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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몽 Nov 21. 2020

엄마에게로 가는 길

가깝고도 먼 길

어제는 3시간의 줌모임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아이 둘을 데리고 긴 시간 집 안을 이동하며 모임에 참여한다는 것은 마음만큼이나 체력도 달리는 싸움이었다. 둘째는 눈을 뜬 순간부터 엄마에게 매달려 조금만 발이 땅에 닿으려고 하면  자지러지게 울었다. 첫째는 혼자 노는 듯싶더니 이내 심심하다 아이스크림 달라 요구사항이 많아진다. 겨우겨우 전쟁 같은 3시간을 보내고 둘째를 재우러 침대에 누웠다. 그때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 타이밍 기가 막힌다. 나도 모르게 한 숨이 흘러나왔다.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전화를 안 받으면 몇 번이고 계속 전화를 하다가 신랑한테 연락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인 둘이 사는 부모님에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갖은 채 살고 싶지는 않아서이기도 하다.

“여보세요.” 지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의 첫마디. “그냥. 심심해서 전화했어.”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엄마가 야속할 때가 있다. 그렇게 심심하면 가까이 살면서 나 좀 도와주면 좋으련만 2시간 반 너머의 거리에서 우리 집 딸년들은 애정이 없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자식을 더 낳으라고 한다. 둘만 있으니 전화할 데가 마땅치 않다고 말이다. 정작 친정에 가면 엄마는 뭐가 그리 바쁜지 앉아서 눈 마주치고 이야기할 틈이 없다. 그런데 전화만 하면 2시간은 기본이다. 아이 둘을 키우는 애 엄마로서 2시간을 전화기만 붙잡고 있는 것은 솔직히 시간이 아깝다. 그 시간에도 아이들은 계속 나를 찾고 둘째는 칭얼거린다. 엄마와 통화하면서 아이들을 상대하는 나는 통화에 집중도 못할뿐더러 달라붙는 아이들에게까지 신경이 곤두세워진다. 엄마에게는 그럴듯한 맞장구를 쳐줘야 하고 아이들의 요구도 들어줘야 한다. 엄마는 통화를 하면서 아이들과 대화를 하는 나에게 말을 건성으로 듣는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면 전화를 끊을 법도 한데 그렇게 2시간 이상을 버티고 있다. 통화내용이 중요하지도 않다.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다.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 외삼촌과의 일, 아빠와 싸운 이야기, 옛날에 싸웠던 이야기, 할머니의 시어머니 갑질 이야기. 그러다 마지막은 항상 내가 사고 친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는다.






엄마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동네 주민들과 종종 다툼을 일으킨다. 엄마는 사람보다도 짐승에게 마음을 주는 편인데 애완견을 키우던 우리 집과는 달리 시골 동네 주변에서는 집 지키기용 큰 개를 밖에서 키우고 있었다. 엄마는 유독 주인이 개를 때리는 소리를 못견뎌했다. 개가 낑낑거리며 신음 내는 소리에 히스테리 적으로 반응을 보인다. 엄마는 그 사람들이 개를 얼마나 못살게 굴었는지에 대해 전화로 상세하게 설명을 한다. 그러면 나는 그 모습들이 상상되어 미칠 것 같다. 엄마 또한 어디 하나 말할 곳이 없어서 나에게 풀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안에 꽁꽁 쌓아두었던 것을 입 밖으로 내보내버리면 가슴속의 찌꺼기가 조금은 사라지니까. 그렇다고 내가 엄마의 감정 찌꺼기를 받아내는 쓰레받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 또한 엄마만큼 예민한 사람이라 전해 듣는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면 나 또한 그 감정 찌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쏟아낼 수밖에 없다. 그 대상은 아이들이거나 신랑일 수밖에. 엄마의 감정 때문에 내 가정이 흔들리는 걸 원치 않았다. 엄마는 지금 살고 있는 아빠가 태어나 자란 고향집을 떠나고 싶어 했고, 아빠는 머무르기를 원했다. 엄마는 하루라도 못살겠다며 따로 집을 얻어 나가 살고 싶다며 돈을 모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돈을 막내딸인 내가 홀라당 다 먹어버린 거다. 그러니 아빠와 다투거나 동네에서 문제가 생기면 엄마는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사 갈 돈을 막내 딸년이 없애 버린 것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전화가 불편하고 두렵다. 어차피 좋게 끝낼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엄마에게 집에서 개 우는 소리를 다 듣고 있지만 말고 나가서 활동을 하라고 말을 했다. 그러면 엄마는 똑같은 반응이다. 원래는 활발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는데 너희 아빠가 못하게 발목을 잡아놨다고. 그래서 지금은 나갈 곳도 없고 그런 성격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반협박도 더한다.


