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은 위로다

by 레푸스

조카가 일주일 놀다가 갔다. 아기는 내년에 두 살이 된다. 그 주중에 목욕을 하게 되었는데, 화장실 바닥에서 씻는 나를 아기가 자기 외할아버지 두 다리 사이에서 매달려 종일 바라보았다. 호기심 가득한 눈이었지만, 혹여 외삼촌인 나에게 방해가 될까 제 딴엔 조용히 있던 것이었다. 그 눈빛은 따뜻했다.


물은 나를 부른다. 그러나 그 부름은 언제나 두려움과 맞닿아 있다. 나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살아간다. 희소병으로 인해 근육이 점점 약해지고, 결국 호흡조차 스스로 할 수 없게 되었다. 디스트로핀이라는 단백질의 부재가 내 몸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목욕은 내게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자 가장 위험한 일이다. 인공호흡기의 마스크를 벗는 순간, 내 몸은 스스로 숨 쉴 수 없게 된다. 그 대신 앰부백—사람의 손으로 눌러 공기를 보내는 주머니—에 내 생명을 맡긴다. 15분 남짓의 시간 동안, 나는 누군가의 손끝에서 이어지는 숨으로 존재한다.


씻는 일이 한때는 너무도 평범해서 가소롭게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목욕탕에서 마신 바나나우유 한 병에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그때의 행복감이 지금도 같다. 엄마 손을 잡고 여탕에 들어가, 성을 모르던 어린이로서 그 따뜻한 김과 웃음소리 속에 섞였던 그때가 그립다.


죽기는 무서운데, 목욕은 하고 싶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불안을 떨쳐내기 위한 가장 큰 위로는, 누구에게나 목욕일 것이다. 비누 향, 샴푸 향, 그리고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온기의 품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용서한다. 그 순간만큼은 삶의 불만족도, 물욕도, 고통도 비켜난다.


어머니가 내 몸을 씻기고, 아버지는 옆에서 앰부백을 짠다. 갈비뼈 앙상한 아들을 씻겨주는 그들에게 나는 불효자가 틀림없다. 마리아가 숨을 거둔 외아들 예수를 깨끗이 닦았던 것처럼, 우리 엄마 역시 아들을 닦는다.


나는 세상엔 대선배 예수님처럼 자기 알몸을 보이기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많다고, 그분께 말씀드렸다. 그 말씀을 올리며 나는 스스로를 달래듯 웃었다. 부끄러움 속에서 사랑이 피어나고,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한다는 것을, 나는 목욕의 물결 속에서 안다.


때로 나는 신께 물었다. “왜 저에게 이 시련을 허락하셨습니까.” 그 수많은 질문들은 어느새 성수처럼 내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그 눈물로 대답하셨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안의 평화는 슬픔 덕에 갈릴래아 호숫가의 풍경처럼 잔잔해졌음을. 하느님은 나를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손으로 요르단 강 깊숙이 잠기게 하여 새 생명으로 일으키고자 하셨음을.


비록 나는 아픈 사람이지만, 여전히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과 생에 대한 희망을 사랑하고 있음을 안다. 가족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신 성심 덕분에 마침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다시 마스크를 쓰면 기계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방금 전까지 내 숨으로, 내 온기로 세상에 닿아 있었다는 것을 간직하기에. 목욕은 내게 죽음과 삶의 경계를 오가는 바다와 같다. (신선비)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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