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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몽 Dec 07. 2020

맑고 고운 소리_당근당근

비움의 시작

미니멀 라이프는 둘째치고 사람 사는 집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만 그러할 뿐 드림과 비움과 판매할 것을 나누다가 에잇 귀찮아! 다시 그들만의 공간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매일 새벽 글쓰기를 하면서 하루 종일 잠과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보니 집 안은 자연스레... 개판 난장판..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 펜트리 공간부터 정리를 하기로 한다.

우리 집 펜트리가 이렇게 넓었던가? 짐을 빼도 빼도 끝이 없다. 우선 아기용품부터 비우자. 둘째가 다음 달이면 두 돌인데 아직도 바구니 카시트가 집 안에 있다니! 돌이 되자마자 분유를 떼었건만 관련 용품이 쏟아진다. 셋째를 낳을 셈이야?! 아니! 그건 안되지! 비우던 드리던 무조건 물건을 다 빼기로 했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정리란 그 공간에 어울리지 않을 물건을 먼저 빼면 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펜트리에 가득 쌓여 물건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도 없던 공간은 조금씩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꼭 있어야 할 물건들로 왼쪽에는 개인용품을 오른쪽에는 생활용품을 정리했다. 다 정리하고 보니 이것도 더 비울 수 있을 거 같기는 하다. 겨울을 대비해 사들인 마스크가 두 칸이나 차지하고 털실이며 꽃 재료들이 4칸을 차지했다. 그리고 칼림바 빈 박스들이 한 칸을 빼곡히 차지했다. 아직 멀었다. 마음까지 비우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이제 첫 발을 들였을 뿐이니까.

펜트리에 공간이 생기니 작업방을 치울 여유가 생겼다. 작업방 또한 온갖 재료들과 책이 쌓여 있어서 정말 딱 작업공간만 겨우 확보하고 있는 수준이다. 스토어를 재정비하면서 무엇을 할지 아이템이 뾰족해지긴 했지만 그동안 사들인 온갖 재료들이 아까워서 차마 버리지를 못했다. 언젠가는 사용하겠지, 어떻게든 필요하겠지 등등. 나만의 그럴듯한 핑계를 합리화시키며 다 끌어안고 있는 중이다.






어느 정도 정리된 듯싶어서 당근 마켓을 처음 이용해 보기로 한다. 진작에 앱을 깔고 가입은 했었지만 첫 시작이 어려웠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펜트리에 있던 물건들을 빼서 한없이 쌓아두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판매하자니 귀찮아서 하나둘 무료드림으로 당근 마켓에 물건을 올려 보았다. 올리자마자 "당근당근" 울리는 그 소리가 어찌나 짜릿하던지! 카톡 소리보다 더 경쾌하다. 무료드림이니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반응이 온다. 당신의 근처. 이름도 참 잘 지었다. 물건을 가지러 오는 사람은 가까워서 좋고 물건을 내어주는 사람은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어서 편하다. 하루 만에 3개의 물건이 거래가 성사되었다. 그중 한 명은 알고 보니 아파트 단지 내 주민이었다. 같은 상품을 입주민 카페에도 올렸는데 당근 마켓에서 거래가 되었다. 이젠 입주민 카페보다 당근 마켓을 더 자주 이용하게 되는 시대인가 보다. 내가 시대 흐름에 맞추지 못하고 살았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당근 마켓은 서로 알지 못하지만 요즘 같은 비대면 시대에 시간 약속만 하고 문 앞에 두면 서로 깔끔하게 거래가 성립된다. 특히나 당근 마켓의 시스템이 특별해 보였던 것은 판매자의 평을 온도로 표현했다는 것. 사기의 위험성이 있는 중고거래에서 사람의 온도차는 무언가 신뢰를 갖게 했다. 드림을 완료하고 나니 상대방에 대한 평가를 작성하라고 나온다. 판매자뿐만 아니라 구매자도 평가를 하는 신박함이라니! 이래서 다들 당근당근 했었나 보오. 나에겐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지 못해 내어 준 건데 물건을 가져가는 사람들은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내 물건 자리에 다른 물건을 두고 간다. 아기 카시트를 내어줬더니 아이들 음료 한 박스를 두고 사이즈가 너무 커서 처치 곤란했던 이불 건조대를 내어주었더니 마스크 한 박스를 놓고 간다. 이건 비우는 건가 들이는 건가. 택배거래를 하는 중고나라와는 달리 사람 대 사람이 거래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물건을 내어줄 때도 그냥 주지 않는다. 내가 사용했던 것보다 더 깨끗하게 닦고 이상이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을 한다. 당근당근! 그 소리가 어찌나 맑고 고운지 항상 무음 상태였던 핸드폰 소리를 켜놓고 물건을 또 올릴만한 게 있나 집안을 스캔하고 있다.

당장 공방을 계약할 수 없어서 작업방을 공방 환경으로 바꾸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필요에 의해 조금은 빨리(?) 비움을 실천하게 되었다. 비우고 나니 또 채울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초보 비움러지만 하나둘 정리하다 보면 처음 이사 왔을 때의 상쾌함을 느낄 날이 오지 않을까. 나도 랜선 집들이 해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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