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 제주도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어느 지역의 하늘인가에 따라 공기의 밀도가 다르다. 종종 구름은 한쪽에만 응축되어 있다. 한라산을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넘어 이동할 때면 같은 섬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상의 차이가 확연하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서귀포시에 비가 내리고 안개가 끼는 날에 제주시는 티 없이 화창한 날이 상상 외로 잦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리 조절에 유리한 곳이다. 차분해지고 싶으면 비가 내리는 곳으로, 쨍한 기분이 필요하다면 반대편으로 가면 되니 셀프 맞춤형 기상이 제공되는 섬이다.
강원도는 어떨까. 한반도의 등줄기,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한 동쪽과 서쪽의 날씨가 사뭇 다르다. 그 날씨란 것이 제주처럼 기상이라기보다는 기온이다. 같은 여름이라도 해안인 동쪽이 선선하다면 영서는 머리 위에 올려놓은 달걀이 반숙이 될 정도의 불지옥이다. 반대로 40도 가까이 치솟는 무지막지한 더위가 영동지방을 공습하는 날에 상대적으로 산맥 너머 영서는 고지의 선선한 기운이 감돌곤 한다. 푄 현상이라는 요인도 한몫을 할 것이다. 그에 비해 겨울의 기온 차이는 일정한 편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은 비교적 따뜻하고, 고지대에 분지형 도시가 많은 영서는 혹독하다. 참 재미있어 죽겠다. 제주는 남북, 강원은 동서의 차이라니.
평창 대관령음악제를 감상하러 강릉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간 날엔 해안이 뜨겁고, 대관령 너머가 쾌적했다. 기가 막혔다. 강릉에 살면서 아침기온이 30도가 넘는 고통을 며칠째 받고 있던 터였다. 하늘 위 천공의 성에 온 듯한 느낌. 오늘 하루 들려올 선율이 컨디션 좋은 고막을 통해 온몸으로 흡수될 것만 같았다.
2024 평창대관령음악제가 열린 알펜시아 리조트
2004년 '자연의 영감'이라는 주제로 처음 막을 연 대관령국제음악제는 아예 '평창'이라는 지자체 명을 덧대 평창대관령음악제가 되어 2024년, 21회째 클래식 축제를 마련했다. 주요 무대는 알펜시아 리조트.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최 계기로 조성된 뒤 적자가 누적돼 숱한 논란을 거친, 실은 강원도의 골칫거리였다. 민간에 매각돼 한숨을 돌렸나 싶기도 하지만, 입찰과 계약과정의 의혹으로 지금까지도 갑론을박과 법정다툼이 이어지고 있는 애증의 현장이다. 안타까움은 거기까지만. 먼지처럼 씌운 오명은 대가들의 진중한 음악으로 날려버려야 마땅할 것이다. 용평리조트도 이웃이다. 그러고 보니 오삼불고기의 마력을 잊지 못해, 눈만 내리면 스키를 타러 간다는 핑계로 읍내인 횡계의 식당으로 달려간 기억이 미소를 짓게 한다. 해피 700의 고장, 평창 대관령면의 겨울은 색색의 스키어들이 별이 되어 반짝이는 하얀 도화지가 된다. 동해로 급격하게 추락해 내달리기 직전 태백산맥의 정점에 자리한 대관령면은 용평리조트, 알펜시아리조트가 모여 있는 겨울왕국이다.
그래서 여름은 쓸쓸했다. 적막했다. 한여름에도 손님을 받는 리조트들이 있지만 무언가 어색하기도 했다. 대관령음악제의 아이디어는 반전의 파괴력을 가져왔다. 미국 콜로라도주 아스펜 음악제에 여러 차례 참가한 강효 줄리어드 음대 교수는 강원도에 동계올림픽 유치 전략의 일환으로 음악제 창설을 제안했고, 강원도는 이를 받아들였다. 동계스포츠의 메카라면 겨울 추위가 매서울 것이니 여름엔 피서지의 자격이 충분할 것이다. 선선한 여름 날씨와 결합한 음악은 사람들을 홀리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것도 고지에 위치한 강원의 품 속이다. 딱히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는 아닐지라도, 이 정도 비전만 있다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해피 700의 고장 속에서 음악을 느끼고 자연에 호흡하며, 사랑을 담뿍 채울 수 있었다.
