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오랫만이야.
오늘 개그우먼 박지선氏의 비보를 듣게 되었다. 온 가족이 감기에 걸려 종일 아이들 시중에 병원을 다녀오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단톡방에 쏟아지는 안타가운 기사를 보며 악플에도 건강하게 자신을 아꼈던 그녀가 생각나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얼마나 큰 상심과 고통으로 삶을 살아왔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은 그저 문장 한 줄로 표현되는 기사를 읽고 그녀를 판단해왔기 때문이다. 그녀와 함께 떠난 모친은 자식 가는 길에 동행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어떤 사연일지 가늠해보는 것조차 죄송스럽지만 나 또한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어 말을 꺼낸다. 먼 길을 떠나려는 내 자식을 설득시키지 못했다면, 혹은 이미 떠나버린 자식을 차마 혼자 보낼 수 없다면 나 또한 자식과의 길을 함께 가는 것을 택할 것 같다. 고되었던 삶의 마지막 길은 어미의 손을 잡고 편히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래 전 세상을 등진 대학 동기들이 있다. 동기들이라고 말한 것처럼 불운의 99학번 우리 동기 중에는 두 명이나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있다. 둘 다 너무나 유쾌하고 생동감이 넘쳤기에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들었던 그들의 소식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그 중의 한 명은 4학년 때 거의 붙어 다니며 서로의 집도 왕래하던 친구였다.
그 날은 점심시간을 마치고 오후 근무를 시작할 때쯤이었다. 양치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뭔지 모르게 느낌이 싸했다. 전화를 받는 순간 친구가 가버렸다며 울부짖는 친구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그리고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딜 갔냐고 물었더랬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나는 바로 조퇴를 하고 군산으로 내려갔다. 엄마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고, 소식을 들은 엄마도 함께 울었다. 누군가의 비보는 굳이 여러 말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전달되어진다.
졸업을 한지 몇 년이 지났지만 워낙 성격 좋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던 친구였기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러 온 손님들도 많았다. 친구 덕분에 오랜만에 모인 동기, 동문들은 뜸했던 소식을 전하며 친구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하고 있었다. 친구를 화장터로 보내기 전날 밤 꿈에 친구가 나왔다. 색동한복을 차려 입은 친구는 참 많이 힘들었노라 얘기했다. 졸업 후 야위었던 모습은 대학교 1학년 때의 탱글탱글하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효리의 눈매를 지닌 참 매력적인 친구였다.
친구가 떠난 후 나는 한동안 힘들어했다. 서울 집으로 돌아와서도 예민해진 탓에 한참을 울면서 지냈던 기억이 난다. 같은 대학을 다니면서 집도 가까워서 졸업 후에 집에 내려가면 꼭 만나는 친구였다. 하지만 술을 좋아했고 나와 결이 맞지 않는 부분도 있기에 열 번 중에 두 번 정도는 일부러 연락을 피하기도 했다. 언젠가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죽으려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내민 적이 있다길래 그러지 말라고 나 또한 지나가듯 말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한 번 그런 마음을 지닌 친구가 언제라도 다시금 결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그 때의 나는 하지 못했다. 친구가 죽기 전에 왜 한 번이라도 나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는지 그 부분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마지막으로 나를 찾았다면 나는 그 친구의 시그널을 알아챌 수 있었을까? 친구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너무 힘들어할 때, 헤어졌던 남자친구가 담담하게 말했다.(헤어진 남친도 그 친구를 알고 있었고, 그 때까진 연락을 하던 사이였다.)
“ 만약 네가 마지막 전화를 받았음에도 그 친구가 똑같은 결정을 했다면 너는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 거야. 그러지 말라는 그 친구의 마지막 배려였을지도 몰라. ”
참 어리석은 친구를 둔 덕에 쓸쓸히도 세상을 떠났겠구나.
그림책 『 잘가, 안녕 』에서는 자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동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른바 로드킬 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것도 모자라 도로에서 여기저기 치이는 불쌍한 인생들이다. 그런 동물들을 염하듯이 찢긴 상처를 곱게 꿰매어주고 미처 감지 못한 눈도 감겨주는 할머니가 있다. 죽은 동물들에게 정답게 말을 건네며 포근한 이불로 덮어주기도 한다. 마치 찢겨나간 육신과 영혼을 애써 위로하고 치유하듯이.
가끔은 자동차 창문 유리로 돌진해오는 새들이나 벌레를 보며 어리석게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우리의 매일 매일이 즐겁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 또한 매일 퍼덕이는 날개짓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했던가. 곱디고운 나이로 세상을 등진 나의 친구가 그러했듯 오늘 떠난 故박지선氏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그녀를 둘러싼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남은 우리는 동물들의 마지막을 함께 해 준 할머니처럼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동안 참 잘 살아왔다 토닥여주면 된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친구가 마지막으로 나의 꿈에 나온 적이 있다. 임신을 하면 악몽에 시달린다더니 어느 날 친구가 다른 사람들과 바삐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꿈에 나타났다. 나는 반갑다며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라고 말을 했다. 그 순간 그 친구는 나의 목을 팔로 감쌌다.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소스라치게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그 뒤로는 친구생각을 일부러라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을 잊고 네 인생이나 잘 살라는 친구의 마지막 배려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