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바람의 언덕/평창 육백마지기/강릉 안반데기
세상에. 땅꺼짐이란다, 또. 멀쩡하게 달리던 차 두 대가 넉넉히 빠진 크기란다.
아스팔트 도로는 무엇에도 맞설 수 있을 진회색의 묵직함. 자연과 인공의 결합이 빚어낸 신뢰의 공고함. 고속의 쇳덩이들을 가뿐히 받드는 아틀라스의 문어발. 흐름이 굳어져 구조가 완성되었기에 더 신비로운 마법의 대동맥. 그게 자꾸 꺼지는 것이다. 진흙길도, 논두렁길도 아닌 아스팔트 길이 무너져버리면 도대체 뭘 믿고 지구와 접하며 이동할 수 있을까? 아, 그건 아닌 것 같다. 아스팔트 도로는 지구의 일부가 아니지. 공갈빵이 푹 꺼지는 건 빵 표면 아래에 공기층이 있다는 뜻이다. 도로가 꺼진다는 것도 지표면과 도로 사이에 빈 공간이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지구는 책임이 없다. 꺼지는 도로에서 우리는 지구와 접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공기 중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던 가녀린 아스팔트 위를 힘차게 달렸던 거다. 사람이 내유외강이면 속이라도 너그럽겠지만 도로가 내유외강이라면 큰일이다. 파인 깊이가 그리 깊지 않아도 지구 중심 방향으로 꺼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고꾸라져도 최소한 지표면이었는데, 그 아래인 땅 속은 두렵다. 중력이 버겁다.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것인가. 단테의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열린 것인가.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는 아스팔트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있다. 공동(空洞)이 검버섯처럼 흩어져 있는 도시의 지하가 두렵다.
올라가야겠다. 그래서.
4월의 매봉산 정상은 어중간하다. 고지대의 저온 탓에 화려함을 찾기는 무리지만 초록의 생명력도 곳곳에서 감지된다. 여름철 고랭지배추의 장관을 기다리기엔 지나치게 이르다. 그러니 여긴 아직 배추의 언덕이 아닌 바람의 언덕이 맞다. 강원도 산바람의 정수를 흡수하기엔 경치가 어중간한 지금이 제격이다. 적당한 황량함이 바람에의 집중을 이끈다.
난이도가 꽤 높다. 네 바퀴 구동이 필수인 강원도 삶이라 4륜 구동 차를 장만하긴 했는데, 덩치에 비해 빈약한 배기량 때문인지 힘이 달린다. 돈을 더 벌어야겠다. 강원도에서는 힘센 차가 사치의 결과가 아니다. 용을 쓰는 자동차도 불안하지만 조수석 쪽 창문으로는 창공의 파란색만 보인다. 비행기인 줄. 비좁은 비포장길이라 오른쪽 낭떠러지의 경계가 가늠되지 않는다. 일방통행이었기에 망정이지 정상에서 내려오는 차와 마주친다면 그 차나 내 차나 큰일 나겠다. 운전석에 앉으면 곧 힐링이고 웬만해선 피로를 느끼지 않는 장거리 운전자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시나브로 늘어난 나이에 스멀스멀 겁도 늘어난 게 틀림없다. 바퀴와 땅의 접점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지만 무심한 척 허세를 부리고 있다. 정상이 코 앞이다. 잔뜩 졸아든 심장에 반비례할 만큼 광활한 파노라마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억울하다. 장관이나 억울하다. 좌우가 한량없는 파노라마인 건 사실이다. 사방에 비교적 높이가 균일한 산들이 둘러쳐 있어 지평선 같은 산평선의 호위다. 언덕에 올라 바라보는 전경이 수평을 확장한 모습이다. 오르막 급경사의 아찔함이 포착되지 않는다. 적어도 정상에서의 시야는 힘들게 올라왔다는 변명을 엄살로 둔갑시켜 버린다. 예상보다도 좁은 간격으로 세워진 풍력발전기가 생명체 같다. 이곳은 풍력발전기의 집단 서식처. '바람'의 언덕이니 그들이 있어야 할 곳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바람을 먹고 산다. 어떻게 해발 1303미터의 고지에 이렇게 거대무시한 발전기가 늘어서 있을까. 인간의 능력이 대단한 건지, 이들이 정말 생명체인 건지. 풍력발전기의 바로 밑에 서보면 이 거인들의 본질을 알 수 있다. 50미터 길이 날개의 형상은 초현실적이고 소리가 주는 공포감은 압도적이다. 지면으로 내려 꽂힐 때마다 나오는 '우우웅~~~' 비명은 세상에서 가장 묵직한 베이스의 그것이다. 긴 날개의 그림자는 초저음과 연동하면서 비인간적인 무자비함을 보탠다. 과장한다면 거대 단두대의 칼날 소리다. 바람의 언덕의 주인은 그들이다. 사진과 실체가 가장 딴판인 피사체는?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다. 사진에는 공포가 없다. 위압도 없다. 날렵하며 날씬하다. 정(靜)인 척하고 있는 동(動)의 화신이다. 순수의 하얀 몸체는 파란 하늘 속 청명하게 도드라져 포카리스웨트가 마시고 싶어질 지경이다.
