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질 경력 22년
오늘은 나의 인생, 삽질이 전부였던 나의 마흔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의 삽질은 고3 때부터 시작되었던 거 같다. 적성검사를 하면 항상 나오는 직업군이 예술가, 심리학자, 작가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하고 싶어 했던 일과 맞는다. 나는 한동안 예술가의 삶을 동경했다. 자유롭게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삶. 오죽하면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이유가 사랑하는 남자가 혹시 예술가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내가 능력이 있으면 남자의 조건 따위 보지 않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 이런 말을 신랑한테 한 적이 있다.
“자갸, 그거 알아? 내 꿈이 백수 남편 갖는 거였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신랑은 말했다.
“왜~~~???”
“내가 능력 있으면 백수 남편하고도 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 꿈은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맘껏 하고 살 수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결혼하고 싶었어.”
“그래? 그럼 나 오늘부터 꿈 바꿀래. 내 꿈은 셔터맨이야. 난 자기가 꼭 잘 되었으면 좋겠어!!”
으이구. 나는 내가 평생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세상 멋지게 살아갈 줄 알았다. 지금의 뚱땡이 아줌마 모습으로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의 첫 번째 삽질은 고3 때였다. 수학을 잘했던 언니는 이과였다. 그런데 나는 누가 봐도 문과 체질이다. 글을 좋아하고 숫자와 싸울만한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언니가 이과 출신이라는 거 하나만 보고 나는 고2 때 이과를 지원했다. 친구들이 모두 너는 문과로 가야 하지 않냐고 뜯어(?) 말렸지만 문과 가면 취업할 곳이 마땅치 않다면서 이과를 고집했다. 역사와 지리에 약했던 것도 내겐 좋은 핑곗거리였다. 차라리 숫자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3 때 갑자기 하고 싶은 일이 생겼는데 하필 무대디자인이었다. 뮤지컬이나 음악방송을 좋아하던 나는 그 화려한 무대가 너무 멋져 보였다. 저런 일을 하고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꿈에 젖었다. 그런데 무대디자인학과를 가기 위해서는 미술대학에 진학해야만 했다. 그림은 전혀 그리지 못했던 내가, 그림에 소질도 없던 내가 단지 무대디자인학과를 가고 싶어서 고3 1학기 때 미술학원을 등록했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리던 전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님이 계셨는데 바로 나의 2, 3학년 때의 담임이었다.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이과에서 예체능으로 옮기고 싶다고 말을 했다. 선생님은 담담하게 안돼.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깡이었는지 교무실에서 선생님에게 대들다시피 이것은 내 인생이라고 말을 했다.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는 버릇은 그때부터였나 보다. 선생님은 당황하시더니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해주셨다. 그리고는 3개월 동안 미술학원을 다녔다. 처음 미술학원에 가서 죽도록 선긋기만 했다. 세로선, 가로선을 긋고 나니 조각상을 그리더라. 3개월 동안 선긋기와 조각상 하나 이것만 그리고 나왔던 듯하다. 그림은 내 분야가 아니었다. 미술이론도 이해가 안 되고 원근감도 명암도 영 모르겠다. 결국 두 손 두 발 들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선생님께 세상 비굴하게 문과로 옮겨 달라고 말했다. 이미 3개월이나 놓쳐버린 이과 수업을 도저히 쫓아갈 자신이 없었다. 엄마는 멀쩡하게 잘 다니던 학교를 왜 하필 고 3 중요한 시기에 허튼짓 하고 다녔냐며 아직도 나무라신다. 그래서 내가 국립대학에 떨어졌다고 생각을 한다. 나는 오히려 3개월 펑펑 놀고 사립대라도 갔으니 다행이다 싶은데...
두 번째 꿈은 심리학자였다. 심리에 대해 관심도 많았을뿐더러 친구들이 유독 내게 와서 고민을 털어놓고 나면 너는 심리학자가 딱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내겐 문제가 있었다.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나면 친구는 홀가분하게 자리를 뜰 수 있지만 난 친구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내 일처럼 받아들여서 상담을 해주면 친구들은 만족했을지 몰라도 그들의 고민은 이제 내 몫이 된다. 그러다 보니 심리학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심리학과에 지원했을 것이다. 아님 전과를 했던지. 지금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심리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다. 돈이 많이 드는 반면 돈벌이는 되지 않는 직업군이라고 해서 차마 당장 도전은 못하고 있다. 소처럼 일만 하는 신랑 돈 쓰는 게 미안하고 눈치 보여서.
