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모순 사이, 회개의 길, 종교는 거룩하다는 착각

탈시설 담론과 천주교의 사조

by 레푸스

탈시설 이념화 경계해야.


기독교와 #종교 가 모두 거룩하다는 착각은 때로 신앙의 본질을 흐리게 합니다.

사람이 이끄는 모든 공동체는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안에는 흔들림과 실수, 회개의 여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값비싼 포도밭, 그 은총의 자리에 하느님은 무화가 나무를 가득 심으셨습니다. 포도나무와 비할 수 없는 그 나무들, 그러나 그 선택 안에 하느님의 깊은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계획한 질서가 아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질서. 그것은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바로 그 다름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를 새로운 시선으로 이끄십니다.


지상 모든 교회는 순종으로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정화되어 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교회는 완전한 공동체라기보다, 여전히 많은 병목과 모순을 품고 있는 불완전한 신앙의 터전입니다. 성직자의 실수, 제도적 한계,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가 묻히는 구조적 지점은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 아픔조차 하느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교회 안에 숨은 상처를 통해 자비의 빛을 비추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면서도 그 안에서 더욱 정화되어야 할 책임을 함께 짊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가 고해성사 없이 산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고해성사는 단순한 의무나 전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화해의 은총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고백의 행위입니다. 회개하라는 고해성사의 부르심은 다른 종교에는 없는 신비이며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을 무겁게 받아들이기보다, 겸허히 응답하며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신자가 고해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망각하는 교만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습니다.


교회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비난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와 시민사회, 그리고 교회 스스로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임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어떤 성당 공동체가 때때로 타락하고 정치화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 너머, 우리 자신이야말로 회개와 자비가 필요한 죄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는 자율성과 수행 즉 단련을 강조할지 모르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하며 실천하는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한계와 내면의 갈등, 그리고 삶 속에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모순과 마주하게 됩니다. 연약함, 의심, 신앙의 흔들림,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느껴지는 불완전함은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모순 속에서도 묵묵히 일하시며, 우리가 멈춰 선 자리에 자비의 꽃을 피우십니다. 결핍은 하느님의 손길이 스며드는 공간이며, 모순은 우리를 자만으로부터 지켜주는 은총의 문턱입니다.


이 창의력은 인간이 주도하거나 계획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심으시고 가꾸시며, 때로는 가지를 치고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베어내시돼,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키시는 사랑의 손길에서 비롯됩니다. 포도밭을 인간의 계산과 질서로만 유지하려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하느님의 섭리를 제한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보다 오래 참으시며, 우리의 이해를 넘는 방식으로 그 뜻을 이루십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밭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인내, 그리고 자비의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회심의 은총을 배웁니다. 해를 넘겨도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 그러나 그것을 참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은 교회의 자비로운 정화와 닮아 있습니다. 이 기다림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내면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릴 기회를 줍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충실해야 하며, 세상이 말하는 창의성보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에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 지혜는 말씀 안에 머물 때, 미사의 고요한 순간 속에서, 그리고 묵상 중에 비추는 성령의 빛 안에서 자라납니다. 이 빛은 눈부시지 않지만, 영혼 깊은 곳을 비추며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곧지 않으며, 포도밭과 무화과나무처럼 예상치 못한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그 모든 장면 속에서 하느님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십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조차도 하느님의 섭리 아래 놓여 있으며, 그 속에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 나무를 바라보며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시간과 계획을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모든 조직, 정부와 정당, 그리고 시민활동은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며, 끊임없이 자비의 빛을 따라 걸어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이며, 오늘의 교회가 품어야 할 깊은 희망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 공동선, 보조성의 원칙, 연대의 정신은 교회가 세상 안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을 구체적으로 이끌어 줍니다. 교회는 단지 영혼의 안식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과 불의에 응답하고자 하는 정의의 실천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컨대 저희 당에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존재하듯, 면담이 불발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시위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소통의 방식이 아닙니다. 불통은 결코 일방의 책임이 아니라, 언제나 쌍방의 과제입니다. 혜화동 성당에서의 농성이 누군가에게는 절박한 외침일 수 있으나, 천주교 신자 입장에서는 신성한 종교 행사를 수행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 신성함을 정치적 타도의 장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오히려 교회와 신앙을 왜곡하는 행위이며, 망언과 의도성을 담은 표현으로 전체 천주교를 일반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처사입니다. 동시에 천주교 내부에서 나온 일부 망언이나 의도적인 방식 또한 동의할 수 없는 것이며, 교회가 마땅히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어느 한 공동체를 단지 공동선의 대상이 아닌 해체되어야 할 악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신앙의 정신에도, 공동체의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노력과 논의,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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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다양한 목소리와 상반된 입장


