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병자 영성체를 쓰지 않았다면,
나 혼자만 살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습니다.
평화신문 기고는 제게 밥벌이를 위한 글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과주의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씁니다.
고통의 자리에서 드리는 성체성사는 감상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응답이자 증언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니 잘났다”, “니가 뭔데 가르쳐.”
이러한 반응은 마음을 닫아 거울로 삼지 못하는 사람의 아픔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병자 영성체는 사제에게 '현타'를 주거나 무의미를 전달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을 작은 성전으로 만드는 일
책임은 바로 자신의 몫입니다.
신부님께서 영과 함께 마음을 다해 다가설 때,
병자는 성체 안에서 하느님의 참된 현존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탄이요, 다시 살아나는 부활입니다.
습관적 영성체에 대한 경고는 심판이 아니라
갈급한 희망을 두고 말하는 절박한 설득입니다.
여러분. 대자, 대녀가 있다면 가르칩니까? 설득합니까?
병자인 저는 병자를 설득하지 않으면 직무유기하는 꼴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