2024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주제는 '루트비히(Ludwig)!' 무려 베토벤의 이름이다. 성(姓)이 아닌 이름을 주제로 박아 넣었다는 것에서, 친구처럼 열린 마음으로 베토벤을 느껴보자. 뭐 그런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베토벤이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을지는 중요치 않다. 이제 그를 친구로 대할지 말지 결정하는 건 우리 자신이니까. 그러니 과감하게 내질러 본다. "이봐요, 루트비히 아저씨! 올해 음악제 잘 부탁드립니다."
김민형 교수의 특강 <음악은 물질인가 정보인가>
심장이 간지러웠다. 선선한 평창의 날씨와 만남의 기대감이 버무려진 신선한 뒤섞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팬미팅의 긴장감이 이런 것일까. 영국에 체류하고 있는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교양수학도서 인기작가인 김민형 교수의 특강이 대관령음악제의 프로그램으로 소개된 순간, 손가락은 이미 예매 사이트 화면 앞에서 바쁘게 자판을 투닥거리고 있었다. 국민의 절반 가량은 되지 않을까? 수학은 사는데 일절 쓸데없는 줄 알았다고, 그래서 흥미가 없어 공부 안 했다고 대충 얼버무리며 점수가 엉망인 탓을 돌린 사람들이. 나 역시 마찬가지. 세상의 원리로 수학을 접근하게 해 준 멋진 교양서들을 너무 늦게 만난 탓이라고 또 한 번 툴툴거려 본다. 음악 역시 정수와 함수로 구현된 실재. 그러니 이번 음악제 감상의 출발은 음악이 아닌 수학이었다.
피타고라스라는 불세출의 고대 수학자는 이미 음계와 주파수의 비율을 알아내서 음악이론의 토대를 쌓아놓았다. 음 자체, 배음과 화음 등 수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음악이라면, 프로 음악감상러의 난이도조차 뛰어넘은 김민형 수학자의 강연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온라인 음 생성기를 돌려가면서 그는 그래프로 그려진 음과 음악의 정체를 드러낸다. 0과 1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정보로서의 음을 소개한다. 곧 듣게 될 바이올린 선율의 원천은 이것이었구나. 김민형 수학자의 강의는 대관령음악제 감상을 위한 훌륭한 애피타이저가 되었다. 애피타이저는 알펜시아 콘서트홀의 메인 디쉬로 부드럽게 이음줄로 연결되었다.
루트비히 주제의 음악제였지만 예매한 것은 '디어 슈베르트'공연. 현악 오중주에 걸출한 연주자들이 등장해서이기도 했지만 슈베르트의 곡이 연주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베토벤 주제의 음악회에서 슈베르트를 감상한다고? 굳이? 슈베르트가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열렬히 추앙했다는 사실이 상식이 되면서, 추종자의 이미지가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얘기하면 대(大) 슈베르트는 뭐가 되는가. 오스트리아 빈 중앙묘지에 베토벤, 모차르트와 나란히 안장된 클래식계 슈퍼스타 삼인방 중 한 명이다. 다만 전 세계로 시야를 확장해 열혈 팬들의 수만 따진다면 인정해야 할 현실은 존재한다. 고전파 시기를 벗어나 세대를 확장해 보아도 클래식 세계에서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줄곧 대중음악계의 BTS다. 두 거장을 모델로 한 영화, 전기, 소설, 연주회는 그 어떤 작곡가와 비교해 봐도 압도적이다. 그래서인 듯하다. 이제는 슈베르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좀 더 늘어나도 되지 않을까. 세계 챔피언보다는 더 많은 응원이 필요한 도전자를 알리고 싶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 말이다. 감히 슈베르트를 2류로 취급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까마득히 높은 저 명장들의 모임에서 약간은 아쉬움을 느낄지도 모를 젊디 젊은 슈베르트를 더 칭송해 주고 싶은 것뿐이니까.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슈베르트 생가 슈베르트 생가에 있는 1825년 빌헬름 아우그스트 리더 작(作) 프란츠 슈베르트의 초상