천주교의 공식 기구들은 탈시설 정책의 문제점을 꾸준히 제기해 왔지만, 교회 내부에서도 다양한 의견의 스펙트럼이 존재합니다. 천주교회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약자에 대한 사랑"과 "인간 존엄의 존중"이라는 교리는 탈시설 논의의 양 진영 모두에 인용되며, 교회 내에서는 과연 어떤 접근이 장애인의 진정한 존엄과 권리를 보장하는 길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식 입장에 공감하는 쪽은 주로 장애인 부모, 시설 관계자, 그리고 이들을 가까이에서 돌봐온 사제와 수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당장의 생존과 돌봄이 우선"이라는 현실을 근거로, 탈시설이 "선의로 포장됐지만 위험을 간과한 정책"이라고 비판합니다. 정순택 대주교의 "'시설=악'이라는 집단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언급이나, 이병훈 신부(들꽃마을 원장)의 "결정권이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는 발언은 이들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이들은 탈시설 자체를 반대하기보다는, 한국 사회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무리한 정책 추진이 오히려 비인도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이들은 "시설도 인간다운 삶의 공간으로 개선될 수 있다", "탈시설은 가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는 우려와 함께, "선택 가능한 시설"로서의 존중을 요청합니다.


반면, 교회 내부의 비판적 목소리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공식 기구에 비해 조직력은 미약하지만, 사회교리와 인권 감수성에 근거하여 교회의 현재 입장을 성찰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신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사회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통합이야말로 인간 존엄의 실현이다"라는 탈시설 철학에 공감합니다.


실제로 천주교 내 장애인사목 단체들은 오래전부터 탈시설 담론을 소개하며 교회의 역할을 모색해 왔습니다. 2018년 가톨릭장애인사목협의회 주최의 세미나에서는 "장애인도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발제가 있었고, 꽃동네 설립자 오웅진 신부도 이 논의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비록 이 논의들이 공식 입장으로 연결되진 않았지만, 교회 내에 다양한 해석과 노력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2024년 말 주교회의 발표 이후에는 일부 신자들이 교구청과 언론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과연 시설을 정당화하는 것인가", "교회가 장애인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가톨릭프레스는 진보적 성향의 매체로, 이와 관련하여 탈시설 당사자와 가족, 인권활동가의 시각을 조명하며 교회의 입장이 장애인 권리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분석한 기획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이 외에도 가톨릭인터넷 게시판 등에서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교회도 존중해야 한다", "탈시설은 시대적 흐름인데 교회가 뒤처지면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내부 토론이 진행 중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 내에서는 "가장 나쁜 시설이라도 집 없는 삶보다는 낫다"는 현실론과, "아무리 좋은 시설이라도 사회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권리론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갈등은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장애인이 안전하면서도 존엄한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서로 다른 응답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변두리의 이들에게 다가서라"는 가르침은 양측 모두에게 각기 다르게 해석됩니다. 한쪽은 "현실의 고통을 겪는 장애인과 가족에게 다가서라"는 뜻으로, 다른 쪽은 "지역사회 밖 소외된 이들의 권리를 회복하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포괄적 이해와 향후 과제


천주교의 최근 탈시설 관련 입장 표명은 한국 사회의 탈시설 논의 본격화와 함께 촉발된 갈등의 일부입니다. 교회는 "약자 보호"를, 장애인 단체는 "인권과 자립"을 내세우며 모두가 가톨릭 사회교리의 핵심 가치를 주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내부 성찰과 토론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조율해야 합니다. 2022년 정순택 대주교와 탈시설 당사자들의 면담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라는 공동의 목표는 동일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지금까지 축적된 돌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사회 내 돌봄" 모델을 제시하는 중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가 운영해 온 그룹홈, 공동체 마을 등의 사례는 시설과 지역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며, 완전한 자립과 전면 수용 사이의 중간 지대를 제시합니다. 이는 탈시설이 지향하는 통합의 가치와 교회가 강조하는 안정적 돌봄이라는 가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는 "상반된 입장"*으로 단순히 분류되기보다, 창조적 긴장으로 작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해석하고 응답할 사명을 지닌 공동체인 만큼, 장애인 인권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가장 약한 이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균형 있는 해법을 찾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번 탈시설 논쟁은 교회가 약자 보호와 당사자 존중이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를 묻고 있으며, 이 과정이야말로 교회 공동체의 성숙과 사회적 신뢰 회복의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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