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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몽 Jan 05. 2021

나는 외딴섬에 살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

집을 떠나 본가에서 꽤 오랜 시간을 지내고 왔다. 지방이 고향인지라 결혼 전부터 긴 연휴는 당연히 집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고정관념(?) 같은 것이 잡혀있는데 우리 부부 둘 다 같은 지방 출신이기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본가로 향했다. 바쁜 일상을 뒤로한 채 집을 떠나갈 때만 해도 나는 오랜만의 휴식에 들떠 있었다. 글쓰기에 방해가 될까 봐 읽지 못했던 책들을 마음껏 읽으리라 다짐도 했다. 하지만 서서히 나만의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이의 세상을 들여다보고 다른 이의 글들을 읽다 보니 타인과 비교하는 그놈의 몹쓸 지랄병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결국 연휴 내내 우울해하고 왔더라는 것이다.


한동안 나만의 글쓰기에 빠져있을 때는 글을 쓸수록 뭔지 모르게 신이 났다. 많은 이야기를 토해내는 것도 아니면서 매일매일 글을 쓰는 행위에 도취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고 내 글에 반응해주면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 마냥 행복했다. 그런데 글쓰기를 멈추고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면서 내 글이 참 형편없다는 좌절감에 빠지고 말았다. 와, 이런 글솜씨로 이제껏 글을 썼다는 거야?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수순일 거다. 이럴 것을 알기에 글 쓰는 동안 철저히 다른 이의 글을 읽지 않았고 세상의 반응에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어떠한 결과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나는 완성도 있는 작품 같은 글을 원했던 거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스토리도 대단해 보이더구먼 빌어먹을 나는 그마저도 없다. 너무나도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 글을 쓸수록 부족한 글감과 몹쓸 필력이 발목을 붙잡는다. 그럼에도 무언가 쓰고 싶다. 이 놈의 지랄병. 고독하고 또 고독하다.








그림책 『 아니의 호수 』에 나오는 아니는 딱 내 모습과도 같다. 치렁거리는 긴 머리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드레스. 외딴섬에 홀로 지내며 자신과 닮은 사람을 기다리며 무료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아니는 20대의 내 모습과 흡사하다.



20대 때의 나는 세상 고민을 다 가진 것 마냥 얼굴은 그늘지고 웃음기가 없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턱선이 칼날 같아서 항상 예민하고 우울해 보였다. 하루는 집에 놀러 온 언니의 친구가 나를 걱정할 정도였다. 비관적이고 회의적이었던 내가 변하게 된 건 아니가 자신의 섬을 나와 죽기로 결심했을 때와 비슷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아니가 거인을 만난 것처럼 나 또한 신랑을 만났다. 그리고 한 없이 웃게 되었다. 그의 과하지 않은 유머가 좋았다. 좋았지. 좋았더랬지.


지금의 그는 여전히 유머러스 하지만 풍자스러움에 가깝다. 마치 개그맨들이 정치인을 직접적으로 깔 수 없어 풍자하듯이 그 또한 돌려 까기 선수다. 연애시절엔 한없이 다정하고 내 말이면 모든 것을 바꾸려고 노력했던 그가 결혼하자마자 현실적인 남자로 바뀌어 버렸다. 살아보니 그는 언제나 현실적이었고 연애 때의 모습은 내가 보고 싶었던 것만 보았던 그의 단면적인 부분이었다. 힘들었을 그때 그는 나에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그 때문에 웃었고 그 때문에 몇 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다.


"왜 변한 거야?"


요즘 내가 그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둘 중 하나는 현실적이어야 할 거 같아서"


그의 답변이다.


현실적이되 상처 받지 않도록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해주길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결국 나는 외딴섬에서 탈출하는 건 성공했지만 또 다른 섬에 갇혀버렸다. 외롭고 긴 터널 같은 이 곳에서 그때의 그처럼 나를 안아주면 참 좋으련만 그에게는 나보다 더 사랑하는 두 딸들이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보지 말고 너의 인생이나 잘 살라고, 너의 인생만큼 더 소중하고 빛나는 건 없다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너의 지금이 더 궁금하고 기대된다고... 말해주진 않겠지? 


"잘 알고 있네!"


이것이 백발백중 그 다운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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