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금석詩今釋) 시가 하는 일

환영처럼 피어오르며 우리를 환영해줄 실감의 공동체를 향해

by 시유

시금석詩今釋

지금의 나와 시를 연결하며 주석을 답니다.

그런 방식으로 시와 나를 잇고 시를 체화합니다.

시로 촉발된 이야기와 이야기 속에 어렴풋이 깃든 시적 순간을 나눕니다.

시와 지금의 나 사이를 오가며 희미하게나마 내가 되어가려 합니다.





시적인 게 뭘까요?


월요일마다 함께 시를 읽고 쓰는 모임에서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했다. 종종 사람들과 시를 읽고 쓰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어떤 게 시적인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앞으로도 ‘시적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사람들과 시를 읽고, 사람들 사이에서 영향을 받으며 시를 쓸 것 같다는 예감을 한다.

‘시적인 게 뭘까요?’라는 질문을 듣자마자, 사실 나는 좀 이상한 문장을 떠올렸다. ‘나에게 시는 무엇일까?’. 시적인 것에 관한 질문이 나에게는 이렇게 번역되어 내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나에게 다시 질문을 번역해 던져 주었다. 지금의 너에게 시는 무엇이니.


내가 나라는 사실을 견디게 하는 방식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안에서 솟아올랐다. 일상에서는 그다지 말이 많지 않은 나는, 시를 쓰면 말이 많아진다. 웬만해선 하지 않은 말들을 시에다 부려놓는다. 나를 갈기갈기 찢고 산산이 부쉈던 말들을 옮긴다. 시를 쓰는 일은 꼭 말하는 일 같다. 아무도 내가 쓰는 시에 관심 없는데, 누가 볼까 봐, 보고 상처 입을까 봐, 매번 주저한다. 매번 주저하면서도 기어코 까발린다. 그렇게 쓴 시들은 종종 ‘시답지 않은 것’, ‘시가 되기 전의 무언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시적이지 않다는 뜻이겠지. 왜 어떤 시는 시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어떤 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까, 궁금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이제 내게 중요한 건, 지금의 나와 시와의 관계다.


*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일 중 내게 가장 어렵고도 중요하게 느껴지는 일은 ‘듣기’다. 다른 일들이 쉬워서는 아니다. 강보에 싸인 갓난애는 스스로의 귀를 막을 줄 몰랐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들려오는 소리를, 저를 향한 말들을 들었다. 듣는 것밖에 몰랐다. 들으면서 알게 됐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때때로 제 몸이 통째로 귀라고 느꼈다. 들은 것들이 죄다 재료가 됐다. 말하고 썼다. 온 정신을 쏟아 읽는 일도 듣기의 일종인 것처럼 느껴졌다. 잘 듣는 사람이고 싶었다. 누군가가 잘 들어줄 때, 그리하여 들리는 존재가 되는 그 순간에, 내가 나인 것이 조금은 견딜만한 일이 되었기 때문에. 견딜만한 순간이 많아지는 것이 삶이었으면, 싶어서.

마음이 닳아 없어지도록 졸이고, 때로는 자괴감에 시달리면서도, 시를 읽고 쓰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읽어줄 때 비로소 내가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지 발견할 수 있었다. 평가나 판단 대신, 시에서 느껴지고 상상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 비로소 ‘들리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더 쓸 마음이 생겨났다. ‘이렇게 써도 되나?’, ‘이런 이야기를 써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는, 나를 읽어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딱 한 뼘, 한 뼘씩 앞으로 나아갔다. 우중충하고 지루하고 기괴한 시를 계속 썼다. 쓰면서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람들과 시를 읽고 쓰는 자리에서 내가 나누고 싶은 것은 결국 ‘실감’이다. 서로가 서로를 들어주기. 들어주면서 서로가 서로를 ‘들리는 존재’로 만들어주기. 이야기를 지닌 존재, 이야기를 발명하는 존재가 되어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그 속에서 내가 나라는 사실을 한없이 실감하기.

이런 경험 속에서 실감하게 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다. 함께 시를 읽어온 한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나가는 대화 속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 그렇구나’ 하고 넘겼을 텐데, 상대방이 쓴 시를 읽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넘길 수가 없게 돼요. 그 사람이 느꼈을 마음이, 감각이 내게도 느껴져서. 시가 하는 일이 그런 것 같아요. 느끼게 하는 일.


판단과 평가를 내려놓고, 헤아리고 상상하는 읽기를 할 때, 비로소 상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앞의 그가 피와 살과 뼈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이,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았다. 나와 함께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분위기를 만들고 영향력을 끼치며 자신의 삶을 시시각각 만들어 나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생생해졌다. 그런 느낌은 꽤나 입체적인 것이어서, 상대를 마냥 미워할 수도, 마냥 숭배할 수도 없게 했다.

어쩌면 모두가 어떤 종류의 ‘실감’을 얻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것은 아닐까.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내가 나로 살아 있다는 실감, 가치 있는 존재라는 실감을. 세계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때로는 버겁지만 종종 감격스럽고 간직하고 싶은 실감을. 그러한 실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뿐만 아니라 내 곁에 있는 것들을 더 섬세하게 느끼게 되었다. 세계를 향한 섬세함이 나라는 존재의 주파수를 더 세밀하고 넓게 만들어주었다. 나라는 존재의 선명도를 높여주었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너에게 시는 무엇이니?’라는 질문이 어느새 ‘시가 무엇이었으면 좋겠어?’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나에게 시는 ‘접촉’이다. 시가 하는 일이 접촉이었으면 좋겠다. 이질적으로 느껴왔던 것들(여기에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과의 접촉을 통해 나를 발명해 나가게 하는 것. 인간성을 만들어 나가게 하는 것이 시였으면 좋겠다. 도덕적, 법적 차원에서의 인간성이 아니라, 그보다 아득히 깊고 넓은 인간성을 함께 고민하게 하고, 서툴게나마 실험해보게 하는 것이 시였으면 좋겠다. 인간성의 ‘회복’이 아니라, 인간성의 ‘발명’을 향해 나아갈 때, 시가 사람들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시를 통과해 사람들이, 세계가, 내가, 연결되었으면 좋겠다.


함께 시를 읽고 쓰는 순간에, ‘실감의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때가 있다. 환영일지라도 상관없다. 그게 나를, 그리고 당신을 환영하는 일이라면. 좀 더 많은 환영을 용기 있게, 재밌게, 기어코,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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