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봉의산 가는 길」
가 본 김에 글을 쓰는 건지, 글을 쓰기 위해 다니는 건지 헷갈린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다짐했던 글쓰기에 지쳤다 싶으면 기분전환 삼아 내키는 대로 강원도를 주유하면 되고, 게을러지는 어느 주말엔 맘 굳게 먹고 글감으로 감추어두었던 그곳으로 떠나면 된다. 헷갈릴수록 나들이의 핑계는 무궁무진해지는 것이다.
동반자가 있는 드라이브에서는 편집증이 도진다. 버려야 할 습관이다. 뒷자리에 앉은 아들은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에 집중한다. 딸은 탑승하자마자 수면부족인양 존다. 그것도 멀미의 한 종류라면서. 놓치기 아까운 풍광이 차창을 스치기 직전에 옆 좀 보라고 나는 채근한다. 이런 게 꼰대가 된다는 거구나, 흠칫 자괴감이 드는 동시에 풍경을 보는 척해주는 녀석들이 고맙다.
벗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적어도 그럴 걱정은 없다. 강원의 산하를 눈에 담아 가려는 목적으로 온 것일 테니까. 내가 그들보다 나은 것은 결정적인 파노라마 스폿을 알고 있다는 것과, 아는 한도 안에서 특정 공간의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장면을 앞두고 시선이 엉뚱한 곳으로 옮겨가는 친구를 감지하면 그러니 여지없다. 이거 놓치면 후회할 거라고. 환희의 순간을 놓치게 하지 않겠다는 우정의 증거가 아닌가.
여행이라 마음먹은 길 위에서는 아날로그가 답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출발해 거기에 도착하는 게 끝이라면 '점프'일뿐이다. 물론 보통의 출근길에선 디지털이 효율적일 것이다. Teleportation, 순간이동이 가능하다면 꿀인 것이겠고. 논두렁 위로 신기루처럼 퍼지는 여명이 일품인 나의 출근길은 다르다. 날마다 변하는 차창의 풍경은 직장인의 출근 스트레스를 완화해주고 있으니 아날로그의 효용을 매일같이 누리고 있다. 유리창닦개처럼 땅을 차와 함께 쓸어가며, 풍경의 변화와 함께 길의 휨과 고저를 온전히 몸속으로 누적시켜야 한다. 그래야 목적지에 도착한 나의 세포 속에는 여정의 궤적이 새겨지는 것이다. 끊어지지 않는 흐름. 여행만큼은 아날로그여야 하는 이유다.
이동과정의 아날로그만으로 성에 차지 않을 때 그리운 곳이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춘천이다. 강릉에서는 유난히 멀게 느껴지는 곳. 영서에서도 수도권과 인접해 실제 거리도 멀지만 심리적 거리도 만만치 않다. 태백산맥의 정점에서 극적으로 떨어져 내려 창대한 대양을 접하는 해안의 삶과, 근원에서 확장된 두 강물이 합장하는 분지에서의 삶이 같은 수는 없을 것이다. 합강(合江)의 공간에서 영동과 영서의 조화를 그리고 싶다. 인제에서 솟아올라온 물줄기가 널따란 소양강이 되어 전경에 가득 찬 곳,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 등산로가 코앞에 놓인「봉의산 가는 길」이다.
겨울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첫눈이 날리는 소양강의 야경을 이 카페에서 바라본 적이 있다. 오래된 창틀이 프레임이 되어 창밖의 실상이 황홀한 허상이 되어버린 그 순간의 이미지는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3년이 지난 지금은 혹한이 무너져 내린 겨울과 봄의 교체기여서 회색과 황색의 앙상블이다. 머지않아 소양강변 벚나무에는 핑크빛으로 터져버릴 팝콘이 망울 속에서 부풀어 오르겠지. 올 겨울의 위협도 견뎌 낸 봉의산 아랫마을에는 초록빛의 잔디가 윤기를 자랑하며 융단으로 깔려있겠지. 비린내 나는 장마철에도, 수런수런 모든 것들이 생명력 넘치는 한여름에도 카페의 창밖을 조망해야겠다.
