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저는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합리적"이라는 개념부터 정의를 내려야 하는데 이 한자어를 풀어 뜻을 설명하자면 "이치에 부합되는" 또는 "이치에 맞는"입니다. 이 한자어는 이미 꽤나 오래전에 노년에 접어든 노인, 특히 할머니들이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입에 올리곤 하는 표현인 "그냥 거스르려고 하지 말고 물 흐르듯이 살아야 한다"는 표현 속에 숨어 있는 "순리(順理)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개념 모두 "이치(理致)라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치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위에 인용한 나이 많은 할머니들의 표현을 빌자면 이치란 "거스를 수 없는 법칙 내지 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뜻풀이를 잘못 해석하면 자칫 정해진 운명론이나 숙명론으로 빠져서 "내가 애쓰고 노력해 봤자 그게 운명이니 어쩔 수 없고 비껴갈 수도 없다"는 짙은 낙담과 체념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왜 미래를 바라보면서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려는 성향이 있는 걸까?라는 점과 함께 인간은 왜 자신의 당면한 어떤 문제를 해결해 보기 위해서 앞에 놓인 선택지들 중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한 가지를 "선택"하려는 성향이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법칙이나 원리라는 단어 앞에 "자연의"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 이 표현은 어떤 느낌을 풍길까요? 아마 어떤 분들은 "자연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나 원리"라는 뜻을 품고 있는 섭리(攝理)라는 단어를 떠올리실지도 모르는데 순리나 섭리라는 개념은 케케묵고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유교적 교리들을 연상시켜서 그다지 과학적인 개념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이 추상적이고 고리타분한 느낌을 풍기는 개념들을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적용해 보면 "거스르려야 거스를 수 없는 인간의 선천적 측면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 신체와 정신 및 심리적 현상들, 이를테면 수면이나 휴식애 대한 욕구나 식욕 같은 생리적 욕구와 함께 놀고 싶은 욕구, (동의하지 않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노동(일)하고 싶은 욕구, 내 타고난 개인적 취향과 관심과 능력을 실현시키고 싶은 욕구 등과 함께 인간이 제멋대로 조작하거나 바꿀 수 없는 반응으로서의 감정적 표현인 슬픔, 기쁨, 즐거움, 우울, 분노, 실망 등을 거스를 수 없는 순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위험한 것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내 마음이 그런데 나 보고 어쩌라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 그러니 그건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같은 황당한 자기 합리화를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 옆길로 새어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인간이 사고할 때 기억이나 상상을 통해서 어떤 사고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표상(image)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는데 추상적인 개념일수록 그와 관련된 현실 속 이미지들이 잘 불러일으켜지지 않거나 심지어 어릴 때 먹었던 공갈빵처럼 그 속이 비어서 관련된 이미지가 거의 떠오르지 않을 수 있고 낡고 고장 난 티브이의 화면처럼 흐릿하고 막연한 어떤 느낌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때로는 그 느낌이 요사스러운 무당의 옷 색깔들의 조합처럼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어두운 다락방에서 귀퉁이가 찢어지고 닳은 흑백사진을 전등에 비춰 볼 때 느끼는 섬뜩하고 기분 나쁜 느낌을 막연히 풍기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어릴 적부터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즉 무심코 들었거나 읽은, 그 추상적인 단어와 연결된 꾸밈말이나 짧은 맥락을 통해서 그 추상적인 단어의 뜻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한 결과일 텐데 그 무의식적 학습 과정에는 추상적인 단어에 대한 건조한 정의나 뜻을 막연히 짐작해서 추론하는 과정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과정은 그 추상적인 단어가 풍기는 윤리적 또는 도덕적 냄새를 관련된 꾸밈말이나 짧은 맥락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학습하고 그래서 옳다 그르다는 판단 범주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해서 기억에 저장하는 과정입니다. 제 눈에는 이 과정이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표현처럼 때로는 그 단어의 본래 뜻을 관련된 꾸밈말이나 짧은 맥락이 잡아 삼켜 먹어서 그 단어의 본래 뜻이 왜곡되기도 하는데 그건 뜻을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한자어로 표현되는 추상적인 개념들이 거의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일지도 몰라 보입니다.
