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곳의 어떤 것들
종교와 신에 대한 물음에 저는 참으로 미꾸라지 같은 대답을 하곤 합니다. 진리를 알 수 없는 티끌 같은 한 인간으로서 어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뭉쓰며 넘어간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참으로 심오한 주제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누구든 스스로의 답을 갖고 있어야 할 원초적인 질문과 대답이 아닐까요. 모태신앙과 같이 탄생과 동시에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다가도 문득 세상과 신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이 내면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정답을 알 수 없음에도 내 생각만이 옳다는 극단주의자들의 오만을 겪어내고, 더욱더 진지하게 유일한 진실이 무엇인지 탐구합니다.
각 종교에서 내세우는 믿음체계와 석학들의 깊은 고민으로 얻어낸 주장, 수많은 철학 이론과 신학의 재료들을 섭렵한 인물이 있다면 그 사람의 결론이 곧 신과 종교에 대한 정답일까요. 누구도 알 수 없는 답이니 누구도 뭐라 할 자격이 없습니다. 홍시같이 부스러지기 쉬운 지금의 내공을 뛰어넘어 단단한 단감이 될 때쯤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너무도 궁금하지만 지금 수준에서 저의 미꾸라지 같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순환하는 우주의 섭리는 뛰어난 과학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있겠지요. 빅뱅으로 비롯된 우주의 팽창과 항성의 출현, 그에 기생하는 지구와 같은 행성들의 탄생과 계산할 수도 없는 확률의 기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에서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 두뇌가 발달할수록 세상의 기원에 대해 고민하는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 고민을 하고 있는 나라는 인간이란 도대체 누구의 의지로 만들어지고 왜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근본을 끝없이 파고듭니다. 숱한 철학자와 성직자들이 나름의 답을 내놓습니다만 무언가 오직 하나의 진실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원리라 불리던 신이라 불리던 초월적인 그 무엇이겠지요. 이렇듯 세상은 돌아가는 축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지역별로 다양한 신앙의 형태로 나타나 그중 강력한 몇몇 종교가 지배적인 신앙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좁은 소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저로서는, 그 원리의 정점이라는 것이 여러 경전에서 나오듯 정말로 만물과 인간에 대해 판단과 판정을 하는 '인격신(人格神)'인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좋고 나쁘고를 분별하는 지극히 탁월한 '판단'능력을 발휘하며 우주를 경영하는 일정한 주체가 세상의 '원리'로 마땅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입니다. 결국 전 세계의 각 지역별로 구분되어 있는 유일신이란 선악을 판단하는 지능을 가진 존재가 될 확률은 낮고, 우리의 능력으로 이해하기 버거운 그야말로 '섭리'일 거라는 생각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주의 탄생과 죽음을 다루는 과학의 법칙만으로 해석되기엔 우주와 나의 존재'이유'가 허용치 않습니다. 물론 그 섭리 자체를 신이라 불러도 할 말은 없는 것이겠습니다만 나름의 신을 따르지 않으면 되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사후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종교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수단이 될 수 없고 단지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는 맹목적인 암기일 뿐이라는 것이 지금 저의 수준에서 떠벌릴 수 있는 정도의 답인 것입니다.
