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상 장애인으로서 명동을 다녀온 후.
#자유 #이동권 #오피니언
명동대성당 글이 뜻밖의 호응을 얻었다. 종교적 감응도 있었겠지만, 나는 대부분의 반응이 ‘이동’이라는 행위 자체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본다. 인공호흡기를 단 와상 장애인의 외출—그 자체가 누군가에겐 기도였고, 누군가에겐 작은 혁명이었다.
나는 나의 이동 자체가 베리어 프리라고 확신한다.
장애를 경중으로 나누는 일은 언제나 부당하다. 그러나 현실은, 와상 장애인의 이동은 ‘불가능에 가까운 가능성’을 매번 뚫고 나아가는 일이다. 엘리베이터 한 칸, 비 오는 날의 미끄럼, 휠체어 고정벨트 하나까지도 생사를 걸어야 하는 고통이 된다.
이동권 운동은 자극적이거나 감성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그 감성은 누구의 눈으로 읽히는가? 감성적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배제와
무관심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무심히 지나쳐왔는가?
여성 장애인이 평등하지 못한 것처럼, 와상 장애인도 그 안에서 다시 비켜난다.
장애인 운동 안에도 위계가 있고, 그 안에서조차 ‘말할 수 있는 자’의 자격이 따로 매겨진다.
자신의 성별, 장애 유형, 계급적 언어를 넘어서지 못한 채, 누구도 말하지 못한 채, 그렇게 운동은 리그가 되고 위선이 된다.
장애계 오피니언들의 기고문을 잘 읽어보라.
착하고, 정갈하며, 어딘지 모르게 아름답고 선한 문장들 속에
자신보다 더 약한 이들을 지워버리는 혐오와 인색이 깃들어 있진 않은지.
자기 성을 넘어서지 못한 남성.
자기 장애를 넘어서지 못한 인간.
그런 사람은 아무리 글을 잘 써도 결국 추한 언어를 숨기지 못한다.
진짜 글은, 더 아픈 이를 위해 자리를 내주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와상 개무시하는 사람을 많이 경험했다.
이게 뭐냐면 섹스를 더러운 죄로 착각하는 신앙인처럼,
중증 장애인 더럽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