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계절_11월

코 끝 시큰함을 아시나요

by 슈몽

어느덧 11월의 첫날이다. 11월의 시작을 알리듯 하루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11월은 한동안 내게 특별했던 계절이었다. 특별하다 못해 절절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흔히 말하는 가을 타는 여자가 바로 나다. 낙엽이 떨어지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 코끝이 시큰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러면 라디오에선 어김없이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OST 였던 박효신의 《눈의 꽃》이 흘러나온다. 그때인가 싶을 때 돌아보면 어느새 11월이 성큼 다가와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련의 아픔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한동안 힘들었을 때가 있었다. 7개월만 힘들어하자 생각하며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버티던 시절이었다. 11월에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저 버텨오던 힘든 날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11월이 다가오면 한동안은 힘들어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서도 2~3년은 그랬던 것 같다.


남편과 9년 동안 연애를 하고 나이도 조금씩 들어가면서 서서히 가슴 아팠던 가을은 내게서 멀어져 갔다. 코끝 시큰해짐도 사라졌고 길거리에서 《눈의 꽃》 노래가 흘러나와도 무덤덤해졌다. 내가 버텨온 시간들만큼 나도 부쩍 자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때의 내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11월에 그토록 아파했던 내가 말이다. 밑바닥을 박박 긁어가며 버텨내던 시절이었지만 고뇌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있었다. 이 시간만 지나가면 나는 잘 지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 그 시련의 시간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는 지금 내겐 어떤 기대와 희망이 있을까.


잊어버렸던 나를 찾고자 글을 써 내려간다. 사소한 기억 하나하나 모아서 나를 소환하고 있다. 그렇게 소환된 옛 추억은 오래전 헤어진 친구처럼 반갑지만 낯설기도 하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고단함이 느껴진다. 그곳엔 인생의 모든 고민을 다 끌어안고 살았던 20대 중반의 꽃다운 내가 있다. 마흔이 된 지금 그때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줄 알았더라면 그냥 좀 가볍게 털어버릴 걸.








그림책 『우리의 모든 날들』에서는 나를 둘러싼 사람, 시간, 장소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매일매일은 다르지만 모든 날들은 아름답다는 묵직한 울림을 준다. 낮이 지나고 밤이 오고, 맑은 날도 있으면 흐린 날도 있다. 계절이 변하듯 지금 살고 있는 곳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음을 느끼며 살라 한다. 너무 익숙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지금이 소중하다고 말이다.


일상을 추억으로 만들 수 있다면 하루하루 즐겁고 소중하지 않은 날이 있을까. 그렇게 버텨왔던 나의 20대를 나는 까마득히 지우고 살았다. 그러니 빈 깡통의 마흔을 만난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여전히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불안에 떠느라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놓쳐버린 과거를 찾겠다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런 미련한 짓이 어디 있을까. 스물의 나도 마흔의 나도,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임을 문득 깨닫게 되는 날이다.


2020년 내 마흔에 맞이하는 11월은 의도적으로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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