엄청난 재능과 피를 토하는 노력은 불세출 작곡가들의 공통된 특질이지만, 슈베르트의 시간은 젊은 날 어쩔 수없이 휩쓸리고 휘몰아친 우리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었다. 작곡하는 순간이야 누군들 날카로워지지 않을까마는 그의 삶을 여러 증거들로 탐색해 보면, 사회 속에서 그는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 천재의 비통이나 고립의 운명은 달가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적당한 수줍음과 알맞은 정도의 사교성, 필요한 만큼의 허영과 이성에 대한 관심(이건 좀 더 짚어봐야겠지만), 성취에 대한 적절한 욕구, 푸대접에 대해 할 말은 하는, 지금 우리 주위의 썩 괜찮은 친구라고 해도 되겠다. 평범한 이들에게도 희망을 준다. 천재치고는 장벽이 높지 않다. 인간미에 가산점을 줄 수밖에 없는 가곡의 왕이다. 이만하면 응원하길 잘한 것 아닌가.
슈베르트의 음악을 보자. '마왕', '송어', '겨울나그네', '세레나데'... 후대에 비상한 유산을 남긴 작곡가라는 표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슈베르트 탐색가인 엘리자베스 노먼 맥케이의 <슈베르트 평전>에는 음악평론가 알렉스 로스가 쓴 평가가 소개되어 있다. 슈베르트의 업적을 가늠할 방법으로, 슈베르트가 숨진 바로 그 나이에 다른 작곡가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는, 생각보다 단순한 방법. 베르디는 같은 나이에 '나부코' 작곡. 베토벤은 C장조 교향곡 한 곡과 피아노 소나타 여러 점 정도. 모차르트는 신동 출신이라 많은 작품들을 이미 작곡한 뒤지만 대작 '마술피리'는 만들기 전이다. 음악의 아버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멋들어지지만 무명인 오르간 음악 여러 편 작곡. 그렇다면 슈베르트는? 600곡이 넘는 가곡과 오페라, 아홉 개의 교향곡, 피아노 오중주, 현악 사중주와 오중주, 소나타, 즉흥곡 등 1,000여 편에 달하는 모든 곡들은 당연하게도 그가 사망하기 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는 31세에 요절했다. 만약 기준 나이를 18세로 확 줄여버린다면? 그래도 슈베르트는 이미 200여 점의 가곡을 써버린 후라는 사실.
디어 슈베르트 공연이 끝나고
디어 슈베르트에서는 그가 사망하기 두 달 전 작곡한 현악 오중주 C장조, 도이치번호 956이 연주되었다. 현악 오중주의 배치는 대개 바이올린 2, 비올라 2, 첼로 1로 이루어지는데, 슈베르트의 유일한 현악오중주 곡인 이 작품은 비올라 대신 첼로를 한 대 더 늘려 저음부를 강조한 의도가 묻어난다. 혹자는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예감한 슈베르트가 삶의 관조를 묵직한 음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데 그저 귀를 열어놓고 감상할 뿐이다.
앞서 언급한 연주자들의 면면(사진 좌에서 우로). 트리오 반더러(Trio Wanderer)의 창립멤버인 바이올리니스트 기욤 쉬트르,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예술감독인 우리나라 첼로의 자존심 양성원,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한국인 오케스트라 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박지윤, 헝가리 태생의 설명불필요 첼로 거장 미클로시 페레니, 그리고 독일 ARD 국제콩쿠르 비올라 부문 우승자 이해수. 고요한 순간조차 공기의 밀도는 기운으로 가득했다.
