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 sbs 드라마 |사마귀

by 레푸스

십자가 위에 부어진 기름과 이웃의 피 | 신선비 미카엘


어제 사마귀 마지막 회를 보고 주인공의 진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십자가에 기름을 뿌리는 장면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새로운 발견 앞에서 전율을 느꼈다. 신은 우리를 죽이지 않지만 사람은 신의 이름으로 죄를 정당화하기 마련이다. 글을 쓰고 성당을 다니는 나는 작가의 시점으로 흥미로운 영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기름을 끼얹고 방화하는 극중 여인은 연쇄살인범이며, 거룩함으로 회칠된 장소를 태웠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녀를 쉽게 심판할 수 있는가. 설령 그녀가 연쇄살인범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고, 그분이 여전히 사람들의 손에서 죽어가고 있음을 본다. 주님은 부활하셨지만, 세상의 원망과 죄는 여전히 예수를 매질하듯 대하고 있다.


선과 악의 명확한 표징과 상벌을 믿으면서도, 자비를 기도하며 용서를 믿는 것— 그 사이에 그리스도인의 길이 있다. 극중 고현정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했고, 딸을 지키려 저항한 엄마는 아버지의 손에 교살되었으며, 집은 은폐의 목적으로 전소되었다. 성인이 된 그녀는 변태적 의처증과 술에 취해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만났다. 아들을 지키려 그를 살해했다.


가정폭력과 성폭력의 고리는 그녀의 불행을 키웠고, 결국 ‘쓰레기 남성들’을 없애는 것으로 자신의 정의를 완성하려 했다. 그녀는 연쇄살인에 당당했고, 자신은 법적 처벌을 이미 받았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질문이 있다. 변호사의 관점에서 인내를 말할 것인가? 신앙인의 관점에서 그렇더라도 살인을 용납할 수 없다고 강변할 것인가? 목사직을 수행하는 아버지는 딸에 의해 교회 건물이 불타는 순간 사라진다. 그는 칼을 든 딸의 앞에서 몹시 떨었고, “나는 이미 죄를 용서받았다” 고 말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그는 —과거 딸의 연령인 초등학생 여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성폭력을 이어갔던 가해자의 자리였다.


거치식 십자가에 기름을 붓는 장면에서 신과 함께 죽은 것은 오히려 고현정 자신이었다. 그녀는 죄인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없어져야 할 쓰레기 남성들’이라는 조건을 붙이며, 살인은 정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사회적 맥락을 드러냈다.


우리는 묻는다. 누구를 벌할 것인가. 음란마귀 피해자이며 가정폭력의 희생자인 연쇄살인범인가, 아니면 여성과 아이들에게 죽음을 암시하는 남성 폭력의 구조인가. 사실 속에서, 흉악한 성폭력범이 죽어 마땅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쉽게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리스도교는 살인하지 말라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단순한 금지의 문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존엄과 생명의 불가침성에 대한 근본적 선언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증오와 혐오, 시기 같은 이기심과 더불어, 미디어가 전하는 소식들로부터 각자의 일상 사소한 일들에 이르기까지 마음속으로 매일 ‘살인’을 반복하지 않는가. 마음속 분노로 타인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공감하지 않음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카인은 답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 질문과 응답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윤리적 책무를 부과한다. 이웃의 피를 듣지 못하거나 듣고도 모른 체하는 것은 공동체적 살인에 가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선과 악, 상벌과 자비, 심판과 용서는 십자가 앞에서만 완전히 보이고 또 알 수 없는 신비로 남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를 심판할 수 있는가. 형제의 고통은 곧 약자들의 피의 울부짖음이다. 무관심은 그 울부짖음을 은폐하고, 결국 약자들로 하여금 극단적 행위를 선택하도록 내몬다. 집단이 이웃의 피를 모른 척하는 데에서 약자들의 절망과 폭력이 생성된다.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살인의 정당화를 허용할 수 없다. 우리는 법과 윤리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구조적 원인과 공공의 책임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교도소 수감자의 다수가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사실은, 처벌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증언한다. 무관심은 괴물이며, 그 괴물은 이웃의 피를 의미한다.


정치적 신념을 앞세운 심판과 선동은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가짜 정의를 외치며 분노를 폭발시키는 동안, 실제로는 지구촌 곳곳에서, 우리 동네에서, 옆집에서, 가족 안에서 여성과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진정한 변화는 사랑 안에서 ‘사람’을 지키는 일이다. 사랑의 소유자가 있는 곳에서 평범한 사람은 비폭력·인권·평화의 길을 지킨다.


우리는 기도만으로 끝내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기도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웃의 아픔을 듣고, 돌보고, 구하는 사랑의 실천만이 사람을 극단으로 내모는 구조를 바꾼다. 이는 교화나 전통적 범죄예방의 틀을 넘어선다. 폭력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없는 자에게 평화를 재건하고, 친교와 도움으로 만나는 것이 사람다운 도리다.


세계연합과 국제구호기구의 힘이 쇠해진 시대에, 국내외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무관심은 제도적 결핍과 맞물려 약자들을 고립시키고, 결국 사회적 폭력을 양산한다. 내가 살인자가 아니더라도, 죄인이 아닌 건 아니다 — 그 사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비로소 행동으로 나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구조를 묻고 제도를 개선하며, 교육과 보호망을 세우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실질적 시스템을 만들자. 사랑 안에서 우리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 되자.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현실 안에서 실현하는 길이다. 고전에 거세 이야기처럼, 대중은 자기 공동체를 끊임없이 거세하고 있다. 내 비유는 이것은 남성성의 의미를 떠나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모든 이의 잘못 때문이다.


나는 무관심과 인색함의 죄를 십자가와 함께 불태워,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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