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새해에는 동화·동시 온라인 수업을 듣고자 한다. 힘을 아끼면서도 집중하려는 선택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방향을 잃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사실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어머니는 아들의 기력이 모두 소진될까 염려하시며 반려하길 바라셨다. 그 걱정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호소했다. 이 청탁이 주간지와 간행물, 그것도 가톨릭 매체이기 때문에 거절하는 일은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이며 내 신앙을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병으로 인한 상실은 태도로 견딜 수 있겠지만, 병 때문에 믿음을 잃는다면 그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없다고. 그렇게 나는 어머니를 설득했다.
노심초사하던 어머니 앞에서 아들은 참으로 말도 잘했다. 조약돌만 한 믿음으로 엄청나게 커다란 믿음을 가진 어머니를 상대로 설교를 한 꼴이었으니 부끄럽고도 당돌한 일이었다. 세상의 많은 여인들은 이렇게 입만 살아 있는 장엄한 남자들에게 미처 거절할 새도 없이 설교를 당해왔다. 역사가 그렇다. 남자들이란 의병이나 독립운동가, 혹은 성인인 양 열정이 불타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옳은 말은 착한 사람들이 건네는 문장들이다. “선비야, 다 좋은데 무리하지는 마.” “선비 씨, 좀 쉬세요.” 이 말들은 언제나 정답에 가깝다. 그들은 단조롭고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병자가 겪는 마음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선을 넘는 친절을 지닌 영혼들이다. 사람은 선을 넘는 선의로 창조된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병자의 내적인 외상이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의 심리와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심리학과 영성심리학이 충분히 보듬지 못한 이 지점은, 차별금지법을 근거로 질병과 장애로 인한 심적 치유 특별 지원 조항을 마련하는 일로 보완되어야 한다.
다수당인 여야가 무능력해 보이는 까닭은 포괄적인 차별금지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법과 국가장애인위원회 설치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의 대한민국은 고소와 고발이 일상인 나라다. 불의와 인권침해 앞에서 장애인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여건상 변호사 선임부터 현저히 어렵다. “너는 승률 높은 대형 로펌, 나는 국선.” 이 격차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차금법으로 최소한 국선변호사가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변호사가 사회공헌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돕는 일은 국가 전체의 이익이다. 특히 성인 남성장애인보다 더 취약한 여성장애인과 아동·청소년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말이 조금 겉돌았다. 요즘 나는 동화 작법서를 며칠 전부터 읽고 있다. 동화는 아동의 주관적 진실이며, 동시에 성인에게도 말할 거리가 될 때에만 비로소 세상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장애인으로서 나 자신의 진실을 쓰고 있다. 그것은 이 세계에 아직 남아 있는 감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태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