어라? 내 두 자리 앞에 김민형 교수가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양성원 감독과 김민형 교수가 각별한 사이라는 기사가 기억났다. 클래식에 대한 부드럽고도 날카로운 토론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두 거장이 알펜시아 콘서트홀의 무대와 객석에서, 음악과 수학의 거리만큼 따로 또 같이 빛나고 있었다.
월정사 성보박물관
디어 슈베르트 공연이 끝나자 여름날의 느슨한 저녁이 곁눈질했다. 분홍빛을 샐쭉 머금은 푸른 하늘엔 슈베르트의 선율이 둥둥 떠 흐르는 듯했다. 차를 타고 월정사로 향했다. 평창대관령음악제의 '찾아가는 음악회'는 횡성문화예술회관과 강릉아트센터, 동해문화예술회관 등 평창 외의 자치단체에서도 수준 높은 연주회를 감상할 기회를 제공했다. 자연히 대관령음악제에 대한 관심은 많은 도민들에게 확장될뿐더러, 피서철 강원도를 찾은 손님들에게는 낭만을 두어 스푼 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월정사 성보박물관 내에 마련된 찾아가는 음악회가 궁금했다. 음악 자체보다는 연주회의 분위기가.
탄허 스님과 감탄할 수밖에 없는 그의 선문일점묵 서문
월정사 조실(祖室-사찰 최고 어른)을 지낸 탄허 스님은 경전의 철두철미한 해석과 종교를 넘나드는 명강의로 학승(學僧)의 최고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함석헌 선생도 그의 수강생이었다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방대한 화엄경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여 80권에 달하는 <신화엄경합론>을 펴낸 탄허 스님의 업적은 '원효, 의상대사 이래 최대의 불사'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종교 간 벽을 무너뜨린 범위의 확장. 유불선과 기독교의 뿌리까지 파고든 학문의 깊이다. 지금은 없어진 한국대학에 그의 노장철학 강의를 들으러 국내 쟁쟁한 학자들이 줄지어 명단에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고 한다. 사찰의 승려가 도교의 일타강사가 되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며 국외에서는 비교 종교 특강 요청이 쇄도했다고 하니 입이 떡 벌어질 따름이다.
음악회가 마련될 성보박물관에서 탄허의 흔적은 그래서 흐뭇하다. 불교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인류 신앙의 비밀을 풀어보려 한 그가 머물렀던 월정사 터는, 어쩌면 머나먼 타국의 악기 소리로 채워지기 안성맞춤인 공간일 수 있겠다. 동서양의 믿음과 정서가 선율 속으로 파고들어갈 귀한 시간이다.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마련된 '찾아가는 음악회'
예감은 했어도 불화(佛畵) 휘장 앞에서의 클라리넷 오중주. 이것 참 기막히다. 전문적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곳이 아니라 뒷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연주자의 기교를 지켜보기 힘들었겠지만 신묘하고도 오묘한 감성을 제대로 선물 받았을 듯싶다. 무대 뒤에서 가부좌를 틀고 감상한 부처님이 승자라는 느낌은 왜일까. 하긴 부처핸섭의 시대에 클래식과 불교의 만남 정도는 하이볼 한 잔 속 부드러운 액체의 조합이라고 해도 무어라 할 수 없다. 성보박물관 내의 성긴 공기는 경건한 매질(媒質)이 되었다. 상원사 동종이 박자에 맞춰 울려주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평창에서 시작된 오선지 위 선율은 오대산을 따라 더 싶은 산속으로, 대관령 자락을 따라 동해의 파도 위로 넘실거렸다. 한여름 강원도의 품 속으로 들어와야 할 또 다른 이유, 평창대관령음악제가 전하는 축복이다.
