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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몽 Dec 10. 2020

우리 집엔 신박한 똥강아지가 산다.

신박함은 갱신 중



우리 집엔 신박한 똥강아지가 살고 있다. 그것도 둘이나 말이다. 부모는 자신이 자라오면서 부족했던 점을 아이들에게 바라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내가 자라면서 창의력이 가장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만은 자유롭고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를 했으면 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수용해주려고 하고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한다. 많은 책들에서도 말하듯이 엄마의 귀찮음 때문에 아이들의 놀이를 막는 건 아닌지 생각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할 일은 사고(?) 치는 것이고 수습은 부모가 하는 거라는 신랑의 육아관 덕분에 나 또한 예민한 엄마에서 많이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포기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던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옷이다.


예쁘게 입히고 싶은 엄마 마음과는 달리 우리 집 아이들은 유난히도 옷에 미련이 없다. 나는 특히나 옷에 얼룩지는 것을 못 견뎌했는데 내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낼 때는 백발백중 옷에 문제가 생겼을 때다. 옷에 물감이 묻었던지, 슬라임이 묻었던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생겼을 때 등등. 얼룩이 있는 옷을 아이들이 입고 외출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갈아입을 옷도 바리바리 싸들고 다녔다. 음식을 먹을 때는 항상 턱받이를 받쳐 주고 옷에 흘릴까 안절부절 하지 못한다. 예쁘고 비싼 옷을 가득 사 왔지만 아이가 옷에 뭐라도 묻힐까 염려되어 입히지를 못하고 거의 새 옷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좋은 옷들을 내 아이들이 입기를 원하는 건지 곱게 관리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위함인지. 나는 목적에 어울리지 않는 쓰임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옷에 대한 미련을 놓기 시작했다. 처음엔 힘들었다. 여전히 옷이 신경 쓰이며 얼룩지는 옷들에 마음 아파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옷들보다는 실용적인 옷들을 찾게 되었다. 아이들이 입는 옷이 아이들을 나타내 주는 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서서히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에게서도 쓸데없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회사를 다니던 20대 시절엔 점심에 먹은 짬뽕 국물이 옷에 튀어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왔던 적이 있다. 옷에 조금이라도 뭐가 묻으면 당장 화장실에 가서 지우고는 했다.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며 살던 그때는 나를 나타내는 비중이 가장 컸던 옷가짐에 심혈을 기울였던 거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에게 마지막까지 쉽게 벗어나지 못한 것도 옷이었던 듯하다. 첫째는 그 과도기를 함께 겪었기에 옷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둘째는 태어났을 때부터 허용되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신박함이 도를 넘는다.


첫째의 신박함 중의 하나는 가위질이다. 다른 친구들보다 소근육이 약해서 가위질을 느리게 시작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가위질의 신공을 보일 정도이다. 그녀의 가위질은 가끔 본인의 머리카락으로 향하기도 한다. 청소할 때 보면 어느 구석에 숨겨진 머리카락 한 움큼을 발견할 때가 있다. 길게 잘려진 머리카락을 처음 마주할 때의 그 소름 끼침은 아직도 생생하다. 가위질도 어찌나 잘하는지 머리카락이 잘린 걸 아이를 봐서는 알아채지 못했다. 요즘은 머리카락에 더해 옷을 자꾸 자른다. 처음엔 잠옷을, 그리고 요즘같이 팬티바람일 때는 본인의 팬티에 가위 집을 낸다. 처음엔 욕구불만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인가 생각했다. 아이의 스트레스가 극도로 올라서 표출되었나 싶었다. 아니, 그건 그냥 호기심이었다. 내 물건이고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다. 어릴 때부터 물건 하나를 골라도 아이의 의견을 많이 물었던 터라 본인의 행동에 대한 자존감이 대단하다.


둘째의 신박함은 계속 갱신 중인데 아무래도 언니가 있어서인지 배우는 것도 빠르고 독립심이 강하다. 어제는 신박함의 최고를 찍었던 날이다. 요즘 변기에 앉는 재미를 붙여서 쉬가 마려우면 변기에 앉으려고 한다. 변기에 볼 일을 보는 것도 아니다. 미리 일 처리를 끝낸 상태에서 앉는 듯했다. 설거지를 마치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둘째가 기저귀를 벗은 상태로 서 있었다. 순간 멈칫하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 아이는 왜 기저귀가 벗겨져 있는 거지? 내가 벗겨준 적이 있던가? 기저귀가 없는 상태에서 쉬라도 하게 될까 봐 나는 급하게 아이를 붙잡고 기저귀를 입혀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 둘을 데리고 집안일이 산더미인데 일 하나를 더 하고 싶지 않았다. 무사히 기저귀를 장착시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에 들어갔는데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침대 위에 곱게 벗어진 기저귀와 이불 주변의 축축함. 아이는 침대에서 기저귀를 벗고 곱게 쉬를 하고 나온 상태였다. 이불을 벗겨내면서 극도로 화가 났지만 기저귀를 벗고 쉬를 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날따라 늦게 퇴근한 신랑을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신랑은 언제나 그러하듯 똑같은 말을 한다. “그럴 수 있지. 그럴 나이지. 이 똥강아지.”





나는 솔직히 모성애가 있는 편은 아니다. 달라붙는 아이들을 밀쳐내기도 하고 모진 말도 많이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내 새끼가 가장 예뻐야 하는데 못생기고 단점만 눈에 들어왔다. 그에 비해 신랑은 아이들에게 무한 사랑을 주고 있다. 아이의 발달에 따라 걷고 뛰고 심지어 하품을 해도 뭉클함이 올라온다며 눈물을 짓는다. 나의 모성애는 그런 신랑의 모습을 보며 학습되어진 거다. 옆에서 꾸준히 아이들에 대한 좋은 평가를 해주니 나도 세뇌당한 듯 아이들이 예뻐 보이고 아이들의 행동이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사고를 칠 때도 “그럴 수 있지. 그럴 나이지. 이 똥강아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내공이 부족하여 먼저 화를 낸 후이지만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태도에 있어서도 신랑과 나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매사에 지적을 당했던 나와 항상 칭찬을 받았던 신랑이었을 거다.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무한 신뢰를 주는 신랑의 태도에 가끔은 질투가 난다. 내 아이지만 참 행복할 아이들에게 말이다. 오늘은 또 얼마나 신박함을 보여줄지 참 기대되는 아침이다. 급하게 마무리. -끝-



신박한 똥강아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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