「봉의산 가는 길」앞에서 360도를 돌아 소양로와 봉의산 등산로 입구, 소양강을 눈에 담은 뒤 가게 문을 열었다. 수 없이 많은 가내수공업자들을 고객으로 둔 노정균 대표가 함박웃음으로 못난 동생을 환영한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노정균 대표의 단골 무리인 '가내 수공업자'란 시인, 소설가, 화가, 조각가, 음악가들이다. '공업'까지는 몰라도 가내 수작업자임에는 틀림없다. 강원도의 자연과 사람 이야기를 글과 노래로, 그림으로 부활시켜 온 이들이 참새라면 「봉의산 가는 길」은 방앗간이다. 문화예술인들의 만남의 공간으로서 소박한 역할을 해 온 것은 물론이고, 소규모의 문화 이벤트도 꾸준히 열어왔다. 고전명화 상영회부터 시 낭송회, 하우스 콘서트까지. 도무지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문화 행사는 없는 것 같다. 피아노와 그림, 그림 같은 창이 있는 이곳이 각계 수공업자들의 방앗간이라면 노정균 대표의 의지가 아니었어도 풍성한 문화의 향기는 떠날 날이 없었을 것이다. 소슬하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애도 카페'로 운영되었을 때이다. 애도 키페는 지난 2022년 춘천문화재단의 '도시가 살롱' 프로젝트의 하나였는데, 말 그대로 죽음과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극복하는 모임의 장이었다. 이런 카페의 원형은 그리 오래된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지난 2004년 영국의 한 인류학자는 죽음을 주제로 하는 대화의 공간으로 카페 '모텔(Mortel)'을 만들었고, 이곳에 온 손님들은 죽음과 관련해 편안하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건, 평소에 생각하는 죽음 뒤의 세계관이건, 죽음으로 가는 노화의 준비 작업이건, 누구에게나 100퍼센트 닥쳐올 죽음을 일상의 공간으로 가져와 서로 다른 생각을 공유한 것이었다. 여기서 '데스 카페(Death Cafe)'가 탄생했는데, 데스 카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이런 죽음 이야기를 공유하는 카페를 통칭해서 부르는 용어가 되었다. 죽음을 유난히 터부시 하고, 삶과 죽음의 공간을 분리해 오기만 했던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고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을 텐데, 「봉의산 가는 길」은 데스 카페의 다른 이름인 애도 카페로 운영됐던 것이다. 당시 부모나 배우자,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상실을 위로하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한다. 글과 그림, 음악이란 것이 결국 슬픔을 위로하고 그럼에도 찬란한 삶을 상찬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애도카페로서의 이 공간은 문화예술의 끝판왕이었던 것이다.
노정균 대표를 소개해 주었던 존경하는 춘천의 선배 아나운서까지 우리 셋은 이날 밤에도 어김없이 강원도 전통주를 음미했다. (만만치 않은 양이었어도 음미한 건 사실이니까) 높은 알코올도수에도 누룩의 고급진 풍미가 전신에 퍼지는 건 늦겨울, 썩 포근한 경험이었다. 안부에서 시작된 대화의 가지는 엉뚱하게도 동물로 뻗어갔다. 봉의산이 5미터 전방부터 솟아있는 카페의 위치상 그럴 수도 있겠으나 산에서 막 내려온 멧돼지와 마주친 이야기, 잡지 말아야 할 뱀을 잡은 이웃이 시름시름 앓다 몹쓸 병에 걸리고 말았던 공포 스토리에서, 흥부에 빙의해 다친 새를 보듬어준 감동의 일화까지. 포유류에서 조류, 파충류를 아우르는 노정균 대표의 동물사랑 시리즈는 그 자체로 내셔널 지오그래피였다.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쿵하면 짝 아닌가. 나 역시 10년 이상 시골살이에서 맞닥뜨린 동물이 얼마나 많았는지. 재회의 기쁨에 더해 이날 밤 우리는 원초적인 생명 이야기의 배틀로 깊은 밤을 재촉했다.
