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흔한 말

삶과 죽음의 경계

by 슈몽

요즘 사기병을 쓴 윤지회 작가의 인스타 피드를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그녀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살고자 했던 수많은 외침을 뒤로하고 이제는 죽음을 담담히 기다리고 있다. 수많은 고통을 이겨내고 제발 죽여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고 나서야 스스로 죽음을 인정하게 된 듯하다. 다섯 살 아들과 조금만 더 살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은 아들에게 원숭이 인형을 손수 만들어주는 걸로 대신하게 되었다.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멀찌감치 바라보는 나로서는 그녀의 삶이 애잔하면서도 내게 남아있는 삶에 안도를 갖게 한다. 그것이 너무 치졸해서 힘내라는 말도 쉬이 전할 수 없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과 달리 나는 죽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한다. 처음 죽음을 생각했을 때는 내 인생이 한없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엄마가 없이 남겨질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죽고 싶다는 감정이 쌓이자 어느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면 죽어버릴까?로 바뀌어 버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너무 두려웠다. 홧김에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어느 순간 물음표(죽어버릴까?)가 아니라 느낌표(죽어버리자!)가 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살을 시도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죽어가는 순간에 살.고.싶.다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죽고 싶은 마음의 반증인 셈이다. 나는 죽고 싶은 걸까, 살고 싶은 걸까? 윤지회 작가가 얼마 전 메모장에 숨겨둔 글들을 쏟아낸 적이 있다. 그 글 중에서 나에게 일침을 가하는 듯한 글을 옮겨 적는다.

『사람들은 나름의 경계를 정하고 그 안에서 안도를 느낀다. 그리고 불평불만들을 쏟아낸다.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자처하며 불특정 다수와 끊임없이 비교한다. 성장해야 하는 강박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기준이라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말이다. 그래서 행복하다면야 땡큐지만 대부분은 만족하지 못하고 누구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보니 가끔씩 생각한다. 나 같으면 건강 걱정 없이 어떤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듯이 행복할 준비가 되었는데… 늦어버렸네.』

늦어버렸네. 이 한 마디로 나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죽음 앞에서 내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나에게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도 글이 생각만큼 써지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을까?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를 시점에 아이들을 내팽개치고 내 일만 붙잡고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참 간단한 것들을, 남들에게는 잘도 대는 잣대를 나에게만은 예외로 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죽음이란 굳이 경계를 정하지 않아도 항상 우리 곁에서 함께 한다. 내가 죽어버릴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에도 죽음은 나와 함께 한다. 섬뜩한가? 그만큼 죽음은 삶의 일부이다.








그림책 『내가 함께 있을게』에서의 주인공은 오리다. 언젠가부터 오리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존재를 알게 된다. 해골의 몰골로 긴 외투를 걸친 그는 자신을 죽음이라고 소개했다. 드디어 알아챘구나!라는 말과 함께. 오리는 죽음이 두려웠지만 죽음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다. 좋은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오리가 숨을 쉬지 않는 순간이 오자 죽음은 오리의 까칫까칫 일어난 깃털을 정리해주고 검은 튤립과 함께 강에 띄워 보낸다. 조금 슬펐지만 그것 또한 삶이다.


살면서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움 없이 바라보는 시기가 있을까 싶다. 유독 죽음을 가까이 느꼈던 사람은 죽음에 무던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독감주사를 맞고 사망했다는 노인 기사를 보고 친정에 전화를 드렸다. 독감주사를 차마 맞지 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혹시?라는 마음은 두려움에 떨게 했다. 친정아빠는 이미 전날 독감주사를 맞으셨다 하고 엄마는 다음 주에 맞는다고 했다. 조심스레 기사 이야기를 전했다. 엄마는 별 거 아니라는 듯 “그렇게 죽는 것도 좋은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내가 죽는 걸 모르고 죽는데 좋은 거야?” 나는 기가 막혀 되물었다. 엄마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죽는 걸 모르니까 좋은 거지.” 어느새 부모님 또한 죽음을 기다리는 시기가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잘 죽는 것밖에 없다고 농담 삼아 말씀하셨던 기억이 났다. 어쩌면 부모님도 오리처럼 가까이 죽음을 느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두렵지만 동행할 수밖에 없는, 언젠가는 당연하게 찾아올 친구처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겠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두렵기에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모른 채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당신들의 공간을 지키며 외딴집에 살고 계실 부모님 곁엔 죽음이 함께 하고 있다. 사람은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나 또한 수시로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부모님의 죽음은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다. 참 이중적이다.

반대로 부모님 또한 나의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으실 테다. 이미 자식 하나를 보낸 경험이 있는 부모님으로서는 그 끔찍한 경험을 또 하리라 상상도 하지 않으실 거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두렵지만 담담해질 시기가 온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것은 준비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살면서 한 번도 죽고 싶단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죽음의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의 죽음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보았을 거다. 우리 부모님처럼 그렇게 가면 호상이지 라는 마음으로 나만의 장례식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생각해보지 못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뤄두었던 감정들이 죽음과 맞닿으면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 무너지게 되는 거다.


죽음이 흔해질 때 삶은 비로소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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