그와 같이 "억지로 순리를 거스르려 하지 말고 물 흐르듯이 살아라"라는 표현 속에 들어있는 "순리"라는 표현도 "물 흐르듯이 살아라"라는 표현의 구속을 받아서 그 본래 뜻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마치 인간에게 의지라는 성질은 애당초 없는 듯이 맞닥뜨린 "운명"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기만 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면서 말이지요, 물론 나이 많으신 할머니들이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데 그건 인간적인 한계와 함께 여성이라는 존재 때문에 지극히 가부장적인 예전의 한국의 문화; 그러니까 금이야 옥이야 정성스레 키운 아들만 중요할 뿐만 아니라 어떤 아유를 대면서 다른 의견을 밝힐 자유도 권리도 허용되지 않은 채 유교적인 시댁의 생활문화나 관습에 말없이 복종해야 하는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때론 속으로 화도 나고 때론 억울하기 짝이 없어도 군소리하지 말아야 하는 엄청난 현실의 벽 앞에서 한없는 속앓이와 한숨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는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겠다는 짐작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할머니들도 젊은 날 그리고 현재도 과거의 그런 속상한 경험들이 마음속 곪은 앙금으로 남은 이유는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또는 저렇게 했을 것이다 또는 하고 싶었다"라는, 한으로 남은 개인적 욕구 때문일 텐데 지금 나이 지긋한 중년의 여성들이나 젊은 여성들에게는 그분들의 한 맺힌 삶의 모습을 쉽사리 이해하면서 마음으로 공감하며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자연이 인간에게 준 선천적인 성질 중에는 다른 동물들처럼 식욕이나 수면욕 그리고 성욕 같이 의지를 통해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본능도 있지만 당면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은 욕구를 바탕으로 머리를 써서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고 그를 현실로 옮기고자 하는 의지라는 "자연스러운" 성질도 같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이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처럼 환경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여서 처한 환경의 조건이 열악해서 의지를 통한 인간적 개인적 속성과 능력을 발현시키는데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면, 그것도 극심하게 방해한다면 마치 추운 겨울날 옷을 두껍게 입지 않아서 감기에 걸리거나 장기간에 걸쳐 끔찍한 기아에 시달려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는 일부 아프리카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몹시 허약해지고 질병에 걸리기도 하듯이 사회심리적으로 몹시 열악한 조건에 장기간 처하게 되고 게다가 그로부터 빠져나올 마땅한 방법도 찾을 수 없다면 슬프게도 만성적인 노이로제나 우울증 같은 심리적 질환에 걸려 고통을 당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약간 뜬금없고 어쩌면 근거 없는 낭만적인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열악하기 짝이 없는 사회심리적인 환경 조건 때문에 신체적인 고통을 동반한 심리적 질병으로 고통받는다는 사실은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인 "쾌락 원칙(principle of pleasure)"을 방증하는 증거인데 성공 여부를 떠나서 그렇게 심리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헤매면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하고 싶고 즐기고 싶은 것들에 대한 욕구는 저 먼 미래로 하염없이 미뤄둔 채 매일 같이 편의점 컵라면 등으로 저녁식사를 때우면서 여러 개의 학원을 뺑뺑이 도는 것도 모자라서 새벽 한두 시까지 엄마의 화난 표정과 듣기 싫은 학원 선생님의 꾸중을 저절로 상상하면서 졸란 눈을 비비며 여러 개의 학원 숙제를 요령 피워가며 해야만 하는 어린 학생들의 처지에도 잘 들어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전 뉘앙스와는 사뭇 다른 "어서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하는 쓸데없지만 간절한 소망이 자기도 모르게 가슴속에 가득 찰지도 모릅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