태백 매봉산 자락의 고랭지 채소밭은 전국 최대 규모다. 연간 600만 포기의 배추가 난다고 하니 알게 모르게 태백 언덕의 정기를 흡수한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재배 면적은 40만 평. 아, 약 130만 '제곱미터'다. 나는 보기와 달리 아나운서다.
바람을 맞는다. 명성과는 다른 미풍이다. 다행이 아니었다. 산바람의 정수를 만끽하려고 4월에 올라왔는데 봄볕에 살랑거리는 샛바람이 얼굴을 문지른다. 이건 아닌데. 바람 맛은 제법 달콤하다. 그건 다행이다.
내리막길은 오르막에 비하면 카펫이다. 폭도 넓고 경사도 완만하다. 오늘 매봉산 정상의 바람은 내리막길과 어울린다. 매서운 오르막길에 어울리는 뼈 때리는 강풍을 맞으러 다시 와야 한다.
정선군과 인접한 평창군에 청옥산이 있다. 동강의 지류를 따라 찾아가는 길이 멋스럽다. 그럴 수밖에. 강원도의 언덕과 명산을 오르는 길이라면 대개 굽이치는 강이나 시내를 옆에 두게 마련이다. 여기가 강원도라고 누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단박에 맞힐 수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지만 그런 게 있다. 이런 하늘과 구름, 이런 산과 강의 형상이라면 곧 강원인 것이다. 낫고 모자람의 차이가 아니다. 다른 거다. 인간세상의 도움이라곤 필요치 않은 그대로의 산하. 거꾸로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곳으로 오른다.
육백마지기는 성수기가 확실한 편이다. 안전한 봄부터 가을까지 꾸준하게 사람들이 찾는 바람의 언덕과는 달리 6월 초부터 7월 초, 한 달 안에 손님들이 밀어닥친다. 급경사의 포장도로와 완만한 비포장 진입로에 차량들이 꼬리를 문다. 오토홀드 기능을 켜 둔 상태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변속기 과열 경고등이 뜬다. 아차 싶다. 세팅을 제대로 안 하고 경사를 오른 거라 내 탓인 건데, 괜스레 힘이 부족해 그런 것처럼 엔진 쪽을 째려보게 된다. 얼른 돈을 더 벌어야겠다.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간인데 부지런한 사람들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대한민국 파이팅이다. 조금이라도 덜 복잡할 오전에 보고 오자는 똑같은 생각일 테니 불평할 이유가 없다. 포인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간신히 차를 세우고 걸어가기로 한다. 오가는 차들에 옆구리를 스쳐가며 명성의 육백마지기를 알현한 순간.
일말의 투정도 죄악이 되어버린다.
6월 중순 육백마지기의 마법이다. 푸른 하늘의 흰 구름과 데이지의 백설이 구도의 틀이 되어 초록 산천을 품에 안고 있다. 채도가 높아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 사진을 못 찍는다는 핀잔을 듣는다면 여기로 와야 한다. 평범한 스마트폰으로도 누구나 작가의 구실이 가능하다. 길이 막혀 반나절이 걸리더라도 육백마지기는 와야 할 때 와야 한다.
직관적이다. '육백마지기'. 볍씨 육백 말을 뿌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평원이라 해 붙여진 이름이란다. 강원도의 험한 산과 산 사이 이런 광활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귀엽게도 '계란프라이꽃'이라 별명이 붙은 샤스타데이지의 장관은 쌀농사의 의욕을 잃게 만든다. 기후에 민감한 품종인지는 몰라도 해마다 만개의 정도가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성공이다. 육백마지기는 육백만 송이의 천국이었다.
