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신혼생활 리셋

제주 한달살이 - 9

by 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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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오면서 혹은 일을 그만두면서 많은 것들이 변화했지만, 그중에 큰 부분이라고 하면 '끼니'를 꼽을 수가 있다. 육지에서는(제주도 사람들은 이럼 표현을 쓰더라) 각자 바빠 식사를 같이 하기가 어려웠다. 설령 시간이 나더라도 나의 비루한 요리실력으로는 음식 준비만 두 시간이었기에 우리는 집밥보다는 외식을 즐겼다.


하지만 제주도에 오면서 외식의 자유는 박탈당했다. 좀 더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은 돈의 문제. 제주는 물가가 비싸다. 나가서 국밥이라도 한 끼 먹을라치면 1만원이 넘는다. 여기에 성게라도 들어가면 3만원이 우습다. 이제 삼식이가 된 나는 계산기를 두드린다. 점심과 저녁 두 끼만 나가서 먹어도 2명이면 하루 5만원, 한달이면 150만원. 이 정도면 부자들도 고심할 짓 아닌가.


결국 우리는 유튜브에서 '밀프랩'을 찾아 끼니를 만들어 먹는 것으로 쇼부를 봤다. 식용유, 간장, 설탕, 고춧가루, 후추, 다진 마늘... 없는 조미료에 쌀까지 사고 나니 이건 사 먹는 게 나을까 싶은 정도의 영수증. 하지만 "처음이니까"라는 말로 위안을 삼는다.


그러나 복병은 따로 있었다. 2구짜리 작은 하이라이트는 조금만 열이 올라오면 꺼졌다. 이건 히터가 아니라 열 식히는 기구가 분명했다. 치즈닭갈비의 치즈가 녹기 전에 내가 먼저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게다가 숙소의 팬은 한 번에 2인분의 밀프랩을 만들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나는 같은 음식을 2번 하는 릴레이 달리기를 해야만 했고 조리대 앞에 의자를 두고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래도 고생하는 것만큼 냉장고는 든든해졌다. 찜닭, 치즈닭갈비, 카레, 제육볶음, 국물요리 등 한 주에 두 개정도의 요리를 하고 한 세트는 냉동실로 직행하다 보니 나름 선택의 자유도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서 책과 신문을 읽고 끄적이다가 점심을 먹고 카페로 가는 일상. 오후 시간을 보내고 운동 후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다시 책 읽기. 이 재벌 같은 여유로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는 하루들에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너무 방심했던 것일까.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서 터졌다. 남편의 "나 아침 좀" 이 한 마디였다. 사실 그 말이라기보단 타이밍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옮기다가 만 반 통의 빨래, 설거지 후 며칠째 쌓여 있는 그릇들...그걸 하나둘 정리하던 내게 '아침'이라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사실 아침 준비라고 해야 냉동실에 얼려둔 빵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캡슐 커피를 내리고, 그릭요거트를 꺼내 예쁜 그릇에 담고 꿀과 함께 내는 것. 굉장히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손은 빵으로, 커피로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입에서는 뾰족한 말이 나왔다.


"하나를 해도 좀 완벽하게 해 주면 안 될까."

"제주도에 와서 아침 항상 내가 차려먹었고, 딱 세 번이야. 그게 그렇게 힘들어?"

"너가 먹을 아침 네가 차려먹는 게 당연하지 내가 세 번 해준 게 불만이야?"

"아침을 차려 달라는 말 때문에 기분 상해서 지금 나한테 틱틱거리는 거 아니야."


제주에서의 첫 다툼이었다. 말하고 나자 사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었는데 미안함이 들었다. 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안 한 걸 탓하는 내 마음이 부끄러웠다.


"미안해."

"괜찮아 난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사람이니까~"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에? 당근녹음기 틀어?"

얼마 전 주토피아에서 본 당근녹음기를 흉내 내는 남편의 위트에 날 섰던 우리의 분위기는 녹아버렸다.


결혼한 지 10개월 차, 그간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남편이랑 안 싸워?"

난 늘 자랑스럽게 대답했었다. "전혀 안 싸우는데요? 사이 엄청 좋아요."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그건 육지의 바쁜 일상이 수많은 가사 노동을 덮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겨를 없다는 핑계로 외면했던 수많은 집안일, 2주에 한 번 부르던 청소도우미, 그래도 괜찮다며 참고 넘어가던 남편이 있었기에 그간 내가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을.


제주의 사치스러운 여유는 오히려 우리에게 '노동의 분배'라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줬다. 쌓여가는 빨래 바구니와 비어 가는 냉장고, 바닥에 가득해진 머리카락까지... 함께 사는 게 혼자 사는 거보다 즐거운 만큼 그에 대한 무게도 따른다는 것을 이제야 배워가고 있다.


제주의 햇살 아래,

낭만 대신 생활을 알아가며,

그야말로 신혼생활 리-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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