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위스 난민이 아니다 (신선비)
인체는 말 그대로 근육의 바다다. 우리 몸에는 600개가 넘는 근육이 자리 잡고 있고, 마치 조각보처럼 온몸을 감싸며 힘과 움직임을 만든다. 이 근육들은 크게 수의근(횡문근)과 불수의근(평활근·심장근)으로 나뉜다.
수의근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근육으로, 팔을 들거나 발을 딛는 순간마다 작동한다. 반면, 평활근과 심장근은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소화, 혈액순환, 심장 박동 등을 조절한다. 이 다양한 근육의 협응이 있어야 비로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근육 자체의 구조가 결핍된 질환이 있다. 바로 듀센형 근이영양증(DMD)이다. DMD는 단순히 “힘이 빠지는 병”이 아니다. 그 시작은 아주 작은 유전자의 침묵에서 비롯된다. X염색체 위에 위치한 디스트로핀 유전자가 기능을 상실하면, 근육세포는 그 구조적 지지대를 잃는다.
디스트로핀 유전자는 X염색체에 있으므로, 두 개의 X염색체를 가진 여성은 한쪽이 정상일 경우 보인자로서 증상이 없거나 경미하지만, X염색체가 하나뿐인 남성은 돌연변이가 생기면 이를 보완할 유전자가 없어 질병이 발현된다. 그래서 이 병은 대부분 남아에게서 나타난다.
디스트로핀은 단순한 단백질이 아니다. 그것은 근섬유의 세포막 아래에서 마치 철근처럼 작용하며, 세포 외부의 기질과 내부 골격을 연결하는 다리이자 완충 장치다. 이 구조가 사라지면, 근섬유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할 때마다 찢기고 상처 입으며, 결국 자멸하게 된다.
근육은 수많은 근섬유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의 미오신과 액틴이라는 단백질 필라멘트가 서로 미끄러지며 수축 운동을 만든다. 하지만 디스트로핀이 결여된 세포에서는 이 운동이 세포막을 손상시키고, 그 틈으로 칼슘이 과도하게 들어오면서 파괴효소가 활성화되어 세포는 죽음에 이른다. 죽은 자리는 흉터조직과 지방으로 채워지고, 근육은 점차 기능을 잃는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사지의 마비는 흔히 말하는 신경계 마비와는 다르다. 예컨대 루게릭병(ALS)이나 척수성 근위축증(SMA)은 운동신경세포 손상으로 뇌의 명령이 근육에 닿지 못하는 병이다. 반면 DMD는 뇌와 신경이 온전함에도, 그 명령을 수행할 근육 자체가 서서히 붕괴되어가는 병이다. DMD 환자는 감각을 느끼고, 사고하며, 사랑할 수 있는 온전한 주체다. 마비는 신경이 아닌, 구조를 잃은 근육에서 출발한다.
기술의 발달로 과거보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근육 손상은 결국 호흡근과 심장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갈비뼈 사이의 늑간근, 폐를 아래로 당겨주는 횡격막도 모두 근육이다. 이들이 약해지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기본적인 호흡조차 어렵다. 폐가 문제가 아니라, 숨을 밀어주는 힘이 약해진 것이다. 그래서 인공호흡기가 필요하다. 인공호흡기는 무너진 근육의 대체자이며, 생명을 되살리는 또 하나의 외부 근육이다.
흔히 산소호흡기와 인공호흡기를 혼동한다. 산소호흡기는 폐가 기능하지만 산소가 부족할 때 고농도의 산소를 공급하는 장치이고, 인공호흡기는 호흡근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공기를 기계적으로 들이쉬고 내쉬게 해주는 장치다. 즉 산소호흡기는 산소의 질을 높이는 장치이고, 인공호흡기는 호흡 자체를 대신한다. DMD 환자에게는 후자가 필수적이다.
24시간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자발적 호흡이 어렵기 때문이다. DMD는 횡격막, 늑간근, 보조 호흡근까지 점진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에 들숨뿐 아니라 날숨의 능력도 잃는다. 또한 기침이 약해 가래를 배출하지 못하고, 폐렴 등 이산화탄소가 뇌와 폐에 정체되어 혼수로 이어질 위험도 높다.
기계는 의식과 감각이 살아 있는 주체로서의 생명 유지 장치다. 그러나 과정을 모르는 사람은 묻는다.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나요?” 그 질문은 너무 쉽게 생명을 계산해버린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기계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기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그 삶은 연명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자기답게 살아내려는 존재의 의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불필요한 병원 노출 없이 안전하게 치료받는 것이다.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환자에게 감염은 치명적이다. 따라서 외래 중심 진료, 재택 치료, 원격 모니터링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웨어러블 장치와 클라우드 기반 데이터 관리 시스템은 집에서도 생체신호를 실시간 전달하고 분석하게 한다. 입원을 최소화하고 감염의 위험을 줄인다면, 그들에게는 존엄과 편안함이 함께 보장될 것이다.
희소병을 앓는다는 것은 단지 질병의 무게만이 아니다. 환자는 종종 국민의 질타와 사회의 눈초리 앞에 서야 한다. 질병관리청이 승격되고 보건체계가 강화되었음에도, 일부는 이들을 건강보험의 짐처럼 여기며 ‘송충이’라 부른다.
돌봄은 공동의 책임이라는 대전제가 흔들릴 때, 환자들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이중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 질병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며, 생존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고요하고 단단한 존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작가는 원고 의뢰와 공부를 위해 산다. 매일 레슨과 안무를 연습하는 K-팝 아이돌처럼, 지면이라는 무대에 오르기 위해 문장을 단련한다. 자기 삶과 약점, 고통을 모른 채 연습하는 아이돌은 없다. 그들이 대학을 다녀서가 아니듯, 작가도 국문과 졸업장으로 글을 쓰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단지 아이돌처럼, 내 앞의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사람이다. 오늘 쓴 이 글 또한, 언젠가 한 신문사의 지면에 실려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를 바란다.
작가에게 평범함은 가장 두려운 흑평이다. 창조성 없는 무난함은 문장의 죽음이다. 그렇기에 나의 병과 고통은 오히려 창조의 불씨다. 나를 유일하게 만드는 짐이자, 기회다. 희소병을 위한 목소리로, 그리고 작가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이 글이 중앙일보나 경향신문의 지면에 닿기를 바란다. 그것은 나를 알리기 위한 일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작은 숨 하나라도 더 전하기 위한 일이다.
나는 나 같은 사람을 믿고 써준 가톨릭평화신문과 생활성서를 떠올린다. 세상의 서러움과 엽기적인 일들이 난무하더라도,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를 믿고 써준 그 지면들처럼, 세상에도 아직 말할 기회가 있고, 들어줄 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누군가는 스위스 난민처럼 나를 볼 것이다. 나의 사지 근육 불구와 인공호흡기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그런 상상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살을 원하지 않는다. 자살과 안락사는 죽음을 뜻하지만, 소설처럼 기막힌 이야기라 할지라도, 생을 놓고 싶지 않다. 삶이 고통일지라도..
이 질환은 단지 의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태도이자 존재의 방식이다. 근육 하나가 꺼져갈 때마다 우리는 묻는다. 이 존재의 숨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숨을 어떻게 받아안을 것인가? 정답은 단 하나다. 함께 숨 쉬는 것.
들숨과 날숨 사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너지지 않는 의지와 여전히 타오르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