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으로 나를 만나는 시간 : <맹자> 양혜왕장구상 1장
어릴 때 옛날 이야기를 읽는 재미에 푹 빠진 적이 있다. 그 중에서도 흥부와 놀부, 신선에게 도끼를 받은 나무꾼 등은 부자와 빈자에 대한 나의 인식을 만들어준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난한 흥부는 착한 일을 하여 부자가 되고, 부자였던 놀부는 나쁜 일을 하여 패가망신한다. 신선에게 도끼를 받은 나무꾼 역시 정직한 착한 나무꾼은 금도끼와 은도끼를 모두 소유하게 되었고, 마음씨 나쁜 나무꾼은 쇠로 된 도끼마저 제대로 찾지 못하고 신선에게 혼쭐이 난다.
위의 이야기는 사실 좋은 일을 복을 부르고 나쁜 일은 화를 부른다는 것이 주제일 터인데, 여기에 더하여 어린 나에게는 부자에 대한 이미지가 잘못 형성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대중화된 이야기며 드라마에서 부자들은 거의 심보가 고약하고 남의 것을 잘 빼앗으며 나쁜 짓을 하여 벌을 받는 캐릭터가 많았던 터였다. 아마 반대되는 인물도 많을 테지만 내 기억에 오래남는 이미지는 그런 것들의 총합이다. 그래서 은연중에 어린 나는 부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또 사실 부자가 되기에는 내 직업도 그릇도 미치지 못하여 꿈꿀 수 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했다.
맹자도 '이익'추구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책 가장 첫 편에 들이민다. 맹자 전편에 흐르는 주제의식이 맹자의 양혜왕장구 상 1장에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당시 혼란스러웠던 시대 상황에 대한 진단을, 맹자는 '이익추구'의 극단적인 모습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그 해결책으로 '인(仁)'과 '의(義)'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께서 양혜왕을 찾아뵈니 왕이 말하였다.
"어르신께서 천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역시나 앞으로 우리 나라가 이롭게 되지 않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왕께서는 어찌 반드시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역시나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서로 이익만을 다투게 되면 국가가 위태로워집니다.
인하면서도 자기 부모를 버리는 자는 있지 않고
의로우면서 자기 군주를 뒤로 여기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
왕은 또한 인의만을 말해야하시니 하필이면 '이익'을 말하십니까.
孟子 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 對曰 王 何必曰 利 亦有仁義而已矣
上下交征利 而國危矣
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
王은 亦曰仁義而已矣 何必曰利
맹자의 말이 너무 길어 중간에 생략한 부분이 꽤 있으나 대략적인 요지를 추려 올린다면 맹자의 말은 위와 같다. 맹자의 명성을 듣고 양혜왕이 맹자를 부른다. 맹자가 양혜왕과 만나자, 양혜왕은 자신의 나라에 이제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즉 부국강병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비친다. 그러자 맹자는 이 기대감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이익'을 '인의'와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로 놓고 당시의 극단적 이익추구의 행태를 비판하고 오직 '인'과 '의'를 통해 군주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양 사회에서 '이익'의 추구에 대한 행동을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던 시대적 분위기가 이런 이야기 속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보게 된다. 나 또한 이런 문화를 감지하고, 내 주변의 어른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부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옳다 여기며 '경제'와 관련해서는 어떤 지식도 쌓으려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이익을 추구하여 부자가 되는 것은 결코 꿈꿀 수 없는 일이며 꿈꾸어서도 안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매우 컸기에, 중년이 되어서도 경제와 관련된 지식은 여전히 초보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맹자가 주창한 극단적 '이익'배척의 어조는 사실 따지고 보면 '이익'자체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적확하다. 위의 내용에서는 생략되어 있으나 양혜왕장구 상 1장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나 많은 다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남의 목숨까지 빼앗고,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자신의 곳간에 넣는 극단적인 이익추구의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즉, 맹자가 비판하는 것은 '이익'자체가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부도덕한 방식에 대한 것이다. 맹자가 '인'과 '의'를 강조했던 이유도 '사람으로서의 염치는 지키자'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만큼 맹자가 살았던 시대 분위기는 '이익'추구의 극단적 행태로 인간성마저 잊고 살아가는 일상이 지속되었으리라.
王은 亦曰仁義而已矣시니 何必曰利잇고
왕은 또한 인의만을 말해야하시니 하필이면 '이익'을 말하십니까.
맹자는 자신의 말 앞에 '인'과 '의'를 두어 말하고 다시 마무리 하며 '인'과 '의'를 두어 강조한다.
맹자가 비판한 것은 '인'과 '의'가 사라진 인간의 마음이었고, 이는 '이익' 추구의 극단적인 행동 때문이라고 보았다. 어쩌면 맹자가 '이익(利)'에 대해 '인과 의'의 극단적인 대척점으로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양혜왕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화술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정작 맹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이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아니라 '인과 의'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지는 양혜왕의 말에서, 우리는 여전히 양혜왕이 '이익'에 집착하고 '인과 의'라는 인간의 양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여러 이야기를 통해 '좋은 마음씨'라는 긍정적인 요소보다 '이익을 추구하는 나쁜 사람들'에 대해 강렬하게 인식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일 수 있겠다.
다시 정리하자면, 맹자는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이익이 아니라 남의 목숨까지 해쳐가며 빼앗아오는 이익, 이러한 행동이 횡행하는 세상에 대해 비판하고 있으며, 이를 원천차단하고자 극단적으로 '인의'만 있을 뿐, '이익'은 없다는 강한 어조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한문 고전을 사랑하는 이로써, 맹자의 말에 대해 한 번 더 돌아보니, 지금까지 잘못된 생각으로 '이익' 그 자체마저 거부했던 나의 지난 시간이 더욱 부끄러워진다. 더 이상 정당한 방법으로 추구하는 이익에 대해서까지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 오히려 정단한 노력이 뒷받침 되어 얻는 자연스러운 이익은 '의로움'에 해당될 것이다. 또한 이렇게 얻은 '이익'을 주변에 나눌 수만 있다면, 이는 곧 '사랑'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수동적으로 '인의'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
'이익'을 구하되 올바른 방법으로 획득하여 적극적으로 '인의'를 실천하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이 21세기의 이익과 인의의 관계를 제대로 구현하며 살아가는 이가 아닐까.
다시 말하면, 맹자가 강조하는 '인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정당한 방법이라면 적극적으로 이익을 추구하여 '의로움'을 구현하고 나눔으로 '사랑'을 실천하라.'
지금의 내게 오히려 맹자의 양혜왕장구 상 1장이 이와같이 해석된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