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 극단의 흥분과 극단의 절망 사이 (7)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분은 요즘엔 티브이 화면에서 잘 볼 수 없는 배우 박신양과 김정은이 주연을 맡았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파리의 연인"을 기억하실지 모릅니다. 저도 그때 그 드라마를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마지막 회를 남겨두고 작가가 그동안 화면에 나온 이야기는 사실 주인공 태영(김정은 분)이 가난해서 다른 사람(한기주: 박신양 분)의 집 정리와 청소를 하는 가정부로 일하면서 틈틈이 쓴 소설 속 이야기였다는 결말로 끝내려 한다는 내용이 뉴스를 통해 얼려지자 이 내용을 접한 네티즌들 중에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그런 결말에 극구 반대해서 결국 드라마는 흐지부지한 결말로 끝나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드라마가 그렇게 끝을 맺게 된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된 뒤 마음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는데 가난하지만 씩씩한 태영이 마치 신데렐라 동화 속 얘기처럼 재벌가 2세인 기주와 사랑에 빠져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간신히 뚫고 드디어 결혼에 골인할 것이라는 해피엔딩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넘겨짚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문을 통해 그 드라마의 맥 빠지는 결말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서 저는 그 드라마의 작가가 어째서 시청자들의 반발을 불러올 게 뻔해 보이는 그런 내용으로 드라마의 결말을 맺으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건 지금껏 동화 속 신데렐라 식으로 끝나는 드라마들의 결말이 현실성이 없어서 못마땅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현실이면 좋겠지? 하지만 그런 기적 같은 일은 현실에선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구. 게다가 여자는 왜 늘 자기를 사랑하는 돈 많고 권력을 가진 왕자님 같은 남자를 만나야만 행복해지냐구! 제발 현실에 눈 감지 말고 누추하더라도 현실을 똑바로 보라구!"라고 말이지요.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는 조울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흔히 못나고 추하고 변변치 못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질 뿐만 아니라 몹시 초점이 잘 맞지 않는 안경을 끼고 보듯이 흐릿하게나마 눈앞에 흐뭇한 장면을 잠시 그려보기도 합니다. 이때 긍정적인 측면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흐뭇한 상상을 통해 좀 더 나은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동기가 유발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놓쳐서는 안 되는 점은 그 흐릿한 상상이 지금의 현실과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지 아니면 처한 현실 속에 씨앗의 형태로나마 존재하는지 여부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구분이 조울증의 조증 상태와 희망을 가르는 중요한 척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분은 누가 "현실이 이렇게 바뀌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콧방귀를 뀌면서 "그게 가능하겠어?" 또는 "말도 안 돼"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 아니면 도 식으로 목표를 정해서 오로지 처음 정해놓은 목표만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를 윤리적으로 비난하기 어렵지만 가능성의 차원으로 볼 때 "위험하다"라는 판단은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의 한계와 더불어 특히 그 목표가 사회적인 성격을 가질 때 총론적인 입장에서는 동일한 추상적 목표를 추구하지만 각론의 수준 또는 방법론적 측면에서는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에 입각한 다른 주장이나 의견들이 존재해서 때론 서로 간에 불화나 갈등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떤 목표 지향적 행동을 취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나서 목표를 향한 행동들이 갈 지자를 그리거나 때론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을 주게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실망과 좌절 그리고 심하면 그 목표에 대한 냉소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정치 사회 수업시간에 "전략"과 "전술"이란 정치적 표현을 배웠습니다. 그 표현들이 독재국가 그리고 철저한 통제국가인 북한과 관련되어서 배웠기 때문에 좋지 않은 느낌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본래 뜻은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또는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나 수단"을 가리킵니다. 물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식으로 목표가 이상적이고 바람직하다면 그 어떤 수단, 즉 그 어떤 전략이나 전술도 정당화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세운 목표나 목적에 도달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때로는 예기치 못한 복병을 느닷없이 만났을 때처럼 미처 예기치 못한 난관과 마주쳤을 때 어떻게 하면 취한 방법을 전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수정해서 기존에 세운 목표를 계속 지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유연한 전략적 사고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울증 증상 중 극도로 흥분된 상태인 조증의 상태를 경험했고 여전히 종종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가치가 포함되어 있는 높은 목표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높은 목표를 어떻게, 즉 어떤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을지 묻고 싶습니다. 아니, 반드시 조울증 진단을 받아 환자로 분류되는 사람 말고도 높디높은 이상을 지향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구호만 가득한 채 무력한 상태에 처한 이른바 이상주의자들에게도 그 높디높은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묻는다면 앞서 언급한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결말처럼 속된 말로 "김 새는" 또는 "기분 잡치는" 느낌이 들어서 속이 편치 않을 게 뻔하지만 말이지요. 