알펜시아 리조트의 석양
산과 바다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소리의 축제에서, 공간에 따라 인상을 바꾸는 음악의 능력이 신기할 따름이다.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파도가 치는 바다 앞에서의 음악은 극단적이다. 잔잔하게 깔리는 피아노 소리도, 매끈하게 들려야 할 발라드 가수의 음색도 동해의 푸른빛 앞에서는 천둥소리가 되어 가슴을 후빈다. 정서는 증폭돼 과한 감정이입이 일어날 여지가 크다. 사랑은 강렬하게 접착되고 상실은 떨어져 나가는 극심한 통증으로 즉물화된다. '곡(哭)'이 파도에 실린다. 후회 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통렬한 감성의 폭발이다. 안개가 자욱한 대관령 산속에서의 음색은 균질하다. 음악에 실린 자극적인 감성은 톤 다운된다. 거세게 휘몰아쳤던 교향곡도 능선이 감싸고 있는 산맥의 둥지에서는 매운맛이 깎여나간다. 기압이 낮아진 만큼 정서는 가라앉는다. 감동이 덜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랑과 아픔은 삭고 삭혀져, 꿀꺽 삼키는 큰 숨과 함께 온몸의 실핏줄로 녹아들어간다. 관조가 가능해지고 상실은 '읍(泣)'으로 숲 속에 깔린다.
어떤 농도의 감성이든 받아들이는 평창의 가능성이다. 음악으로 하나가 되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말인가.
정서와 하등의 연결고리가 없는 개별의 음(音)이 세포와도 같다. 일정한 주파수와 진동을 가졌을 뿐인 각각의 소리들은 장인의 손끝에서 마디로 모아져 음악이라는 예술로 거듭난다. 단독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우리의 세포들이 결합해 기관을 형성하고, 생명체로 기동하는 신체를 빚어내는 신비와 다를 것이 없다. 시간을 타고 넘어 흘러야 정체가 드러나는 음악은 시간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옷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단지 음악을 음'악(樂)'이라고 명명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화되어 조합된 소리들의 모음이 '즐거울 락'이라는 결과만 가져올리는 없다. 음'비(悲)'도 될 것이고, 음'애(哀)'가 될 수도 있으며, 음'희(喜)'도 기꺼울 것이다. 그렇다고 순 외국어를 쓰기는 싫으니, 누군가 이 멋진 예술에 새 이름을 붙여주면 좋겠다.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누가 봐도 슈베르트가 주인공인 모임의 이름을 내세워 그의 친구들과 팬들은 한데 모였다. 자그마한 팬덤은 점점 확산되어 이제 슈베르티아데는 슈베르트의 음악이 연주되는 수많은 음악회의 별칭이 되었다. '오리지널' 슈베르티아데에서 슈베르트와 함께 한 친구들의 대화를 상상해 본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개성 넘치는 친구들. 그래서 '있을 법한' 슈베르트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요한 마이어호퍼: "친구야, 오늘 네 연주엔 아무래도 내가 얼마 전에 쓴 시가 딱인 것 같아. 노랫말로 한번 써 봐. 내가 흥행 장담할게."
모리츠 폰 슈빈트: "그렇지 않을걸. 이봐 슈베르트, 이 녀석들 뭐라 해도 믿지 마. 나 정도 수준은 돼야 조언을 하는 거라고. 그나저나 거기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있어 봐. 내가 취하기 전에 멋지게 스케치 하나 그려 줄 테니까."
프란츠 폰 쇼버: "야야. 지금 몇 시인지 알아? 건너편 술집 예약해 두었다니까. 쓰잘데기 없는 얘기는 내일 해장국 먹으면서 하고. 일단 가자고. 얼른."
요제프 폰 슈파운: "술이 문제가 아니야. 슈베르트, 내가 괴테 선생님에게 너 추천했다고 했어 안 했어? 일분일초가 아까운데 얼른 돌아가서 곡 작업 마무리해야 할 거 아냐. 야, 쇼버. 슈베르트 꼬드기지 말고 마시고 싶으면 너 혼자 마셔."
갑자기 등장한 나.
"오늘 연주 죽여줬어. 그나저나 슈베르트, 너 산 좋아하잖아. 한국이란 나라에 평창이란 곳이 있는데 경치가 기가 막히거든. 거기서 연주회 한번 하면 분위기 끝내줄 것 같은데. 어떻게, 내가 함 주선해 볼까?"
대관령의 슈베르티아데가 다시 감동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오색의 노을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