각오는 했지만 이튿날 아침의 숙취는 타격감이 있었다. 해발 300미터 갓 넘는 산 정도는 쉽게 오르겠지 싶어 해장 등산을 마음먹었던 것인데 이건 장난이 아니다. 도심 속으로 들어온 춘천시민들의 앞마당 동산이 이렇게나 버겁다고? 올라가는 사람 하나 찾을 수 없을뿐더러, 미끄러지기 십상인 오르막은 안전 밧줄이 설치돼 있을 정도로 급경사 구간도 많다. 여기가 춘천시내라고 누가 믿겠는가. 생수도 챙겨 오지 못했다. 후회막급이다. 혀는 말라가고 숨은 아슬아슬하다. 알코올의 역습이 아니었다면 폐활량에 도움이 되는 운동이었을지 모르나 숙취 상태의 봉의산은 차라리 봉'악(岳)'산이다. 다 내 탓이다.
청설모다.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들려 십여 미터 앞을 보니 녀석이 견과류 껍질을 이빨로 까고 있었다. 경계심이 없는 듯 보였는데, 그제야 도심 속 산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녀석도 오고 가는 등산객들을 얼마나 많이 목격했을까. 지난밤을 불태운 동물 이야기 덕인지, 홀연히 나타난 청설모 한 마리가 숙취와 체력 고갈로 정신 못 차리는 이방인의 비타민이 되어주었다. 정상이 눈앞이다.
인터넷의 자료들에서는 301.5미터, 정상의 안내석은 300.3미터로 해발을 알리고 있다. 나이 들어 굽는 사람의 몸처럼 산허리의 척추가 눌려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힘들게 올라온 얼치기 등산객에게 선명한 풍경은 주어지지 않았다. 남쪽 방향 춘천시가지의 모습은 자욱한 안갯속에 묻혀 반투명 창을 통해 바라보는 외경과도 같았다. 맑게 갠 날이었다면 도심 너머 구절산이 보였을 것이다. 동쪽엔 대룡산, 서쪽 삼악산에 더해 북쪽 소양강 너머엔 북배산이 어렴풋하지만 위엄 있게 서 있다. 봉의산을 호위하는 사방의 지킴이들이다. 감성이 남달랐던 우리의 선조들은 주위를 둘러싼 산들을 꽃잎으로, 가운데 봉의산을 꽃술로 표현했다. 꽃 속에 아늑히 묻혀있는 춘천은 그러니 얼마나 향기로 가득할 것인가. 춘천은 꽃잎들이 감싸고 있는 천연요새 형국의 분지다.
춘천이 굳건한 도청 소재지가 될 수 있었던 계기는 상호 역방향의 역사였다.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이다. 나라에 재난이 닥치거나 전쟁이 닥쳐 정궁을 쓰지 못할 경우 임금은 별도로 조성된 '이궁(離宮)'에 기거했는데, 재난이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많은 조선 후기 왕들은 창덕궁처럼 아름다운 이궁에 머물기를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한양 정궁이 위태로워지면 이궁도 무사할 가능성이 낮았다는 것이다. 경복궁에서 창덕궁까지는 산책을 해도 적당할 거리인데, 전쟁의 포화가 어디 둘 중 하나의 궁에만 쏟아질 수 있을까. 따라서 국가적 위기 상황에 닥쳤을 경우엔 지방에도 별도의 이궁을 두게 되었고 그중 하나가 춘천의 이궁이었다. 신미양요와 갑신정변으로 불안정한 시국에 고종은 천연 요새인 춘천을 피난처로 점찍었고, 이를 기점으로 춘천관찰부는 강원도 관찰부로 승격해 강원의 수부(首府)가 되었다.
