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의 나에게서 온 보물 수첩
고등학교 때부터 좋은 글귀가 생각나면 끄적이던 낙서장 같은 메모 수첩이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지는 마음을 담아내기 위해 내 분신처럼 항상 함께였던 파랑 수첩이었다. 더 이상 마음이 나를 찾지 않게 되자 수첩 또한 열어볼 일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어떻게'라는 것도 없이 기억에서 잊혀져 버렸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글감이 부족해지자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그 수첩이 생각났다. 그 수첩이라면, 나의 많은 것들을 담아냈던 그 파랑 수첩이라면 보석 같은 글들이 많이 숨어져 있었을 텐데... 아쉽고 또 아쉬웠다.
오늘 우연히 위장약을 찾으러 주방 찬장 문을 열다가 툭 떨어지는 수첩을 보았다. 낡고 푸른 수첩.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언젠가 아이가 예쁜 수첩이라고 갖고 싶다길래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놓는다며 찬장에 넣어두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아이에게서 멀리 떨어뜨리려다가 내 기억에서도 잊혀져 버린 셈이다. 수첩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귀퉁이가 헤졌고 색도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오랜 친구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것 마냥 반가우면서도 지나간 세월이 한스러워 온갖 변덕스러운 마음이 오고 갔다.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써 내려간 수첩은 집중해서 바라보지 않으면 글씨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나이 든 만큼 수첩 안의 글씨가 꼭 주름 든 것 마냥 나이 든 것처럼 보였다. 어떤 글들이 쓰여져 있을지 궁금했지만 꾹 참아 보고자 했다. 글감이 떨어질 때마다 하나씩 열어보리라 다짐했다. 나는 이 파랑 수첩이 보물지도라도 되는 줄 알았나 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수첩을 열어보았다. 어떤 보석들이 숨겨 있을지 너무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앞에 몇 장만 들추었는데도 부끄러워 혼이 나갈 지경이다. 글 좀 꽤나 썼던 나라고 기억했던 건 나만의 허상이었나 보다. 이런 걸 글이라고 썼냐며, 그때의 내가 지금 눈앞에 있다면 잔소리를 퍼부었으리라. 이것으로 나의 보물지도는 가짜가 되었다. 고3이라 불안했던 마음, 도망치고 싶은 마음, 친구 이야기, 사랑이야기(정작 모태쏠로였으면서)가 대부분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그 시간에 볼 수 있는 세계의 모든 것을 담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마흔이 된 지금 그 글들을 읽으니 얼굴이 화끈거려 미칠 지경이다. 부끄러움은 누구의 몫인가. 그 시절 써 내려갔던 많은 글들 중에는 나를 부정하는 글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에 숨은 그림 찾기라는 내용의 글이 눈에 띈다.
<숨은 그림 찾기>
내 삶은 조각조각 찢겨졌다.
삶의 파편들이 하늘을 올라 멀리멀리 흩날린다.
나는 그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조각들을 찾아 무모한 도전 길에 나선다.
그 길에서 수많은 좌절과 패배를 만나리라.
교묘하게 잘도 숨은 조각들은 금방 들키기라도 할까 점점 더 깊숙이 몸을 숨긴다.
나의 인생은 숨은 그림 찾기다.
자신의 모습을 떳떳이 내세우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그늘 속에 숨어버리는
숨은 그림.
무엇 하나 정해져 있는 것이 없고, 스스로 찾아야 하는 현실. 고3 때였으니 수능에 대한 심적 압박이 몰려왔을 것이다. 공부도 안 했던 것이 스트레스는 받아서 고3 가을에 10kg이 빠졌더랬다. 무척이나 예민한 감정을 지니던 나였는데 지금의 나는 많이 무뎌졌나 보다. 나의 살들이 그리 말하고 있다. 이 글이 눈에 띄었던 건 내 삶이 찢겨져 숨은 그림이 되었는데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숨은 그림을 얼마나 잘 찾아왔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열여덟 살의 나에게 묻고 싶다. 삶이 조각난 걸 알았던 너는 지금껏 무엇을 해왔느냐고.
인생이 숨은 그림 찾기가 아니라 퍼즐이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숨겨진 그림을 찾느라 눈이 시뻘게 질 일이 아니라 만들어진 틀 안에서 남은 퍼즐을 이리저리 대보다 보면 어느새 맞춰져 있는 퍼즐처럼 지금의 삶보단 조금 나아지려나.
내게 남은 숨은 그림이 몇 개인지 얼마나 많은 기회가 주어질지 인생이 게임처럼 느껴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