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터카를 김포공항에 반납하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제주를 떠나 육지부를 며칠 돌아다니려면 차를 빌리는 것이 효율적이니, 단골 렌터카 회원으로서 포인트는 쑥쑥 쌓여가는 반면 육지 나들이에 들어가는 비용도 쌓여가 출혈이 만만치 않습니다. 제주에 살면 택배비용도 무시 못할 정도로 들고 자동차 기름값도 비싼 데다 이렇듯 볼 일이 있어 다른 지방으로 갈 때면 비행기 외에 특별한 수가 없으니 상대적 박탈감도 상당하다 하겠습니다. 비용을 떠나 원하는 바로 그 순간에 갈 수 없을 때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그 이상의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제주에 살고 싶어 하는 분들도 계시니, 제주섬이라는 멋진 보금자리를 분양받기 위한 프리미엄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요.
당산역
꿈에서 등장하는 나의 집은 언제나 이 동네입니다. 오랜 시간 보금자리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찌 당산동의 집만 줄곧 출몰하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 후 이사를 하며 거친 여러 동네들에 미안할 정도입니다. 아직도 머릿속에 선한 방 안의 책상과 TV를 보고 계신 아버지의 뒷모습, 주방에서 미역국을 끓이는 어머니의 옆모습이 수도 없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5층 창문 밖을 내려다보면 친구들이 꺄르르 다방구를 하며 뛰어다니는 중입니다.
머리와 마음속 본능으로 새겨진 기억의 공간을 찾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었다고 이곳을 떠난 뒤 단 한 번도 찾지 못했을까요. 팍팍한 현실로 인해 감정이 탁해져 무미건조해진 것도,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했던 것도 핑계에 불과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 서울에 올라와 2호선 전철을 타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배경을 바꾸는 당산역을 통과하며 주변을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언뜻 봐도 고층빌딩의 숲으로 변해버린 인상이 강렬해서 그랬는지요, 전철에서 내려 어린 시절의 거리를 걸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직접 동네를 샅샅이 돌아다녔는데도 지난날의 흔적이라곤 아무것도 찾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고 말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상대가 얼마나 두려울지는 직접 부딪혀 봐야 알 수 있겠지요. 마음을 단단히 조여매고 당산역 플랫폼에 발길을 내려놓습니다. 9호선이 정차하며 구조가 바뀌긴 했어도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함이 배어옵니다. 역시 부딪혀 보는 게 최선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주변이 바뀌었다 할지라도 역은 거의 본모습 그대로였으니까요. 강북으로 2호선을 이어주는 역할을 짊어진 당산역은 1980년에 완공되어 초등학교 시절부터 눈에 익은 건물이니 솟아오른 지상의 역사(驛舍)는 지금도 그 역사(歷史)가 켜켜이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당산역 대각선으로 보이는 높다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바로 꿈에 등장하곤 하는 '강남아파트'가 있었던 현장입니다. 지금 서 있는 대단지 아파트 상가에 '강남'중국집, '강남'부동산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것이 신기하고도 반가웠습니다. 이 주변이 흔히 부촌을 뜻하는 그 '강남'이 아니기 때문에 상가에 걸린 '강남'표기는 예전 아파트의 흔적임에 틀림없겠습니다. 그러나 그뿐인지요, 보도블록 위를 따라 걸어봐도 큰길의 방향만 익숙할 뿐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어느 동네가 40년이란 시간의 무게에 그 온전함을 간직하고 있을지요. 기대를 안 하니 실망도 없었습니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라도 된 듯 모교를 향한 등굣길을 더듬어 갑니다. 자박자박 걸어 큰길의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도는 순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 이 건물이 남아있다니요!
영등포 중앙교회
아파트와 초등학교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터에 갑자기 등장한 기억 속의 건물이라 그 자리에 한동안 얼어붙듯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을 길거리에서 만난다면 이런 느낌일까요. 한참 반가움을 만끽하고 난 뒤에는 고마움이 밀려왔습니다. 한참만에 찾아온 전(前) 당산동민을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맞아주고 있었으니까요. 교회의 오른쪽 뒤편이 제가 살던 아파트가 있던 곳이고, 교회 앞길의 왼쪽 방향이 등굣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지금 보아도 교회의 외관이 최소 사오십 년 된 건물의 그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지 않은지요. 덕분에 교회 뒤 왼쪽 50미터쯤에 친구 기영이의 집이 지금도 있을 법했습니다. 교회 앞에서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하는 순간, 정문에서 아주머니 두 분이 나오시더니 "어떻게 오셨어요?" 하십니다. 어색하게 서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수상하게 보였나 봅니다. 코로나19 방역요원으로 착각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얼굴에서 약간의 긴장감이 읽혔으니까요.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듯해 분명 동네의 과거를 담고 계실 거라 믿고, 근질근질했던 걸 다 뱉어내는 심정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여기 뒤에 있던 강남아파트 살았는데요, 오랜만에 왔는데 아니 이 교회가 그대로 있더라구요. 초등학교 때 여기 다녔거든요."