미꾸라지가 맞습니다. 무언가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 있다고 하니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양측의 비판을 면할 수 있겠고, 인격신의 판단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종교만이 정답이라는 말도 아니니 세상 다양한 신도들의 비판도 피할 수 있다는 뜻이죠. 아니, 비판을 받더라도 신랄하게 받을 소지는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소리입니다. 이렇듯 양다리를 넘어 멀티(multi) 다리를 걸쳐놓고 있다 보니 특정 종교의 깊이 있는 깨우침은 얻지 못했지만, 어느 종교의 성지를 가도 경건함을 공히 느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한편으론 자아비판의 여지도 드러납니다. 이도 저도 아닌 저의 생각은 결국 게으름이 만들어 낸 것인 듯합니다. 특정 종교나 섭리에 충실해 실생활에서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아왔다면 의심의 여지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겠지요. 안타깝게도 그리 실천하며 살아오지 못했으니 종교와 섭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라도 하며 앞날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어린 시절, 여행을 좋아하는 어머니 덕에 우리 땅의 방방곡곡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홍도, 울릉도, 비진도 등 섬 지역은 물론이고 특정 계절에 더 아름답다는 산과 사찰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동수단은 거의 고속버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운수회사별로 색깔을 달리했던 버스의 옆모습이 지금도 선하군요. 한진고속은 초록이고 한일고속은 하늘색, 광주고속은 빨간색이었으며, 속리산고속은 삼색 선이 그려져 있고 동양고속은 파란색이었습니다. 조그만 꼬마의 스케일로 우주선 같이 거대했던 버스를 자유자재로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는 우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스케치북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그림을 쉼 없이 그려 넣으며, 언젠가 꼭 고속버스 운전자가 되고 말 거라고 다짐했었지요. 목적지를 떠나 부모님과의 숱한 고속버스 여행은 저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다소 늦게 신도가 되시긴 했지만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럼에도 어릴 적 세 가족의 여행코스에서 산속의 사찰이 빠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스님이 있는 곳이라는 것 빼고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였지만 산사의 호젓함은 꽤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삼보사찰인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를 비롯해 많은 사찰을 순례했던 부모님이었지만 특히 동학사에서 갑사 코스를 으뜸으로 꼽으셨던 게 틀림없었습니다. 가장 많이 들어서 기억에 새겨진 사찰의 이름이었으니까요.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요, 부모님의 손을 잡고 나들이했던 곳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보고 싶은 충동이 요동치는 요즘입니다.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표현처럼 갑사는 가을에 제격이니 이왕이면 단풍이 드는 계절 찾아가야 하나 싶었지만 그때까지 기다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처럼 명찰로 명성이 자자하다면 봄인들 아름답지 않을까요. '춘'갑사를 느끼러 40년 만에 달려갑니다.
황매화와 죽단화
40년 정도의 시간이면 기억이 흐릿한 것이 정상이겠지요.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갑사로 올라가는 길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좀 훑어보고 가자는 생각으로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철이 철이니만큼 황매화 축제 개최에 관한 글들이 빼곡했습니다. 설마 하고 걸려있는 플래카드들을 살펴보니 역시 코로나19 여파로 축제를 연기한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는데요, 다른 축제도 아닌 제철 꽃 축제인데 연기가 가능한 건지 의심이 밀려왔습니다.
갑사로 가는 길은 노랑의 물결, 그 자체였습니다. 주차장에서 초입 부근은 위 사진 중 오른쪽 꽃이 대부분이었고 일주문에 가까워질수록 왼쪽의 꽃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황매화 축제라고 플래카드가 잔뜩 걸려있는 곳들 주변에 피어있는 것은 오른쪽 사진의 꽃이었습니다. 둘 중 어느 것이 황매화일까요?
매화를 아시는 분들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네, 왼쪽 사진이 황매화지요. 5개의 꽃잎을 가진 단아한 모습인데요, 그럼에도 저는 헷갈리고 말았습니다. 등산로 입구에 쭉 늘어선 축제장에 만발해 있던 것이 바로 오른쪽 꽃이었으니까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위에서 그게 아니라고 하니 속아 넘어간 꼴이었습니다. 잠시 후 진정한 축제의 주인공 황매화가 하나 둘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황매화라고 착각했던 것은 '죽단화'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를 헷갈리게 만든 녀석이지만 마치 노란색 팝콘이 터진듯한 겹꽃의 경쾌한 매력이 터지는 매력적인 꽃이었습니다. 꽃이 피는 순서도 황매화가 먼저, 죽단화가 조금 늦게 핀다고 하는데 갑사를 찾았던 시기가 죽단화의 전성기였던 거죠. 저 풍성한 꽃잎을 보고도 매화라고 착각한 저도 우습지만, 굳이 황매화 행사장 근처에 죽단화를 다량으로 심어 상춘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 역시 순리에는 맞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쁘면 된 거 아니겠습니까. 추갑사가 아닌 춘갑사를 가는 길도 충분히 아름다울 뿐이었습니다.
갑사 부도 승탑과 대적전
갑사 관음전 내부
대적전 내부
갑사(甲寺)는 춘마곡이라고 하는 그 마곡사의 말사(末寺)입니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에 있는 운치 있는 사찰인데요, 420년 고구려에 온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혜명대사가 중창했으며 679년 의상대사가 격을 높여 화엄십찰의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문화재로 철당간, 승탑, 동종 , 그리고 월인석보 목판을 갖추고 있어 말사라 부르기에 아쉬운 면이 없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름 자체가 '갑(甲)'이니 말사라는 지위가 영 어색한 게 사실입니다. 전국 곳곳에 빼어난 사찰이 많습니다만 웅장함을 느낄 수 있는 곳, 속세와 절연된 듯한 곳, 절연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사찰 등이 있을 텐데요. 신자가 아니어서 그 유래와 의미를 잘 모른다 해도, 방문의 목적에 맞는 사찰인지 사전에 검색해보는 것은 좋은 답사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이곳 갑사는 아름다운 계룡산 자락에 있지만 산속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방문객들도 꽤 눈에 띄는 곳이라 부담스럽지 않게 심신의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곳인 듯합니다.