두 번째 계기는 민간의 힘으로 깔린 철도의 힘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이 개통된 지 40년이 지나도록 강원도의 수부 도시 춘천과 서울을 잇는 철도는 없었다. 이에 일제는 경원선이 지나는 철원으로 강원도청을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고, 도청 소재지로서 위기를 감지한 춘천의 유지들은 십시일반 철도건설자금을 모아 1939년 경춘선을 개통하기에 이른다. 1971년 경춘선은 청량리 역을 연결하며 낭만의 노선으로 거듭났고, 청량리-춘천의 앞글자를 딴 '청춘열차'는 작명의 수월함 만큼이나 수많은 청춘들을 태우고 서울과 강원도를 사뿐히 오가고 있다. 역사 스펙트럼의 두 지점에서 왕가의 선택과 민간의 의지가 오늘의 강원도청사 소재지 춘천시를 있게 했다고 하면 과장일까.
이렇게 억울할 데가. 물론 내가 올라온 소양정 코스 말고 다른 등산로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올라가고 내려갈 때가 다른 루트였으면 했던 것이다. 정상에서 세종호텔 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등산길에 비하면 융단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등산을 세종호텔 코스로, 하산을 소양정 코스로 잡았을 것을. 준비에 소홀한 영혼은 육신의 고통을 낳는 법이다. 좋게 생각하기로 하자. 내리막 흙길에서 미끄러졌다면 청설모에게 구조를 요청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먼저 맞은 매는 부실한 허벅지에게도 위로가 된다.
봉황의 위엄 가득한 형상을 닮았다는 봉의산은 '춘천의 진산'이라고 간결히 부르기엔 한참 모자라는 무엇이 있다. 몽골 침략의 기세를 멈추게 했던 결사항전의 현장이라는 엄숙한 과거를 바탕으로 봉의산은 춘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번듯한 국도가 깔리기 전 화천과 양구로 가는 유일한 길목이었던 소양로는 산의 북쪽을 휘감고 돌았다. 의암댐과 소양강댐이 건설되고 후평산업단지가 들어서며 봉의산은 가파른 개발의 역사를 목도했고, 산의 앞뜰이라고 불려 '전평리(前坪里)'란 지명이 있었던 근화동은 지금은 없어진 캠프페이지가 주둔했던 곳이다. 주한미군과의 50년 공생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춘천시민의 심장에 새겨놓았는지. 봉의산 남쪽 기슭의 호젓한 터엔 도민의 삶을 책임지는 강원도청이 있다. 춘천사람들에게 봉의산은 지나온 삶의 증거이자 살아갈 삶의 기둥이다. 산은 삶이다.
소양강 처녀상
「봉의산 가는 길」에서 길을 건너면 바로 강변이다. 왼편을 바라보면 소양 2교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1951년 미군이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만든 나무다리가 원형이다. 1960년대에 콘크리트로 재건축해 지금은 6차선의 광폭 다리가 되었다. 다리 밑으로 이어지는 둔치길을 걷다 보면 춘천의 상징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2005년 춘천시민의 날을 기념해 강변에 세워진 소양강 처녀상이다. 이 처녀가 왼손으로 쥐고 있는 것은 뭘까? 해 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슬피 우는 두견새가 있던 외로운 갈대밭의 갈대다. <소양강 처녀>는 1970년 김태희(본명 박영옥)가 불러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고, 잊을만하면 리메이크하는 후배 가수들 덕분에 국민가요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소양강 처녀>의 그 처녀는 상상의 인물이 아니다. 모델이 있다.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연습생? 춘천 출신의 가수 지망생 윤기순이 그 주인공이다. 60년대 후반에도 메이저 엔터테인먼트의 본고장은 서울이었다. 서울가요작가동지회에서 연습생으로 노래를 배우던 딸을 생각한 아버지는 딸의 꿈을 위해 도움을 주던 가요계 관계자들을 춘천으로 초대했다. 윤기순의 아버지는 소양강변에 살던 어부였으니 감칠맛 끝장인 민물매운탕을 제대로 대접했음이 틀림없다. 춘천을 찾은 관계자 중에는 스타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소양강을 건너던 중 배에 타고 있던 윤기순의 인상을 포착해 <소양강 처녀> 가사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찰나를 잡아채는 능력은 예술가들의 양보할 수 없는 본능이다. 김태희가 아닌 열여덟 딸기 같은 가수 지망생 윤기순이 이 곡의 주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리워서 애만 태운다고 고백하는 1인칭의 노래가 되었겠지.
