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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그리고 여정의 시작

비행이라는 이동

by Total Eclipse





죽은 자들을 알현하러 가는 여정이 밝을 수 있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근거는 어린 시절 공원묘지에 있었던 할아버지의 무덤이다. 할아버지가 그 아래에 누워 있는 낯익은 봉분과, 봉분을 야트막하게 둘러싼 잔디 둔덕은 빛나는 놀이터였다. 추석의 성묘는 어른들에게만 성묘였을 뿐, 사촌형제지간이었던 꼬마들에겐 할아버지와 노니는 숨바꼭질이자 술래잡기였고, 우리는 다람쥐였다.

가루가 된 아버지가 누워있는 제주도의 자연 장지에선 더 이상 숨바꼭질은 없다. 당연하다. 상주가 되어 아버지를 보내드린 지 5년이 훌쩍 넘었고, 나는 이제 머리가 희끗한 장년이 되어버렸다. 발밑에 있는 사자(死者)들의 행렬 속으로 나는 언제쯤 들어가게 될지 감을 잡아보는 시간인 것이다.


지금부터 떠날 여행은 대부분이 햇살일 것이고, 가끔 구름일 것이다. 그러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도 있겠지. 체코와 독일, 오스트리아 3국의 도시 속 묘지 탐방엔 낯선 영혼을 만나러 가는 긴장이 깔리겠지만,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기꺼운 설렘이 더할 것이다. 어디 묘지뿐일까, 인접한 국경 이상의 관계로 얽히고설킨 세 나라의 복잡다단한 매력을 단단히 쥐고 그 속을 들여다볼 계획이다. 무명작가에게 취재 비용을 줄 누군가가 있을 턱이 없으니 알차야만 하는 여정이다. 노안이 온 두 눈을 또랑또랑하게 뜨고, 보고 적고 또 보고 적어야 한다. 출발이다. 출발은 공항이다.

귀한 여행은 공항에서의 일분일초도 금쪽이로 만들어버린다. 프라하행 항공기 탑승을 기다린다. 장시간 비행 중에 어차피 꾀죄죄해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게이트 앞 출발의 순간만큼은 깔끔을 떨게 된다. 열 시간 후엔 뒷머리는 눌리고 얼굴은 퉁퉁 부은 채 낯선 땅에 내리게 되겠지.

편명이 KE969다. KE는 물론 대한항공, 그 뒤 세 자리 숫자 중 제일 처음의 수는 목적지를 나타낸다. 미주 노선은 0, 호주, 뉴질랜드는 1, 동남아는 6, 일본 7, 중국 8, 유럽은 9다. 가장 끝자리의 수는 서울 출발편이라면 홀수, 서울로 들어오는 비행기면 짝수가 붙는다. KE969는 그래서 서울을 '출발'해 '유럽'으로 가는 대한항공의 비행기다. 여행 전 떨림이 한도를 넘을 땐 게이트별 편명을 확인하며, 한국공항공사의 여객청사 안전관리에 보탬이 되어 주는 것도 방법이다.


이륙 직후와 착륙 직전의 시간을 빼면 장거리 비행기 이동은 지루함과의 싸움이다. 차라리 지루함이면 낫다. 노쇠한 관절들이 삐걱댈수록 항공기를 타고 가는 시간은 고통 그 자체다. 요추 3번과 4번은 밀착해 떨어질 줄 모르고, 근육을 잃어가는 장딴지엔 피가 제대로 돌지 않는다. 혀는 바싹 마르고, 공짜라고 들이켠 와인은 잠 대신 숙취만 유도한다. 기내 엔터테인먼트의 진화로 볼 영화들은 수두룩하지만, 시청 시간이 늘어날수록 눈의 흰 자위는 붉어지기 마련이다. 화장실 앞 좁은 공간이라도 좋으니 일어서서 스트레칭은 필수다. 물을 자주 마셔 식도를 촉촉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비행기 안 공기가 건조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항공기의 엔진은 날개와 붙어있는 원통형 구조물 안에 있는데, 엔진 내부의 팬이 공기를 빨아들이면 압축기들이 공기를 차례로 압축해 객실 내부로 흘려보낸다. 공기를 압축할 때마다 수분이 날아가므로, 객실 안으로 들어온 마지막 압축 공기는 극히 건조할 수밖에 없다. 물을 자주 마셔야 하는 이유다. 대신 밀폐된 공간으로 착각해 공기가 더러울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청청한 1만 미터 상공의 공기가 끊임없이 공급, 배출되고 있으니 수분만 보충한다면 삼림욕 그 이상이다.

체코의 땅이 보인다. 열 시간의 괴로움은 낯선 대지를 목도하는 순간 봄눈 녹듯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매번 느껴봐도 신기한 일이다. 항공편으로의 이동은 이착륙의 동선 그대로 기승전결의 실사판이다. 활주로를 내달려 순항 고도로 상승하고 나면, 보이는 것은 파랑 아니면 검정이다. 부유한 퍼스트클래스의 승객들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자리에 우열은 있어도, 외출의 기회가 없는 건 공평하다. 기체가 하강해 여행지의 풍경이 타원형 창문에 나타나면 기-승-전의 유쾌한 반전의 순간인 것이고, 모두가 안전하게 활주로에 안착하면 드라마는 끝나는 것이다. 공기를 매개로 하는 여정은 또한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땅을 박차거나 물을 할퀴며 진행하는 이동은 출발부터 도착까지 물성이 있는 매질에 절대 의존해야 하는 과정이다. 현실에 단단히 붙박여 마찰의 방향과 강도를 조절하며 나아가야 한다. 한 순간이라도 자동차나 배가 접촉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비행은 텅 비어있다. 공기 역시 원자로 가득 찬 매질일지라도 거칠게 기대야 할 그 무엇은 아니다. 하늘로의 이동은 둥실 떠 나아가는 여정이다. 속세와 생활은 까마득한 발아래 어디쯤 있고, 나는 그 사실을 무시할 만큼 높이 떠 있다. 우주가 지척이고, 신이 있다면 조금은 가까워진 듯하다. 알루미늄 깡통에 실려 날아가는 나란 존재는 무엇이고 왜 이 세상에 떨어졌으며, 이 세상은 실상인지 허상인지 공교로운 자문자답은 떠 가는 여행에서만 익숙한 법이다.

이런 심각함이 오래갈 리는 없다. 바퀴가 땅에 닿았으니까. KE969편 기장님은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융단 위로 미끄러지는 건가. 왠지 이어질 여행도 매끄러울 것만 같다. 이제 여행의 시작이다. 풍경은 빛날 것이고, 묘지는 포근할 것이다.


여기는 프라하다.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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