신자가 아닌데 굳이 알아야 하나 싶지만 그래도 찜찜한 것이 있습니다. 이참에 확실히 하려고 마음먹고 정리를 해 봅니다. 사찰엔 띄엄띄엄 건물들이 있습니다. 무슨 이름도 그리 제각각인지요. 가장 귀에 익은 대웅전을 비롯해서 극락전, 대적광전, 미륵전, 약사전, 관음전, 산신각, 칠성각 등등 사찰의 종파와 역할에 따라 다른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고 하지요. 각(閣)은 전(殿)보다 격이 낮은 건물이라고 보면 될 듯합니다. 어느 종교를 불문하고 초기 발생에서 시간이 흐르면 분파가 생기고, 퍼져나간 지역에 따라서 추가적인 신앙 요소가 가미될 텐데요, 불교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 어떤 사찰은 미륵전이 있는데 어디는 없는 건지, 이곳은 이런 불상이 있는데 저 사찰은 전혀 다른 모습의 보살이 있는지 문득 궁금할 때가 있는데요, 이왕이면 간지러운 곳을 시원하게 긁고 자연과 그 속의 사찰을 찾는다면 마음의 평화가 더 수월하게 찾아오지 않을까요. 못 박힌 십자가의 예수님과 성물들, 성모 마리아의 여러 모습이나 이슬람 모스크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것을 알고 신성의 문턱으로 들어서면 그 감동도 배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수인의 종류
수인은 불상이나 보살상의 구분을 도와주는 손의 모양이고 석굴암의 석가모니불처럼 항마촉지인은 좌상(坐像)일 경우에만 해당되는 등 지켜질 것도 많습니다만 예외도 워낙 많습니다. 전각과 그 전각에 주불로 모시게 되는 불상 역시 위의 전형적인 분류에서 벗어난 예들이 꽤 많은데요, 당장 이곳 갑사의 대적전도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게 아니라 9품인 중 중품하생인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다른 사찰이었다면 극락전에 놓여 있어야 할 불상이지요. 형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종교의 전형입니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실물로 표현하는 것에 정답이 어디 있을는지요. 양식화된 성상과 엄숙한 공간의 배치는 인간의 미의식과 질서의 원리가 반영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지나친 형식으로의 집착은 피해야 할 일이겠지만, 종교의 원리와 인간의 미의 기준을 바탕으로 한 가람의 구성과 배치는 우리로 하여금 사찰의 전체 모습에서 아름다운 균형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보물 256호 갑사 철당간
갑사로 올라온 길과는 다른 경로를 선택해 내려가니 위풍당당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는 당간의 위용이 선합니다. 무려 15미터 높이라고 하는군요.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가운데 높이 솟아있는 당간(幢竿)과 길쭉한 당간을 양옆에서 밀착 마크하며 지지해주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비교적 본모습을 온전히 유지하며 서 있습니다. 당간지주 하나만 남아있는 곳은 많아도 이렇듯 당간과 지주가 함께 남아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하니 갑사의 철당간은 보물 이상의 가치가 있는 셈이겠습니다. 당간의 몸통은 각각의 철통을 쌓아 올린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요, 원래 28개의 철통이 대나무처럼 쌓여있었으나 그중 4개가 부러져, 지금은 24개의 철통만 솟은 모습이라고 합니다.
당(幢)은 긴 당간의 끝에 연결된 용이나 여의주들의 형상을 한 장대와 그 장대에 매달린 깃발을 뜻하는 장엄물입니다. 기다린 당간에 또 매달린 당이니 깃발이 달린 전체 높이는 조금 더 높아졌겠지요. 당간의 재료로는 나무와 돌, 철이 사용되었지만 훼손되기 쉬운 나무 당간은 거의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갑사의 철당간을 지지하는 당간지주의 높이만 해도 3미터에 이른다고 하니, 상당한 규모임에 틀림없습니다.
갑사의 당간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시간을 조금 더 뒤로 돌려 불교의 전성기였던 고려시대로 타임슬립을 잠깐 해 볼까요?