소양강 처녀상을 지나치면 스카이워크가 강의 복판을 향해 뻗어있다. 별 거 있겠어? 해도 막상 발을 들여놓고 나면 당최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투명한 바닥은 노골적인 자연의 민낯을 드러내며 정수리에서 팝콘이 터지는 듯한 짜릿함을 선사한다. 요즘 웬만한 경승지에는 스카이워크 건설이 대세다. 이것도 공포 마케팅인가.
스카이워크의 직선과 하필이면 평행으로 겹쳤다. 멍청한 구도로 사진을 찍은 나의 잘못이다. 하얀 기둥이 있는 스카이워크 바로 뒤에는 스카이워크와 비슷한 길이로 메워진 평탄화 작업 현장이 보인다. 강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렸을 기초 구조물의 수면 위 노출은 여기서 끝나겠지만 가상의 연장선을 따라 강바닥 아래로는 터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춘천에서 화천, 양구, 인제, 백담을 거쳐 속초까지 연결되는 동서고속철의 지하 구간이다. 꼭 강 밑으로 기차가 들어가야 하는 건지 갸웃하다가도, 지도를 보면 수긍이 된다. 춘천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가야 할 노선은 강을 건너지 않는다면 우회해야 하는 거리가 엄청나다. 목표인 2027년 완공이 가능할까 싶지만, 늦어지더라도 소양강과 북한강의 두물머리 생태계에 최소한의 영향만 줄 수 있도록 조심스러운 공사를 기대해 본다. 혹시라도 이 책이 중쇄를 찍는다면 철도 공정에 맞춰 이 글도 업데이트를 해 놓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여러분에게 달렸다.
한글로 바꿔 부른 이름이 훨씬 매력 터지는 지명이 있다. 배배 꼴 필요도 없다. 춘천(春川)은 그 즉시 '봄내'다. 청초미와 간결미, 서정미가 뚝뚝 떨어진다. 정작 봄이 가장 늦게 오는 강원도 분지 마을에서, 유장한 겨울을 깨고 흐르는 봄내는 그 얼마나 소중한 감성인가.
연달아 지어진 댐은 살아 움직이는 강을 순종하는 호수로 탈바꿈시켰고, 수몰민들은 호수 아래 아틀란티스가 되어버린 옛 동네가 전설 속 고향이었는지, 닻과 같이 실존하는 흔적인지, 모호한 경계를 오가고 있다. 국가의 발전(發電)과 방어를 위해 댐과 미군기지의 주둔을 감내해 온 봄내골은 그래서 더 봄처럼 활짝 피어나야 하는 것이다.
동물 이야기로 가득할 카페에서의 음미와 풍류를 앞두고 가벼운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운전석에 앉은 노정균 대표가 중도 너머 노을을 바라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함박 짓는다.
"난 말이야, 오늘같이 어슴푸레한 날이 오히려 좋아. 이런 날엔 산들이 수묵화가 되거든. 제일 앞부터 저 뒤 끝까지 한 겹씩 한 겹씩 원근법이 따로 없어. 여긴말야... 너무 예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