"아, 강남 아파트 알죠, 나도 거기 살았어, 반갑네요. 그나저나 그 옛날에 다녔으면 ○○○집사님 알겠네?"
"아.. 그렇게까지는 잘..."
"......"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모든 종교에 열려있다는 것을요. 1970 ~ 1980년대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폭풍 성장하면서 대부분의 동네 꼬마들은 일요일 아침, 교회로 향했습니다. 세상 제일 먹기 아까운 달걀이 주어지는 부활절이나 성탄절은 말할 것도 없고요. 주일마다 신실하게 예배를 다니는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교회를 가서 학교 친구들을 또 보는 자체가 목적이었던 터라 나이롱(?) 신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멋진 교회는 그 자리에서 이기적인 신자를 기다려주고 있었네요. 시야에 들어온 한 교회의 모습이 프레임 속에 들어간 사진이 되어서 다른 추억 속 사진첩까지 넘기게 만들어줍니다. 무언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은 왜 이다지도 큰 힘이 될까요. 먼 곳을 돌고 돌아 다시 그 자리에 온 출타인을 변함없이 맞아준다는 건 쉽지 않은 덕(德)이라 생각합니다. 건물 한 동이 이렇게 고마운데 언제 돌아가도 나를 맞아줄 '사람'이 있다면 도대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낡고 색이 바랜 교회건물에서 지나친 감수성의 폭발이 아닌가도 싶지만, 큰 정은 담백하고 영원하다는 '한정담원(閑情淡遠)'은 바로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두 분과 사진을 찍었어야 했다는 걸 인사를 하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어떤 공간이라도 사람이 그곳을 스칠 때 의미가 생겨나는 법인데 말이죠. '아, 그걸 깜빡했네' 하는 탄식은 해가 갈수록 잦아집니다. 아무튼 예전 그대로의 교회에서 마음이 따뜻해졌으니 이건 예수님 덕분으로 돌려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멘.
영동초등학교 정문과 학교 건물
영동'국민학교' 6학년 3반을 졸업한 뒤 36년이 지나 다시 찾는 길, 그토록 꿈에 자주 출몰하는 경로인데 졸업 후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집에서 학교까지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는 자부심이 무색하게, 다시 걸어본 등굣길은 아쉬울 정도로 짧습니다. 어른이 되어 길어진 다리 때문이라기보다는 광폭으로 넓어진 공간 개념 때문이겠지요. 고층건물이 밀집한 공간에서는 거리 감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고요, 지평선이 안보이니 꽉 막혀 좁게 보이는 효과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밀도가 높아진 이 세상은 그만큼 공간도 축소시켜 버린 듯했습니다.
연어에 빙의되어 옛날 등굣길을 따라가니 있어야 할 그 자리에 학교가 있었습니다. 회색빛 일색이었던 과거와 달리 알록달록한 총천연색이 그다지 촌스럽지 않게 칠해져 있었고, 덕분에 세월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더 깔끔해진 외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차단기를 지나 교정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정문을 지키는 분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제 자신이 초딩이 아닌 시커먼 아저씨란 현실을 문득 깨닫고, 옛날 이곳 졸업생인데 잠시 들어가 사진 몇 장만 찍어도 되겠느냐 물었습니다. 약간은 수상하다는 눈길이었지만 "요즘은 외부인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니까 요 앞까지만 얼른 들어갔다 오세요." 하고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처음 보는 체육관 건물 외엔 모든 게 그대로였습니다. 심지어 작아 보일 것 같던 운동장도 어릴 때 느꼈던 크기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여 안도감마저 들었습니다. 달리기를 곧잘 하던 편이어서 운동회 때 릴레이 반대표로 죽어라 뜀박질하던 순간도 떠오르고요, 신발주머니 돌려가며 교실에서 뛰어나오던 기억도 생생했습니다. 그때 그 녀석들은 뭘 하고 있을까요. 동창들에게 무심했던 탓이 제일 크지만 세월도 흐를 만큼 흘러 각자의 흔적을 더듬기엔 무리인 것도 사실입니다. 다들 건강히 큰 탈없이 잘들 지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쌩쌩해야 할 나이니까요. 그렇지 친구들?