그다음은 작가다. 글 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나였다. 남들이 내 글을 보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봐주길 바랬던 이중적인 마음으로 글을 썼다. 작은 글쓰기 수첩 안에는 내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친구들은 힘들 때 내 수첩을 빌려가서 돌려 보았고, 방송반 작가이자 프로듀서였던 내 프로그램은 꽤 인기가 좋았다. 아마도 나의 첫 성취감은 방송반 마지막 방송 때였을 거다. 고3이 되면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에게 방송을 물려주고 은퇴(?)를 한다. 내 마지막 프로그램은 연주곡 장르였다. 보통 연주곡이라 하면 클래식을 주로 선곡했던 선배들과는 달리 나는 가사 없는 영화음악이나 가요를 선곡했다. 방송반 활동을 하면서 찐팬들도 많이 생겼다. 마지막 방송의 마지막 곡이 끝나자 방송반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오늘의 선곡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며 펜과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때의 황홀함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내 프로그램명도 참 멋졌던 거 같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책 제목으로 할까?)
그 시절 나의 장래희망은 라디오 작가였다. 그런데 방송반 활동을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1주일에 한 번 방송하는 점심 프로그램 멘트를 위해 학교를 다닐 정도였다. 다섯 장 정도의 멘트지와 음악 선곡을 해서 완성된 원고를 프로그램 아나운서에게 방송 이틀 전에 미리 넘겨야 한다. 글감을 위해 1주일 내내 멘트지와 싸움을 해야 했다. 수업시간에 쓰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을 보내자 나는 더 이상 글이 쓰고 싶지 않았다. 보통 방송반 활동을 한 친구들은 대학에서도 방송활동을 하며 언론인의 꿈을 꾸기 마련이다. 나는 어찌나 질렸는지 첫사랑이자 짝사랑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적어내기 전까진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가 국문학과에 갈 줄 알았다고 한다. 내가 국문학과를 진학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내 글을 평가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사람의 글을 평가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격동의 대학 4년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 언니는 내게 작가 아카데미를 다녀보라고 권유했다. 내가 아카데미를 다닌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의 글을 스스로 좋아는 하지만 남들 앞에 내세우기는 부끄러웠다. 지금도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있음에도 홍보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본격적인 삽질이 시작되었다.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나는 평소 관심이 많던 전통매듭, 전통차, 한복 등을 사업화시키고 싶었다. 좋으면 그냥 배우면 될 것을 꿈이 커도 너무 컸다. 기왕 하는 거 무형문화재가 되어야 할 거 같고 한국을 세계에 알려서 수출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 꿈을 상상으로만 쫓다가 지레 겁먹고 포기해버린다. 회사를 다니며 세무 공부도 했다. 문과 체질인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세무 쪽은 또 재미를 느꼈다. 비서직을 오래 하지는 못할 거라는 판단에 세무 자격증을 취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 둘 자격증이 생기니 세무사를 꿈꿔 본다. 실무 경험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결혼 후 세무사 사무실에 무경력으로 자격증 하나만 들고 취업을 했다. 2년 정도 세무 업무를 해보니 남들 돈에 관련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을 얻었다.
전업맘으로서의 삽질은 더 처절하다.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한 살림 알뜰하게 꾸려 나가면 좋으련만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많았다. 내 앞으로 어느 정도 수입을 만들고 싶었다. 돈이 될 만한 것들이 뭘까 생각하며 리본핀, 위빙, 플라워, 토퍼 등을 배우며 소량씩 판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 같은 전업맘이 나뿐만이랴. 전업맘들이 한 번쯤은 거쳐 갈 만한 코스였다. 접근성이 좋은 아이템은 경쟁자가 너무 많고 접근성이 어려운 아이템은 나도 쉽게 다가설 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가르쳐야 돈이 된다고 하는데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티칭 능력이 부족했다. 자신감이 없었다. 이 정도는 다 알겠지, 내가 누굴 가르쳐? 누가 나한테 배우러 오기나 하겠어? 그래서 항상 산을 타기만 하고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림책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 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을 찾기 위해 땅을 파는 두 아이가 나온다. 땅 속에는 커다란 보석들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다. 이것은 독자만이 알 수 있는 짜릿한 비밀이다. 조금만조금만 더 파면 그들이 원하는 보석을 발견할 수 있는데 거의 보석에 다가서고도 다른 곳을 옮겨 파기 일쑤다. 보석을 요리조리 피해 땅을 파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랄까?
나 또한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꾸 그 길을 의심하고 다른 길을 향하는 나의 실패에 대한 습관이 문제이다. 삽질 경력 22년차! 이제는 요리조리 힘 빼고 삽질하는 정도는 익숙하다. 삽질도 손에 익어야 오래 안전하게 할 수 있다. 어쩌면 내 앞의 보석은 이미 형체를 드러내고 있고 먼지만 털어내면 눈에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반짝이는 보석이 아닐까봐 차마 손을 펼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