명소라 불리는 강원도의 언덕에서 풍력발전기는 디폴트값이다. 다만 청옥산의 풍력발전기는 바람의 언덕에 비해 드문드문 심어진 느낌. 게다가 하늘과 땅으로 분리된 수평의 화이트를 잇는 수직의 하얀 기둥이 되어, 발전보다는 풍경화의 오브제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듯하다. 너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발전에 매진해야지.
데이지의 꽃잎 하나하나가 실크처럼 미끄러진다. 야생의 고급진 파편이다. 존경하는 김훈 작가는 빠알간 동백 하나를 개별자로 바라본다. 꽃은 각각의 존재로 피어나 절정을 맞으면 통째로 떨어져 주접스럽지 않다. 모아야 하나의 존재로 가치가 빛나는 안개꽃과는 대척에 있다. 언덕 위에서 데이지 밭을 바라보니 군집성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지만, 접사 기능을 이용해 근거리 관찰을 해 보면 이만한 개별자도 흔하지 않을 것 같다. 섬유질의 매력이 돋보이는 하이얀 혀꽃(관상화)들이 샛노란 관꽃(관상화) 주위를 헹가레 치듯 받잡고 있다. 우주가 만들어낸 균형의 미이자 조화의 상징이다. 저 모양 그대로 똑딱이 단추를 만들어도 완벽하겠다. 한 송이 데이지는 나름의 완결이고 군집의 데이지는 천상의 꿈결이다. 메추리알 프라이가 비탈에 가득하다. 그들이 뿌리박고 있는 곳이 아시아인지 유럽인지, 혹은 남미인지, 존재의 공간을 가늠키 어렵게 만드는 국경초월 백일몽의 잔상이다. 평창군 미탄면의 육백마지기는 하늘과 구름, 청옥산과 데이지가 얽히고설킨 가운데 알록달록한 탐방객들의 움직임으로 방점을 찍는다. 차박의 명승지로 이름이 드높지만 그것도 부지런한 사람들이나 누릴 수 있는 사치다. 텐트보다는 허름한 모텔이 안락한 이 게으른 인간은 그냥 내려갔다가 문명의 혜택을 받고 다시 오련다. 내년에도 이 축복받은 언덕에 샤스타데이지가 만개하기를.
전국 별 보기 명소의 고인물이자 차박의 원조 성지. 그래서 접근이 제한된 곳도 많아진 강릉의 안반데기로 올라간다. 이름의 유래는 검색을 해보세요. 귀찮으신가요? 네, 알겠습니다. '떡메로 반죽을 내려칠 때 쓰는 통나무 받침판이 안반인데, 이곳이 그처럼 우묵하고 널찍한 지형을 가지고 있어 불려진 지명'. 됐지요?
안반데기는 강릉시내에서 30분 정도로 멀지 않은 거리 - 시골 사는 나의 극히 주관적인 기준일 수도 - 에 있는 데다 오르막길 운전도 언덕 3대장 중 가장 수월하다. '가장'보다는 '그나마'가 나으려나. 언덕 오르막 배추밭 바로 옆에 펜션과 더불어 마을주민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카페도 있어, 편의성과 접근성도 우월하다.
이름에서 빠진 게 있다. '안반'은 이해가 되는데 '데기'는 무엇인가. 고원의 평평한 땅을 뜻하는 '덕'이 안반과 합쳐져 '안반덕'이 되었고, 강릉사투리로 부르다 보니 안반'데기'가 된 것이라 한다. 함경남도에도 '안반덕'이란 산이 있단다. 아마도 강릉의 안반덕과 지형이 비슷할 가능성이 높다. 통일되면 직접 확인해 볼 것이다. 강릉지역 행정의 안내에는 '안반덕'과 '안반데기'가 혼용돼 있어 명칭을 통일하자는 주장이 있다고 하지만,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둘 중 하나가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난 이왕이면 사투리 너낌 물씬한 안반'데기'다. 고지의 평평한 떡판이 있는 이곳의 지번 주소는 심지어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다.
