입견과도 비슷한 낙인 효과를 언급했었는데 정산과 의사나 심리상담가가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심리질환을 진단하지만 그들도 이런 현상을 완전히 비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정신과에서는 약물치료와 함께 심리상담을 진행하는데 그가 어떤 심리 상담 기법을 사용하는가는 그가 배운 심리 상담 기법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과 삶에 대한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현재 대세를 이루고 유행하는 상담치료 기법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60년대 행동주의에 젖줄을 대고 있는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 behavioral therapy)는 "인간의 인지적 내용, 즉 생각이 바뀌면 그에 따라 행동도 바뀐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는 흔히 쓰는 표현으로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제도에 대한 아이디어나 제안도 인간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표현과 똑같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행동치료는 우울증 같은 심리질환이 "잘못된 신념" 즉 불합리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고 따라서 이를 "인지적"으로 교정하면, 즉 바로잡으면 이제까지의 우울증으로 인한 "이상행동"도 교정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심리치료 기법을 우울증에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자면 만성적인 우울증으로 인한 자해 행동에 대해 "자해 행동을 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자해 행위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고 단지 손목에 상처만 깊이 남아서 그 우울한 기억만 떠오르게 하니 자기만 손해다. 따라서 닥친 문제를 회피하려 들지 말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력 없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는 "부정적인 생각을 자꾸 하면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되니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라. 왜냐하면 긍정적인 생각은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행동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겉은 말로 잘못된 신념을 바로 잡아서 자해 행동 같은 "잘못된 행동"을 교정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드리기 위해서 다시 조금 삼천포로 빠지자면 제 눈에는 인지행동치료 기법이 이른바 "합리주의", 그것도 근대에 들어서 형성되고 강화되고 고착된 합리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근대의 합리주의는 이제까지 존속되어서 사람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왔던 미신, 공상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잘못된 신념"을 합리적이고 냉철한 이성으로 혁파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를 철학적 용어를 써서 표현하자면 미신과도 같은 "주술적 사고방식"을 합리주의를 통해서 제거하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인간의 지능으로는 설명하거나 파악하기 힘든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신비함, 그러니까 어떤 깨달음과도 같은, 직관을 바탕으로 한 통찰이라는 신비한 인간적 현상이나 무언가를 암시하듯이 어떤 특정한 패턴으로 느껴지는 수면 시의 꿈 그리고 안타깝다, 괴롭다, 슬프다, 억울하다 등의 감정과 유기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선천적인 양심 같은 신비로운 인간적 현상들을 싸잡아서 비합리적이란 낙인을 찍고 오로지 냉철한 이성에만 바탕을 두고 있다고 믿는 것에만 "합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그것에서 제외되는 "불합리한" 생각과 행동을 냉철한 합리주의로 바로잡아야 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표명한 태도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스승인 프로이트를 가리켜서 "그는 이전까지 고수되었던,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다라는 전제를 깨고 활활 타오르는 화산의 용암 분화구로 우리를 이끌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한번 이런 상상을 해 보시지요. 원시시대 한 부족의 남성들이 다른 부족을 공격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아녀자들을 강간하고 노예로 삼은 것, 로마시대에 다른 종족을 침략해서 그들을 노예로 삼았던 것이나 요즘으로 치면 일요일 낮에 심심풀이 땅콩 식으로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보는 티브이 오락 프로그램처럼 로마의 시민들이 원형 경기장에 모여서 노예 검투사들이 선택의 여지도 없이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해야 했던 검투를 재미 삼아 보다가 한 검투사가 다른 검투사를 제압하고 나서 로마 시민들에게 그를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를 물으면 다들 또는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이 엄지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게 하면서 그를 죽이라고 했고 그와 비슷하게 소나 돼지를 부위별로 등급을 나누듯이 사람들을 피부색이나 혈통에 따라 나누어서 차별하고 착취하고 억압했던 과거의 인간 현상이 옷만 바꿔 입은 듯이 현재 진행형으로 되풀이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죄 없는 흑인을 꼬투리 잡아서 그의 목을 강하게 눌러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거나 오래전에 철폐된 신분질서가 재산과 사회적 지위에 따른 권력에 의해 부활해서 사람들이 이른바 슈퍼 갑, 중간 갑 그리고 을 등의 사회적 신분으로 나뉘어서 예를 들면 어떤 못된 아파트 주민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저항할 수 없는 나이 많은 아파트 경비원에게 곰팡이 핀 빵을 던져주며 먹으라고 했다던가 교수 자리를 얻으려고 이 악 물고 충성을 바쳤던 지도 교수가 조교에게 자신의 인분, 즉 똥을 먹으라고 강요했다는 뉴스 내용을 기억해 볼 때 과연 인간이 사회적으로 통용되어 무심코 쓰이는 의미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는 말이 실감 나시나요? 또는 그들이 초등학교 도덕 시간이나 중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딴짓을 하거나 조느라고 미처 "합리적인" 윤리적 가르침을 교육받지 못해서 그런 "비합리적인" 행동을 저지른 것일까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