6학년 3반입니다. 그리운 얼굴들
예전 사진이 싹 없어진 것 같아 생각도 못했는데 부산에 계신 어머니가 깊숙한 곳에서 찾았다며 앨범을 택배로 보내주셨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눈물도 찔끔 훔쳐보고 이렇게 개인적인 사진도 올리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학교가 굳건한 존재로 힘이 되었다면, 가장 실망스러웠던 것은 학교 앞 문방구의 부재(不在)였습니다. 그렇습니다. '~~ 문구'가 아닌 '문방구'입니다. 쭈그려 앉아야 하는 오락기계와 쫀드기, 딱지와 물체 주머니를 파는 곳은 '문방구'여야만 합니다, 그렇고 말고요. 수업을 마치자마자 릴레이 때보다 더 빨리 돌진해 가야 할 목적지인 것입니다. 그곳에선 아침에 엄마에게서 받은 용돈 400원으로 할 것이 무궁무진했습니다. 파는 것들은 달라지고 간판이 달라졌을지라도 분명 그 자리에 있을 거라 믿었던 문방구였습니다만, 학교만큼이나 그리웠던 그곳은 이제 없었습니다. 아쉬운 대로 주변의 문구사라도 찾아볼 심산으로 근처를 이 잡듯 뒤졌는데도 한 곳도 눈에 띄지 않더군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초등학교 주변에 문방구가 없는 게 실화인 겁니까? 상실감으로 가득한 아재의 분풀이가 발동합니다. 그렇다면 요즘 초등학생들은 필기도구를 어디서 산다는 건지요. 이마트에 가서 1년 치를 한꺼번에 산단 말입니까? 실물을 보지도 않고 무조건 온라인으로만 구매한답니까? 이 정도라면 주변 상권을 분석해 볼 필요도 없이 학교 앞에 문구사 하나 차려도 좋겠습니다. 선점효과를 누리려면 얼른 돈 벌어서 하나 차려야겠습니다. 물론 그전에 그놈의 은행 빚부터 갚아야겠지만요.
문방구는 편의점이 돼 버렸습니다
학교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옛날 돈가스'를 메뉴로 골랐습니다. 오늘은 복고 데이니까요. 지갑 속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며 계산을 하려니 잔돈을 갖고 계실까 걱정이 되어서 현금 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직원 분은 웃는 얼굴로 당연히 된다고 하시더군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카드 돼요?"도 아니고 "현금돼요?" 라니요. 오늘처럼 작은 식당에서는 카드결제가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생각했던 게 불과 얼마 전 같은데 이젠 현금이 통할지 물어봅니다. 실제로 회사의 구내식당에서도 현금을 가지고서는 계산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의 삶에서 획기적으로 바뀐 것들이 너무도 많은 게 사실입니다.
라틴어라는, 명칭은 익숙하지만 그 속은 미지의 영역인 언어를 조금이라도 접해보신 분들 중에는 한동일 님의 책이나 강의가 계기가 된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라틴어 수업>으로 많은 독자들의 찬사를 받은 한동일 님은 동양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이자 교수이시죠. 특유의 따뜻하고 솔직한 말과 글을 포개서 라틴어 그 이상의 지혜를 전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렇듯 살아온 과정을 담백하게 풀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러워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 분의 글이나 강의에는 잔잔한 감동과 함께 라틴어의 구절들이 소개가 되는데요, 라틴어 수업인데 그래야겠지요. 책 속의 많은 라틴어 글귀 중 가장 유명한 문장이 있습니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문장 앞부분의 우리말 발음이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합니다만, 오히려 그래서 암기가 어렵지 않은 듯도 합니다. 로마인들이 편지를 쓸 때 첫머리에 의례적으로 넣는 인사말이라고 하는데요,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 되었네요, 저도 잘 지냅니다."라는 뜻입니다. 요즘 메일을 보내는 대신 편지 쓰는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만 글의 시작에 앞서 건네는 인사말로는 아주 인상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냥 "잘 지내죠?"도 아니고 "잘 지내실 거라 믿습니다. 그렇죠? 네, 참 잘 된 일입니다.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란 의미일 테니까요.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해석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잘 지낸다면 잘 되었네요."하고 끊지 않고, "당신이 잘 지내셔야, 그때야 비로소 나도 잘 지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조건절을 하나 더 붙이겠다는 겁니다.
"당신이 잘 못 지내고 있다면 나도 절대 괜찮지 않아요, 나도 덩달아 우울해지는 걸요. 아마 몸이 아파질지도 몰라요. 그러니 무조건 잘 지내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하는 협박에 다름 아닌 것이죠.
내가 잘 살아가는 필요충분조건이 바로 당신이 잘 지내는 것이라면 이보다 더한 애정표현이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소중한 인연과 더불어 "잘 지내시죠? 만약 그렇다면 나도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하고 빙긋이 웃으며 묻고 답할 수 있다면 지구에서의 이 삶이 티 없는 푸른 하늘만큼, 반짝이는 열대의 바닷속만큼 한없이 투명해질 것 같습니다.
40년 만에 마주친 교회와 어르신들, 꿈에도 그리운 집이 서 있던 그 자리, 왼쪽 가슴에 푸른색 이름표를 차고 뛰어다니던 학교와 문방구, 무엇보다 친구 녀석들과 선생님들에게 이 글귀를 바로 써먹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