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달살이 - 10
제주에 온 후 나의 하루는 완전히 바뀌었다. 특히 가장 크게 바뀐 것 중 하나는 수면 시간이다. 회사를 그만둔 것과도 일련선상에 있는 일이지만, 도시의 소음과 속도를 벗어나 제주의 고요함 속에서 몸의 리듬을 되찾아가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침잠이 많았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엄마가 늦잠 잘까 봐 깨우는 일상이 반복됐으니 말 다했다. 그 이유를 나는 항상 '저혈압'에서 찾곤 했다. 특히 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는 기립성 저혈압이 심해 몇 번 아찔하나 상황이 있기도 했다.
게다가 엄마는 내 고모들도 나와 비슷하다며 말을 얹었다. 같이 자면 자기는 재깍재깍 일어나는데 그렇게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더라는 말. 저혈압 때문에 한약도 먹었다는 말. 그래서 그냥 유전이겠거니, 몸의 특성이겠거니 하고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일찍 일어나기 위해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아침을 먹는다는 말이나 아침루틴을 성공의 비결로 꼽는 유명인의 말들은 내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만 잘 산다'는 무언의 압박을 줬기 때문이다.
특히 기자일을 할 때는 더욱 힘들었다. 내가 자는 사이에도 세계는 돌아갔고, 나는 그 정보들을 아침에 일어나 줍줍 하기에 바빴다. 일 잘하는 선배들은 아침 5시에 일어나 외신과 각종 뉴스들을 다 훑어보고 발제를 했다. 하지만 내게 5시는 꿈의 숫자였다.
그리 유행하던 미라클 모닝도 해봤다. 30일이면 습관이 만들어진다는 말에 30일을 꼬박 버텨보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는 효과적인 듯 보였다. 깜깜한 새벽과 가라앉은 공기, 이런 생소한 것들은 고양감과 함께 오늘 하루도 잘할 것만 같은 기분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길진 않았다. 습관은 챌린지가 끝나면 무너지기 마련이었고, 나는 결국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챌린지에서 벌금으로만 10만원 넘는 돈을 내며 항복을 선언했다. 남들이 아침에 하는 일을 나는 저녁에 미리 하면 더 앞서갈 수 있다는 나만의 핑계를 대곤.
그때부터인 것 같다. 내 루틴이 더욱 꼬인 것은. 나는 잠들기 전 내일 발제 고민에 밤바다 핸드폰을 붙잡고 있기 일쑤였다. 각이 안 나오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노트북으로 향했다. 그렇게 2~3시에 잠들고 나면 그다음 날 멀쩡할 수가 없었다. 평일을 그런 식으로 보내고 난 후 금요일 밤은 그냥 지나 보내기가 아쉬워 늦게 잤고, 토요일 밤에는 자고 일어나면 월요일을 준비해야 하는 게 싫어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내일 걱정에 잠자는 것을 미뤘다. 그렇게 내 수면시간은 하루 평균 5시간 정도로 굳어졌다.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왜 하느냐. 그건 바로 요즘 제주생활의 꽃이 '잠'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12시에 자서 9시에 일어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더 늦게 자는 날은 몸이 더 늦게 일어나고 더 일찍 잔 날은 더 일찍 일어난다. 나는 내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게 저혈압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몸이 원하는 수면시간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물론 8시, 9시는 일반 직장인에게는 상상도 못 할 기상시간이다. 하지만 주말에 2시까지 잠을 자던 나는 내게 회사를 그만둬도 2시까지 자진 않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그런 걱정은 덜었다. 특히 여덟 시간을 자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는 건, 더 빨리 자면 더 빨리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희망적이다.
아마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인 거 같다. 한 달 동안 하루 수면시간을 8시간 이상으로 유지한 적은. 그래서 그런지 요즘 컨디션은 아주 좋다. 확실히 짜증을 덜 내게 되고, 피부도 많이 좋아졌다. 잠 잘 자면 살 빠진다는데 그건 아직 모르겠지만,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잠을 잘 자는 내가 좋다. 그게 퇴사의 힘이든 매일 아침 맞이하는 제주의 맑고 느린 공기의 힘이든 말이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은 확실하다. 어쩌면 나의 한 달 생활이 준 가장 큰 선물은 20여 년 만에 맞는 이 건강한 잠이 아닐까. 아주 보물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