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에 남긴 그리움

<이규보 / 눈 내리는 도중에 벗을 만나러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by whilelife

쌓인 눈이 종이보다 하얗기에,

채찍들어 내 이름자 적어둔다.

바람아, 제발 눈밭 위로 불지 말라.

집주인이 올때까지만 기다려 다오.


-이규보의 [설중방우인불우]-



첫 눈이 내려, 네 생각이 난다.

말을 달려 너를 찾는다.

쌓인 눈을 힘겹게 헤치며,

나는 생각으로 먼저 너를 만난다.


너와 함께 마시는

따스한 차 한잔의 순간,

함께 바라보는 흰빛의 환희를.


그러나,

눈밭을 뒹굴며

힘겹게 찾아간 너의 집엔 네가 없다.


겨울빛 차고 황량한 너의 집 앞은

때로 부는 바람에 눈가루 반짝이는.

너의 집은 야속하리만큼 고요하다.

마당에 쌓인 눈이 종이보다 희다.

말 채찍을 붓삼아 손에 쥔다.

이렇게 네 집 마당에 나의 그리움 새긴다.


바람이여, 부디 그 벗을 기다려

내 이름 지우지 마시길.





핸드폰 없이, 간절히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언제적 일일까? 핸드폰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었으나 한편 다른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아갔다.


그것은 간절한 기다림, 오랜 시간 공 들여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기다림은 고통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피해가려 한다.


그러나 가끔은 그립다. 피해갈 수 없는 간절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를 만나는 순간, 그 때에야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절정이.


그래서 이 시를 쓴 이규보의 간절한 기다림이 더욱 애처롭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지금은 느낄 수 없는, 철저한 아날로그 감성이므로.






雪中訪友人不遇(설중.방우인.불우)

눈오는 중에 친구를 방문하였다가 만나지 못하고


雪色白於紙(설색.백어지) 눈빛이 종이보다 하얗다고 느끼는 순간

擧鞭書姓字(거편.서성자) 채찍 집어들고 내 이름자를 적어본다.

莫敎風掃地(막교.풍소지) 바람아, 제발 눈밭 위를 쓸어가지 말아서

好待主人至(호대.주인지) 이 곳 집주인이 올때까지 부디 기다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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