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로 산을 옮기는 사람들

제주 한달살이 - 8

by 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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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선 어딜 가도 눈에 치이는 게 돌이라지만, 여긴 좀 더 특별했다. 화산암들 위에서 자라나는 나무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돌낭예술정원은 제주도를 10번은 와봤다는 자칭 '제주도 전문가'인 엄마가 가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매일 같은 곳을 가긴 지겨우니 새로운 장소를 지인들에게 물어 알아온 아직은 '덜' 유명한 그곳.


그곳을 방문한 날은 바람이 정말 매섭게 불던 날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로 제주를 10여 년 만에 찾은 동생도 제주의 바람은 이런 것이냐며 기함을 했다. 입장료는 만원. 4명이면 4만원. 똑 떨어지는 이 숫자에 엄마는 옆에서 중얼거렸다.

"아이고 비싸네..."

"엄마 매표소에서 그런 말 좀 하지 마라"


입구에는 아주 큰 소나무가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정원을 가꾼 사장님이 가장 아끼신다는 해송. 제주도의 날 선 바람을 다 맞으면서 세월을 머금은 그 소나무는 양 옆으로, 그리고 좌우로 길게 뻗어 있었다. "나무 전문가들도 와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해송이라고 놀라고 가요." 작은 사장님(사장님 아들)이 자랑하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내부는 '예술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소나무, 향나무, 동백나무... 갖가지 나무들이 제주의 토박이인 돌과 함께 어우러져 제각각의 모양으로 기세를 펼치고 있었다. 큰 나무들에는 풍경이 달려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풍경이 하나 둘 소리를 울리며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돌도 질세라 자기 몫을 했다. 용암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구멍구멍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화분이 되기도 하고, 하트모양 조형물이 되기도 했다. 돌과 나무, 함께 있어 자연스러운 것들이 사람의 손을 닿아 한층 더 조화로워지는 광경을 예술이 아니면 뭐라고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3달 전인가 일본에 있는 아다치 미술관에 다녀왔다. 일본 최고의 정원으로 평가받는 그곳은 유리 통창 밖에서 정원을 바라보는 구조의 미술관이었다. 유리를 프레임 삼아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보는 것이다. 동글동글하게 잘 꾸며진 정원이 정말 그림 속의 한 장면 같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뿐이었다. 그림에서는 풀향을 맡을 수 없으며 물소리를 들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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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주의 정원은 달랐다. 돌을 만지고, 바람결에 실려오는 냄새를 맡고 놀다가는 새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는 기쁨. 심지어 이곳을 만든 이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정원을 가꾸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한참을 즐기고 있을 때 작은 사장님께서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제안을 하셨다. 인간극장에도 나오셨다는 이 분은 비 오는 날에는 나무와 돌이 다른 느낌을 낸다며 호스를 가져다가 물을 뿌려주시기도 했다. 정성스레 가꾼 나무와 돌을 설명하는 이의 눈이 애정으로 가득했다.


돌낭정원은 사장님이 10년을 넘게 나무와 돌을 모아서 만드신 곳이라고 한다. 이 집은 원래 양식업을 했었는데 사장님이 버는 족족 다 나무랑 돌 사는데 투자를 하셔서 사모님은 돈을 만져보시질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돌낭정원으로 아예 노선을 틀었고, 그렇게 정원은 가족사업이 됐다고 한다.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시기를 보낸 이들은 결국 아주 멋진 살아 숨 쉬는 정원을 만들어냈다. 나무 한그루, 돌 하나를 한번 옮겼으면 단지 그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매일매일 쌓이고 모여 멋들어진 공간이 됐다. 세월로 산을 옮긴 것이다. 그냥 산과의 차이라면 이 산 저 산을 조금씩 떼어 뒀달까.


문득 생각해 본다.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10년 이상 해본 적이 있느냐고. 쉽게 시작했다가 재미가 없으면 금세 포기했던 것들, 단기간에 낸 작은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놔버린 일들. 이 모든 것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렇지, 있었으면 내 인생이 달라졌겠지.


이렇게 10년 이상을 할 수 있는 꾸준함에는 어떤 동력이 있을까. 사장님에게는 완성된 이 정원이 어렴풋이 눈에 보였던 건 아닐까. 미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 희망. 나는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남은 날은 많고 매일의 힘은 복리로 작용한다. 멀리 내다볼 것, 조금씩이라도 나아갈 것. 눈앞의 결과에 흔들려 손을 놔버리지 말 것. 그동안에는 하루 앞이 캄캄해 나의 10년 후가 안 보였다. 사실은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매일이 지겨워 앞을 상상하기 겁났다. 하지만 이제는 직장도 나왔으니 조금 더 멀리 내다보고 매일 조금씩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겠다. 마치 세월로 산을 옮긴 이들처럼.


정원을 다 둘러본 후 엄마가 사장님 며느리라는 매표소 직원에게 넌지시 말했다. "입장료가 하나도 아깝지 않던데요. 너무 좋았어요." 그의 얼굴에도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들은 돌낭예술정원이 우리나라 최고의 정원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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