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식으로서의 인용
시금석詩今釋
지금의 나와 시를 연결하며 주석을 답니다.
그런 방식으로 시와 나를 잇고 시를 체화합니다.
시로 촉발된 이야기와 이야기 속에 어렴풋이 깃든 시적 순간을 나눕니다.
시와 지금의 나 사이를 오가며 희미하게나마 내가 되어가려 합니다.
'먹다'라는 동사에 관해 생각한다. 바깥의 것을 내 안으로 들이는 일. 인간은 뱀처럼 상대를 통째로 삼킬 수 있는 능력이 없으므로, 상대를 조각내 제 안으로 들인다. 입안 가득 들어온 바깥을 온 힘을 다해 씹는다. 나의 타액과 상대의 몸체에서 나온 즙이 섞인다. 맛과 촉감이 입안에 가득 찼을 때, 상대를 삼킨다. 내 안으로 들어온 바깥은 더 잘게 분해되어 피와 살과 뼈에 스며든다. 바깥을 안으로 들이는 이 과정에서 어떤 욕구가 융기한다. 솟아오른 욕구는 배설되기도 한다. 이 배설은 간혹 누설이나 발설이라 불리기도 한다.
먹어버리고 싶은 문장을 만났을 때, 문장이 내 안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느낄 때, 나는 인용을 한다. 내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인지하는 동시에, 문장 속에 나를 녹이고 내 이야기 속에 문장을 녹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인용한 문장과 내 문장 사이에는 명확한 간격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그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때가 온다. 인용한 문장이 기어이 내 이야기를 불러냈을 때. 내 이야기가 그 부름에 응하고 말았을 때. 부지불식간에 부름에 응해버린 사람처럼,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용기를 짜내어 뱉는 대답처럼, '나 여기 있어요' 하는 심정으로 인용을 한다.
설득력을 더하기 위한, 권위를 빌리기 위한 인용을 한 적도 분명 있다. 그러나 그보다 좀 더 내밀한 인용이 나의 글쓰기에서는 더 많이 일어나는 듯하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부르는 힘이 있다.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다른 이야기를 가장 많이 호명한다. 어떤 글들은 내게 용기를 준다. 이렇게 써도 되는구나, 이런 것을 써도 되는구나, 하고 읊조리게 한다. 눈치 보느라, 혼이 날까 봐, 결국 내 존재 자체가 수치스러워질까 봐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몸소 알려준다. 좀 더 가봐도 괜찮다고, 갈 수 있는 길이 많다고 말해준다. 한편으로는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한다. 잠시가 아닐 때도 있다. 발목을 휘감는 넝쿨처럼 나를 휘감고 잡아 세운다. 배설이 아닌 누설이, 발설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으냐고 묻는다. 낯설고, 그래서 위험할 수 있고, 나의 부족함을 기어코 마주하게 하는 문장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누설하게 될 때가 있다. 무언가 말할 수 있을 거라는 모종의 확신과 충동을 느끼고, 그 충동을 시간을 들여 가다듬고 나서 쓰는 글은 발설이 되기도 하는 듯하다. 누설이든 발설이든, 심지어 배설이든, 나 혼자 해온 일은 아니다. 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나서 일어난 일이다.
문장만 인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읽는 사람들의 말 역시 인용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 말 속에 담긴 생생한 감정과 경계를 넘나드는 감각, 익숙하지 않아 곱씹게 되는 사유들에 나는 잘도 사로잡힌다. 때로 내 안이 너무 좁고 단조로운 것 같아 부끄러워지기도 하지만, 덜 부끄러워지고 싶어서 자꾸 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순간에도 창문은 열려 있다. 그래야 문을 열고 나가는 일이 덜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 배우는 것, 낯선 상황을 통과해 내는 것, 관계 속에서 자꾸만 나를 다른 각도에서 비춰보고 재배치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인용으로 느껴진다. 타자를 인용함으로써 나를 구성하는 것. 바깥을 소화하기 위한 저작운동(咀嚼運動, 著作運動)을 멈추지 않는 것. 처음 말을 배웠을 순간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나는 가까운 사람들의 말투와 그들이 자주 쓰던 단어를 따라 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의 언어가 가진 리듬감을 몸으로 익히며 더듬더듬 발화를 계속했겠지.
너무 자폐적인 읽기, 자폐적인 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 깊은 곳에 있는 허기에 집중한다. 나로는, 지금의 나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감각. 부풀려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고 싶다는 욕망. 이불 속에 들어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바깥의 소리에 신경을 끄지 못한다. '나에게 매몰될 수 있는 나' 역시 나의 오리지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식의 인간이 세상에 나뿐이었을 리가 없다. 나와 완전히 같을 순 없겠지만(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매몰적 인간'이라는 일종의 계보가 있을 것이라는 느낌, 나에게 매몰될 수 있는 그 '나'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온 것일 거라는 느낌이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시시각각 영향을 받고 (의도치 않은 순간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나니까.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결국 나와 구별되는 당신이 있기 때문일 테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당신들에게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매혹되고 끌려가고 있으니까. 어쩌면 인용은 글쓰기의 방식을 넘어 인간의 존재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 역시, 수많은 말과 글 사이에서 싹튼 생각일 테다.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글들을 천천히 곱씹으며 읽는 일. 그렇게 읽듯 누군가를 만나는 일. 영향력을 거부하는 대신 바깥을 단서 삼아 영향력 속에서 계속 써 나가는 일. 그 속에서 내가 인용했던 당신의 글도, 당신의 글에서 시작한 내 글도, 처음과는 다른 얼굴을 지닌 글이 되어간다. 양 항 모두가 변해가는 일. 헨젤과 그레텔은 길 위에 계속 빵 부스러기를 떨어뜨리며 걸어갔다. 돌아갈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떨어뜨리고 온 나라는 부스러기들을 주워먹는 것은 지금의 내가 아닐 테니. 언젠가 당신이 말로, 글로, 목소리로, 번뇌 어린 눈빛으로 떨궈 놓았던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더듬더듬 걸었던 기억이 있다. 당신을 주워 먹은 나는 또 다른 누군가가 먹을 수 있도록 나를 조금씩 떼어 떨어뜨린다. 부스러기들을 주워 먹고 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미래의 나이기도 할 것이다. 당신이라는 문장을, 당신이라는 목소리를 떼어 먹고 소화하고 싶었던 마음은 어느새 나를 당신에게 떼어 건네주고 싶은 마음으로 변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