안반데기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배추다. 그것도 여름철에 수확하는 양질의 고랭지 배추. 굽은 길을 따라 오르다 돌연 초록의 폭발을 목도하게 되는데, 360도를 둘러 분지의 표면을 가득 덮어버리는 비현실적 광경이다. 다만 이 순간을 포착하려면 1년 중 가장 더운 시기에 이곳을 찾아야 한다. 그쯤이야 뭐. 아무것도 없던 해발 1,100미터의 황무지는 화전민들이 맨손으로 일구어낸 귀하디 귀한 결실의 땅이 되었다. 화전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한 것이 1960년대 중반이라고 하니, 그리 먼 옛날이 아니다. 그러니까 안반데기 배추의 절경은 자연미가 아닌 인공미인 것이다. 인공미는 메트로폴리탄 마천루의 굴곡 류(類)에서만 뽑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맨손의 땀이 땅 속을 직격해 식물의 싹이 삼투압 작용으로 솟아나게 되었다. 이보다 더한 인공미는 세상에 없다.
화려했던 '멍에전망대'의 명성은 이제 확인할 길이 없다. 도심에서 밀려든 차들이 안반데기의 정상에 포진하며 이른바 별 보기 붐을 불러일으킨 이 성지는 폐쇄돼 버린 지 오래다. 개인 소유의 땅에 세워진 전망대는 출입이 금지되고 이후 석축 등이 무너져 내렸다. 얼마 전까지 방치의 현장까지는 걸음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전망대 초입부터 사슬로 봉쇄돼 그마저 불가능하게 되었다. 지자체와 소유자가 잘 협의할 수는 없었던 걸까. 짐작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만, 떨어질 듯한 별들의 장관을 감상하고픈 속세 과객들의 소망도 헤아려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색을 감지할 수 있는 망막세포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다. 수직으로 이어진 나무의 초록과 발아래에 깔린 수평의 초록을 번갈아 탐지하느라 분주하다. 배추의 초록은 참기름이라도 두른 듯 윤기를 입은 진초록이다. 마스크 팩이라도 했던 것일까. 탐방자들의 시선도 덩달아 촉촉해진다. 안반데기의 주소인 왕산면 대기리는 강원도가 자랑하는 배추와 감자의 본산이다. 지역 특산물을 소개하는 TV에 단골로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십 년도 훌쩍 넘은 예전, 안반데기의 비탈에서 6시 내고향 촬영을 한 기억이 또랑또랑하다. 그간 족히 백여 군데는 촬영을 갔을 텐데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곳들이라면 무조건 힘들거나 두려웠던 장소다. 고랭지 배추를 수확하는 장면을 찍으며, 살짝이라도 헛발을 디디면 어쩌나. 돌멩이처럼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잔뜩 졸아든 모습이 화면에 보였던 게 차라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급경사의 배추밭에서 안반데기의 농민들은 중력을 거스른 도마뱀이다. 비탈에 착붙해 배추를 솎아낸다. 무조건 존경해야 한다.
배추는 전체가 꽃이 된다. 위로 돋아나는 아이들을 우러르며 아랫잎들이 차례로 드러눕는다. 배추 한 포기는 초록의 꽃받침과 초록의 꽃잎을 지닌 관상화가 되어, 미각에 포만감을 주기 전 시각에 선명함을 선물한다.
어깨 근육이 유독 뭉치곤 한다. 한참 전 몇 차례 뻐근해지는 담이 오더니, 그 담이 살갗으로 파고들어 아예 내려앉아버렸다. 오른 주먹으로 왼쪽 어깨를 땅땅 치고, 왼팔을 45도 앞으로 쭉 펴 스트레칭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말랑말랑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돌 같은 어깨에서 날개라도 돋아나 하늘을 날아다니면 좋겠다. 묵직하게 눌리는 어깨의 부담을 공중에 모두 흩뿌리고 싶다.
바람의 언덕에서, 육백마지기에서, 안반데기에서는 날고 싶다. 언덕에 올라 밤하늘의 별을 헤아려보는 것도 좋겠지만, 태양빛이 데이지의 잎에서 흰색을 반사시키고 배춧잎에서 초록을 반사시키는 한낮의 비행은 얼마나 벅찰 것인가. 산 정상보다 조금만 더 높이 날면 좋을 것이다. 정복감이 차오르는 초고층 빌딩에서의 조망이 아니다. 무상함을 느끼는 비행기 안에서의 관조도 아니다. 능선을 덮고 있는 숲과 꽃, 그리고 인간의 창조물인 창백한 바람개비까지. 하나하나가 더없는 소중함으로 시야를 채울 것이다. 그건 순수한 바라봄이다.
오르면 덜 수 있고
또 오르면 내려놓을 수 있겠지.
강원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