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지대에서 존엄의 기도

by 레푸스

회색지대에서 존엄의 기도 (신선비) #장애와 #질환에대해 #에세이


‘나는 스위스 난민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밀었던 글은, 댓글과 소개문 속에서(페이스북) 누군가는 나를 소화 데레사 성인에 빗대었고, 또 누군가는 글이 새벽 기도처럼 느껴진다 말했다. 그 말들은 나의 부채감을 조금씩 덜어주었다. 짊어지고 살아가던 십자가의 무게가 마음 한 모퉁이에서 사르르 가벼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상에는 장애인이나 환자의 존재 자체에 반기를 드는 이들 또한 있다. 그런 이들이 동의를 얻기위한 혐오 활동을 하지만, 그것의 오류는 국민적 복지의 강화로 보편의 혜택으로 다가갈 때에야 비로소 납득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교통사고, 질병, 노년—우리 삶의 대부분은 후천적이고 생물학적 요인으로 어느 순간 몸의 조건이 달라진다. 일시적인 부상만으로도 경사로가 필요하고, 저상버스나 엘리베이터가 감사해진다. 누구나 언젠가는 몸의 무한이 축소된다는 사실, 그 진실을 직면할 때 사람은 비로소 겸손을 만난다.


이른바 '이동권 투쟁'이 있었다. 장애계와 시민사회가 고군분투하는 동안, 정작 갈등의 해법을 내놓아야 할 여의도는 격벽을 세우며 마치 전쟁 캠프처럼 서로를 향해 창을 들었다. 통합과 협력이라는 개선문 따위는 애초부터 세울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언론도, 종교계도 이 싸움의 본질을 잃은 채 사실상 눈을 돌렸다.


회색지대를 잃어버린 시대는, 결국 적대의 기류가 서로를 파괴하는 초갈등으로 흐른다. 나는 한 장애인 단체가 시민 불편을 감수하게 하며 충격요법을 펼친 행위를 보며, 그것을 ‘능동적인 장애인들’의 외침이라고 이해했다. 그들은 지하철을 정복하며 지워진 이름을 회복하려 했다. 다만 그 방식이 모든 이에게 온전히 닿았는지는 또 다른 질문으로 남는다.


신앙인으로서 나는 이 장면을 묵상하곤 했다. 유다인 지도층과 권력층이 예수님을 없애고자 했던 마음, 그리고 예수님이 율법과 규범에 던진 도전의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러나 그 단체는 예수님의 꿰뚫는 비유와 설교처럼 온유함과 깊이를 끝내 갖추지 못했다.


예수님의 강론은 언제나 온유와 측은지심, 그리고 단호함이었다. 우리 가톨릭은 세속을 버리거나 도피하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현존을 중심에 두고 세상 한복판을 걸어가라 가르친다. 소화 데레사 성인이 그러했듯, 작은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며 작은 행동을 거룩하게 만드는 영성—그것이 우리를 살린다.


신앙인이 회색지대를 만들지 못하면, 심판과 분리와 분열의 언어가 삶을 잠식한다. 복음의 빛과 소금과 향기가 사라지고, 성령님이 주시는 순종의 지혜를 거부하는 영적 마비증이 찾아온다. 우리는 자영업을 하든 직장에서 일하든, 교회에서 봉사하든,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스피릿이 예수 성심으로 부활해야 한다. 그러려면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회색지대—곧 대화와 이해의 공간을—섬세하게 지켜내야 한다.


병과 생이 극단에 놓여 있는 자리에서도 나는 읽고, 쓰고, 사랑을 소유하며 하느님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중립지대, 다시 말해 회색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내 안에서 교차할 뿐이다. 그 모든 흔들림 속에서 나는 하느님을 통해 무지개색의 나 자신을 누릴 수 있다.


아침 피아노 소리의 순수한 것이,

연두부처럼 속삭이며 스르르 녹아드는 것이,

시처럼, 마치 나의 수호천사처럼 내 안에 투명하게 내려앉는다.


이 모든 것이 오늘도 내 삶을 견디게 하는 은총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 은총 위에 흔들리면서도 굳건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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