“이렇게 집도 해결 안되고 아빠랑 대화도 안되고 그러면 난 죽어버릴거야. 나는 사는 데 미련도 없고 가진 재산도 다 사회에 환원하고 말없이 죽을거야.“


이게 딸한테 할 소리인가.


“언제까지 아빠 핑계만 대고 살거야?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언제 죽을지도 모를 나이에 내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면서 살아야지. 나도 지금 죽고 싶은 마음 없애려고 아등바등 살고 있는 거야. 내가 왜 엄마 전화도 안받고 안하는 줄 알아? 내가 싫어서, 난 내가 너무 싫어!! 나 4월에 애들 데리고 죽으려고 집도 나갔어. 그런데 죽을 수가 없잖아. 그래서 살라고 살아보려고 이렇게 바쁘게 사는 거라고. 엄마는 왜 그렇게 살아? 엄마도 뭐든 해보면 되잖아. 왜 안해보고 못한다고 아빠 핑계만 대고 있어?”


나도 모르게 감정이 올라 엄마에게 퍼붓고 있었다. 울부짖었다. 말을 하다 보니 눈물이 났다. 내 감정에 내가 깊이 빠져 나 혼자 허우적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니까 네가 모자라다는 거야.”


엄마는 담담하게 한 마디를 했다. 마침 큰 아이 하원 시간이 다가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아이를 데리러 나가는 길에 아무래도 엄마가 걱정이 되었다. 항상 언니랑 싸우고 나면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누워 며칠이고 우울해하는 엄마였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애써 괜찮은 듯

"엄마는 내가 이런 말 해도 아무렇지도 않지?”


엄마는 그냥 “충격받았지.”라고 말을 했다.


그 날 주변에 이사 갈 집이 있나 보러 간다고 했었는데 괜스레 나 때문에 마음 상해 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잘 다녀왔더랬지만...

그 날 이후 엄마는 내게 전화를 자주 하지 않는다. 엄마는 무언가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진을 찍어서 나에게 보낸다. 이거 찾아봐라.라는 문자와 함께. 브랜드도 모르고 누군가 들고 있고 입고 있는 사진 한 장 보내며 나보고 찾으랜다. 그랬던 분이 그 날 이후 나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미안한데, 고맙다 라는 표현을 한다. 마치 남처럼. 엄마 당신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죽을 거라고 말하면서도 딸인 내가 죽는 것은 못 보실 모양이다.






그날도 그랬다. 내가 오피스텔 전세금을 빼서 사업에 투자하고 1억을 다 날려먹었다고 한 날도 엄마는 내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전화는 꼭 받으라고 했다. 전화 안받으면 당장 올라온다고. 내가 죽어 버릴까봐 말이다. 내가 엄마를 불편해하는 건 그 때문이다. 갚지 못한 빚이 있어서. 사고 치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결혼을 택했다. 집은 날려 먹고 부모님과 살면서 구박받으며 살기는 싫고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결혼뿐이었다. 그 풀지 못한 감정이 우리 사이에는 남아있다. 아빠는 내가 돈을 날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없이 배낭을 들고 집을 나가셨다. 이틀 동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단 한 번도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사과도 드리지 않았다. 그것이 내겐 체한 듯 가슴에 얹혀있다. 그렇게 죄인인 듯 아닌 듯 살고 있는데 엄마랑 통화하면 꼭 마지막엔 그 돈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거다. 사람이 양심도 없지 잘못은 내가 해놓고 그 말은 또 듣기 싫다. 엄마는 내가 죽어버리려고 했다는 그 이야기를 들은 날부터 지금까지 더 이상 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조심하려고 한다. 어제 3시간 강의 후에 전화를 받았을 때 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는지 눈치껏 빨리 끊으려고 하셨다. 그러면서 마지막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는 거 금방이야.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재미있게 살아. 살아보니 인생 빠르더라. 나는 이제 곧 70이라 할 수가 없어.”

나는 엄마의 단 하나의 꿈을 빼앗은 죄인이다. 엄마는 개 우는 소리가 꼭 죽은 딸의 우는 소리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먼저 떠난 가슴속에 묻은 딸. 어린 나이에 아팠던 딸. 부모가 부족한 탓에 지켜주지 못해서 떠나간 딸이 우는 소리라는데 뭐라 할 말이 있겠나.

나에게 엄마는 풀지 못하는 숙제다.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콱 막힌 듯 답답하지만 너무나 보고 싶다. 말할 수 없이 엄마 품이 그립다. 엄마에게 돌아가고 싶은데 길을 찾을 수가 없다. 늦지 않게 돌아가야 해서 마음이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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