물론 어떤 목표는 성취 가능성이 적더라도 그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하는데 다른 변수들도 작용할 수 있지만 그 목표의 성취 가능성이 적은 아유 중 하나는 그런 목표가 달성된다면 물질적 또는 심리적인 손해를 당해야 하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때론 그들은 화려하지만 논리가 요사한 말의 잔치를 벌이면서 쌍수 들고 그 목표의 달성을 저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득권 세력은 어떤 성질의 목표이냐에 따라 구성원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답 같은 성질의 목표가 달성되려면 그에 대해 결사반대를 외치는 기득권 세력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런 설득이란 상상 속에서만 흐뭇한 결말을 맺을 뿐 현실 속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진보 지식인은 "더 나은 패배"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 표현이 얼핏 "형용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해한 바대로 말씀드리자면 이런저런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의 개입, 특히나 이미 특혜나 보상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을 가진 기득권 세력이 그 기득권을 사용해서 격렬히 반대하는 데서 오는 심한 어려움 등 때문에 비록 원래 세운 목표는 이루지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작은 성취를 이뤘거나 아무런 외적 성취는 이루지 못했을지언정 적어도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이유나 원인을 전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서 다음번에 다시 그 목표를 세울 때 그 목표 자체를 조금 또는 상당히 수정할 수 있고 나아가 방법론적으로도 이전의 실패 요인을 분석해 봄으로써 전략적 수정도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조울증, 즉 양극성 장애가 정신질환으로 분류되지만 우린 가벼운 형태의 조울증을 흔히 경험합니다. 이를테면 시쳇말로 어떤 좋은 일로 기분이 업 되었다가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분이 급격히 다운되는 식으로 말이지요. 다만 양극성 장애가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는 주요한 이유는 다름 아닌 "경직성"에 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살아가면서 사람과 세상 돌아가는 것에 실망도 하고 때론 절망도 했다가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지만 견디기 힘든 그런 감정을 달래기 위해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여행도 가고 외식도 하다가 다시 가분 잡치는 일을 당하기를 연속하는 데서 완전히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자주 쓰이지 않는 말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전에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표현이 종종 쓰였습니다. 초심이란 어떤 측면에서 아직 구체적인 경험의 축적 없이 세운 추상적인 목표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을 텐데 그 초심에는 "이렇게 하면 반드시 이런 결과가 나타날 거야"하는 막연한 기대가 포함되어 있고 그런 막연한 추상적인 목표가 그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동기를 유발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바렘이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처음에 품은 기대에 바탕을 둔 초심은 변질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흔히 타락했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기대감을 바탕으로 목표를 세운 뒤 그 목표를 지향하다가 난관이나 어려움에 맞닥뜨렸을 때 그 목표가 원래 이룰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으면 모를까 현실 속에서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그 가치지향적 목표 자체를 부정하거나 냉소 어린 경멸의 눈으로는 바라보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지향하는 목표가 구체적으로 고정되어 경직된 목표점이 아니라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그 폭이 본질을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만 넓고 나아가 정지 화면 속 모습이 아니라 그 폭을 너울거리면서 변화하기도 하는 인간의 삶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는 그런 가치 지향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제야 그저 한낱 인간이 감당해낼 수 있는 목표가 살아 숨 쉴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감당할만한 목표가 되어야만 현실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간절한 마음으로 속으로 이렇게 되뇌곤 합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너무 좋겠지만 우선은 요만큼만이라도 현실이 되도록 요만큼만 가 보자"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조울증에 시달리시는 분들께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많이 고통스러우시겠지만 그리 크게 겁먹으실 필요는 없어요. 우리 모두 때때로 냉온탕을 번갈아 가듯이 감정이 변하기도 하잖아요. 다만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높은 가치를 성취할 방법을 말이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그를 실현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서 허황되게 느껴지더라도 그리 낙담하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당장은 얼핏 시시해 보이더라도 인간이, 그러니까 그저 박 씨, 이 씨, 김 씨라고 불리는 한낱 평범한 인간이 처한 현실 속에서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해 내어서 어느 정도 실현이 가능한 "사소한" 또는 "소소한" 목표라고 느껴지면 가슴이 뛰고 몸이 기분 좋게 긴장하고 그에 따라 축 처졌던 어깨가 펴지면서 몸이 들썩들썩해져서 그를 위해 뭐라도 해 보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요. 게다가 더 가슴을 뛰게 만드는 건 나와 같이 그저 한낱 인간인 다른 사람들 중에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소소한 그. 목표를 감당할 수 있을 테니 조금 낯 간지러운 표현을 쓰자면 그 소소한 목표를 위해 잠시 같이 손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에요.물론 아침에 눈 떠서 늦은 저녁에 잠들 때까지 밥 먹고 만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직장이나 학교에 가서 일하거나 공부하고 퇴근길 또는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시간에 피곤한 눈으로 핸드폰에서 동영상도 보곤 하는 구체적인 일상을 살아가면서 말이지요. 그러니 낙담이 들더라도, 아니 낙담이 들 때 왜 나는 여전히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세요. 그러고 나서 잠시 기억 속에서 시간이동을 해서 과거에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또는 어떤 경우에 그랬는지, 그것도 대학 입학이나 취업성공 같이 비교적 큰일이 아니라 잠시 가슴을 천천히 훑고 지나가는 소소한 행복감을 언제 느꼈었는지 되돌아봐 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은 그제야 긴 악몽과도 같은 꿈에서 벗어나서 "그래, 그렇게는 가능하겠어"하면서 다시 힘을 낼 수도 있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보태자면 우린 아무리 자신이 절대자와 같은 존재라는 망상에 빠져 있더라도 배 고프면 뭐라도 먹어야 하고 피곤하면 쉬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을 뿐만 아니라 그런 망상은 아니어도 남의 말을 오해해서 상대방에게 섭섭함을 느끼거나 화가 났더라도 그게 오해였다는 걸 알게 되면 미안한 마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그저 한낱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임을 잊지 마세요"라는 꽤나 긴 당연한 말을 말이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