오늘은 갑사 큰 스님의 법회가 있는 중요한 날입니다. 하늘 높은 당간 끝에 매달린 범패(梵旆) - 깃발 - 가 바람에 크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요사체에 머물고 있던 스님들이 종종걸음으로 절의 앞마당으로 모여드는군요. 왕조의 번영과 불법 세계를 성취하자는 큰 스님의 일갈에, 흐트러졌던 마음에 번쩍하고 번개가 내려칩니다. 저녁 예불 전에 대적전의 서까래와 포작을 깨끗이 닦아야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아, 그전에 당간에 걸려있던 범패를 내려야지요. 깃발의 크기가 상당해 스님 네 분이 안간힘을 쓰며 당간에 밀착해 조금씩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다음 법회를 위해서 깃발의 먼지도 말끔히 털어내야 할 것입니다. 바람은 불었지만 하늘이 맑아서 범패가 젖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보통은 사찰의 경내 중심이 되는 곳에 당간을 세워놓는다고 하지만, 갑사의 철당간은 전각이 위치한 중심과는 다소 동떨어진 내리막길에 서 있습니다. 과거엔 이곳까지가 사찰의 주요 경내였던지, 아니면 법회나 중요 행사들이 열렸던 곳이 경내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이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당간의 끝에 나부끼는 깃발의 모습을 지금의 사찰에서는 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상상만으로도 어렵지 않은 재연입니다.
다람쥐 한 마리가 산을 내려가는 길에 배웅을 해 줍니다. 다람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언제였나 싶군요. 고맙게도 금세 도망가지 않고 바로 옆에서 사진의 모델이 되어 줍니다. 갑사로 오르내리는 길은 반듯하게 포장된 길과 함께 작은 계곡을 따라가는 숲길도 있어 방문객의 숨이 한층 청량해집니다. 깨끗한 섬에 살면서도 시내로의 출퇴근만 반복하며 살고 있는데요, 가끔은 한라산의 다람쥐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지, 세상과 우주라는 것은 어떤 공간인 것인지, 삶과 죽음, 신과 종교의 의미는 무엇인지 다소 묵직한 마음으로 일주문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굳이 성급하고 설 익었을지도 모르는 답이 주어지지 않아 좋았습니다. 사찰 그 자체만 담아가기에도 모자란 마음의 크기니까요.
전화위복의 예는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지만 탄압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든 사찰 역시 그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깊은 산속으로 밀려나 교세 확장에 있어 지극히 불리함을 겪어왔다면 한편으로는 같은 이유로 속세에 지친 많은 인생들을 수없이 불러모았던 것입니다. 전통건축의 향기로 가득한 경내의 분위기도 물론 한몫을 했겠지요. 교회나 성당도 속세와 절연된 곳에 자리 잡았다면 신비스러운 곳이 얼마나 많아졌을까요. 무엇보다 요즘은 코로나19의 위협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사실이, 산속에 고요히 자리 잡은 사찰의 축복이 아닐까 합니다.
종교에 대한 물음에 나름의 주관이 있는 듯 주저리주저리 하여도 산사의 고즈넉함과 하늘과 숲의 기운, 그 품 안에서 빛나고 있는 모든 생명들과 신비로운 기억들을 느끼고 있으려니, 창조자가 아니면 누가 이 모든 것들을 빚어놓았을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니 그저 이 세상에 고마워하며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정답이 맞는 건지 고민을 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봄날 갑사를 찾은 길에서 따사로움과 편안함을 온몸으로 끌어안을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인연들이 모두 미혹함이 없이 평안하게 이 세상 살아가시기를 바라고요, 치열한 삶의 페달에서 잠시 발을 내려놓고 자박자박 걸어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이 더 많아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갑사에서 내려오는 길, 잠시 눈을 감아봅니다. 40년 전의 기억이 뚜렷하진 않아도 어슴푸레 피어오릅니다. 가운데에서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갑사로 올라가는 초등학생이 보이는군요. 엄마는 젊고, 아빠는 절뚝거림 없이 성큼성큼 잘도 걸어가십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장면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있다면 다시 두 분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요?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그대로 여야 하니 가능성이 낮아 보입니다. 만약 부모의 관계가 뒤바뀐다면 좀 더 현실적인(?) 윤회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 인연이 다시 이어질 먼 훗날엔, 제가 아빠가 되어서 두 분의 손을 잡고 산을 올라야겠습니다.
그때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