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빗장

꺼내지 못해 썩어가는 이야기

by 슈몽

나는 참 감정적이면서도 감정 표현에 서툴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무표정인 아이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돌 사진에 있는 나는 어딘가 모르게 뚱한 표정이다.


내가 감정 표현에 서툴다고 처음 느낀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그 시절 단짝으로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오늘 신나게 놀고 다음 날이 되면 그 친구가 먼저 인사를 건네기 전까지 말을 걸지 못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했을 때 친구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까 두려웠던 거다. 어린 마음에도 그 민망한 시간을 차마 허용할 수 없었다.


나는 자라면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너무도 싫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감정을 수치심 하나로 단정 지었던 거 같다. 민망함도 수치심, 부끄러움도 수치심, 당황스러움도 수치심. 누군가 내게 그것은 수치심이 아니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조금 나아졌을까? 가끔 TV에서 슬픈 드라마나 병과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다. 다른 사람과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올만한 장면에서 나는 사이코패스 마냥 웃고 있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할 때도 애써 다른 이야기로 전환하고는 한다. 혼자 있으면 터져 나오는 눈물을 다른 사람 앞에서는 보일 수가 없다. 내가 강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눈물을 흘리는 내가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했을 뿐이다.


학창 시절 한창 사춘기일 때 감정이 예민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루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이 났다. 방문을 잠그고 울고 있으니 엄마가 방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이냐며 다그쳤다. 금방이라도 문을 부서 버릴 듯 화 내시는 바람에 나는 울면서도 문을 열었던 기억이 난다. 그냥 혼자 울고 싶었을 뿐이다. 그 기억 때문일까? 나는 엄마 앞에서는 아직도 울지 못한다.


감정표현에 서툴다는 것은 때론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중학교 친구 중에 함께 놀면 신나고 재미있던 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유독 본인의 이야기를 아끼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내 속마음을 다 끄집어냈는데 그 친구는 들어만 줄뿐 자신의 속 사정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서운하기도 했고 뭔가 나만 치부를 드러내는 거 같아 불안하기도 했다. 동조하지 않으니 나만 나쁜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사람들에게 많이 듣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친구와 비슷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꽁꽁 숨기지 말고 얘기 좀 해줘.”


사실, 뭐 거창한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말할 거리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나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의 업적과 정보를 알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내가 그들에게 말해줘도 그들은 나를 이해하기보다 때로는 안도의 한숨을, 때로는 불필요한 정보를 버리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그래서 더 이상 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그 친구도 나에게 그런 마음이었을까? 내가 진정한 친구로 다가서기보다 ‘나의 비밀을 하나 이야기했으니 너의 비밀도 하나 내어놓으렴’으로 들렸을까? 그 친구는 대학교 때 우연히 같은 과로 다시 만나 3년을 매일같이 붙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불신으로 인해 4학년 때 절교 아닌 절교를 하게 되었다. 그때도 나의 큰 비밀(그땐 크게 느껴졌다)을 알고 있는 친구가 다른 곳에서 발설할까 두려웠다. 내가 배신당할까 봐 친구에게 참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 대학을 졸업 후 나이가 어느 정도 차올라 결혼을 할 때쯤 우리는 우연히 연락이 닿았다. 1년에 한 번쯤은 만나고 가끔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예전처럼 편한 친구이지는 않았다. 깨진 컵을 억지로 붙여놓은 것 마냥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 지금은 친구가 결혼하며 캐나다로 넘어가 사는 바람에 연락도 만남도 모두 끊긴 상황이다. 그때 왜 그랬는지 미안하다 사과할 준비가 되었는데 연락이 닿을 방법이 없다.








그림책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벽장에 꼭꼭 쌓아두기만 하는 아이가 나온다. 이야기라는 것이 본래 흐르고 흘러 사람을 타고 시대를 타서 전해 내려오는 것인데 아이가 들은 이야기들은 주머니에 담아 벽장 속에 가두어 두기만 하니 이야기들이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아이가 자라 장가를 가게 되는 날 벽장 속의 이야기들은 아이를 헤칠 생각을 한다. 그 계획을 우연히 들은 머슴 하나 덕분에 아이는 무사히 목숨을 건지며 벽장 속의 이야기들을 모두 풀어준다.



이 그림책을 읽고 아이의 벽장이 내 마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의 감정들을 꺼내어놓지 않으니 내 안에서 썩을 대로 썩은 채 독이 되어 버렸다. 그 악취가 어찌나 심한지 사람들도 나를 피하는 것 같다. 소통이 어렵다 하면서도 정작 내가 소통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내 안의 감정들이 넘치고 넘쳐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 속 이야기들처럼 나를 헤치려 들기 전에 내 가슴속에 꼭꼭 잠가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야만 한다.


마음속에 담아놓은 것들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감정에 치이고 치여 내 멋대로 가공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감정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내가 느꼈던 많은 감정들을 수치심이라 단정 지었던 나는 여전히 수치심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직도 반갑게 인사하는 것이 어색하고 미안하다는 말이 서툴기만 하다. 마음의 빗장을 열어 케케묵은 감정들이 쏟아져 버리지 않도록 조금씩 속도를 조절하려 한다. 그러니 더딜지라도 조금만 기다려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