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놓아진 메멘토모리

할슈타트 교구성당 묘지 ②

by Total Eclipse






어느 날 회사 근처 서점의 소설 코너를 둘러보다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서가를 탐색하며 찬찬히 골라보는 그런 책이 아니라 무릎반사처럼 즉각적으로 제목에 자극받아 손이 가버린 책. 늘 상상 속에만 있었던 가상의 상황이 책 제목으로 그대로 투영된 느낌이었다. 이건 미래의 내가 쓴 게 아닐까.

일본 작가 가키야 미우가 집필한 <70세 사망법안, 가결>-문예춘추사. 원작은 10년도 더 된 소설이지만 국내에 소개된 건 얼마 되지 않아 신간으로 취급되고 있다. 직설적이고 무미건조한 제목이 오히려 발목을 잡아끈다. 초고령사회의 폐단으로 국가 경영 자체가 어려워지자 일본의 총리는 모든 국민이 70세에 생을 마쳐야 하는 법을 밀어붙인다. 사고나 질병 등으로 일찍 사망한 사람들을 제외한 전 일본인은 만 70세가 되는 순간, 정부가 지정한 몇 가지 안락사 방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생을 마감해야 한다. 죽음을 이행하는 것은 노령에 따른 나라의 지출을 없애줘 자손들의 여유로운 생활에 이바지하게 되는 숭고한 임무가 된다. 소설은 골절 사고로 운신하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장년 부부와 집을 나가 요양원에 근무하며 살고 있는 딸, 인간관계의 어려움으로 대기업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있는 아들로 구성된 한 가정을 중심으로 실타래를 풀어나간다.


그전에 나의 상상. 70이 되면 누구나 가장 고통 없는 방식으로 안락사를 받아들인다. 여기엔 쉽게 추측 가능한 크나큰 이점이 있겠다. 내 마지막 시각을 알기에 남은 삶을 초계획적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게으른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부지런 떨게 되지 않을까. 인생의 말년에 MBTI 상의 모든 P는 J로 바뀔 것이다. 밥벌이는 죽기 5년 전까지 해서, 자식들에게 벌어놓은 돈 삼분의 일은 주겠지만 나머지는 오롯이 나의 몫이다. 꿈꿔오던 북유럽으로 떠나 쓸 만큼 펑펑 쓰며 돌아다닐 것이다. 60대 후반 정도면 체력도 버텨줄 것이다. 물론 나보다 4년을 더 살아야 할 아내의 생활비만은 남겨놓을 참이다. 죽는 날이 정해졌으니 안락사를 위한 입원과 장례 절차도 예약을 마친 지 오래다. 남은 시간 여행과 더불어 두껍지 않은 자서전을 남기기 위해 틈틈이 인생을 돌어보며 글쓰기에도 매진할 생각이다. 손주들이 할아버지 책 읽으면서 오래 기억을 해 주겠지.

다시 <70세 사망법안, 가결>. 지금부터 스포가 포함되어 있어 소설을 읽으실 분들은 이 문단을 넘기시라.

정신이 멀쩡하고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움직임도 개선할 수 있는 시어머니는 어차피 곧 죽어야 할 목숨이란 걸 알기에 재활 노력을 진즉 포기하고 편히 수발을 받기만 한다. 주인공인 며느리 다카라다 도요코는 시어머니의 손과 발이 되어 24시간을 긴장하며 살아간다. 남편 다카라다 시즈오는 살 날이 2년밖에 남지 않은 어머니를 돌볼 생각은 없다. 회사를 중도에 그만두고 직장 동료와 세계일주를 계획하며 아내 도요코에게 살림과 봉양을 모두 떠넘긴다. 자식들 앞날을 걱정하고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도요코의 삶. 결국 그녀는 가출해 도시락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며 새로운 인생을 쌓아나간다.


지극히 불행한 일부를 제외한 모두가 70년이라는 공평한 시간을 갖게 되면 일어날 일들은, 누구의 상상이든 가상의 시나리오든 엇비슷할 것이다. 한 국가의 예산은 철저히 계획적으로 편성돼 성장 일변도의 정책 집행이 가능하겠고, 70세를 맞은 죽음 대상자들은 구질구질하지 않은 최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삶의 끝자락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한다는 사무침으로 말미암아 결코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하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의 킥은 극 후반부에 있다. 사망법안을 시행했던 총리는 그간 뻔히 알면서도 이루지 못했던 정책 법안들 -최저임금제 대폭 인상, 복지와 미래세대를 위한 투자- 을 사망법안 덕분에 통과시켰다며, 돌연 시행 예정이던 70세 의무 사망 법안을 폐기해 버린다. 과감한 정책의 작동이 현실화되자 국민들은 배신감은커녕 총리의 과감했던 지난 결정을 감탄해 마지않는다.


저출산 고령화란 말은 이제 지루하게 들릴 정도로 뿌리 박힌 사회문제가 되었다. 소설 속에서조차 허구가 되어버린 의무 사망이지만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가정이 아닐까. 특정 시점에 무조건 죽어야 하는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순기능을 고려해 보면 무턱대고 역정을 낼 만한 상상은 아니다. 죽음이 사회에 기여가 되어버린 오늘날, 국가와 개인은 비대해진 노년층을 어떻게 존엄하게 대할 것인지, 부양의 책임은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분산해야 하는지, 소설은 모든 연령층의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똑같은 길이의 삶, 그리고 공평한 죽음. 당신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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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승천 성당

성모 승천 성당의 안으로 들어간다. 미사석의 중심을 가르는 신랑(身廊)도 없는 단출한 공간이지만 갖출 건 다 갖춘 모습이다. 고딕 양식 건축물에서 흔히 보이는 양식인 리브 볼트(Ribbed Vault) - 얇은 뼈대를 부착한 반원형 천장 - 가 촘촘하게 덮여있고 스테인드 글라스는 소박하다. 금빛으로 치장된 제단은 열고 닫을 수 있을 듯한 닫집 형태로 만들어져 독특하다. 언덕 위 위압적인 규모는 호수의 경관마저 압박할 것이나, 산속의 마리아는 절제를 잊지 않고 담백하게 경치와 하나가 되었다.

성당 내 납골당은 묘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이렇게 좁나 싶을 정도로 작은 규모지만 2유로의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 돈이 아깝지 않은 것은 단순히 망자들의 실제 유골을 볼 수 있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선조의 유골을 대하는 할슈타트 주민들의 전통을 목격할 수 있어서다. 막상 납골당에 들어가니 삼면으로 놓인 두개골들이 너무도 가깝게 보여 침을 꿀꺽 삼키기도 했으나, 이내 그것들은 낱낱의 작품이 되어 감상의 오브제로 바뀌어버렸다. 삼백 년이 넘는 시간 이곳의 유족들은 사망자를 납골당 아래 묘지에 묻고, 십수 년이 지나 육신이 썩어 없어지면 유골을 수습해 깨끗이 씻은 다음, 표백 작업을 거쳐 장의사나 화가로 하여금 망자의 이름과 사망일이 포함된 글과 장식을 두개골에 그려 넣게 했다고 한다. 모든 유족과 후손들은 유골만 보아도 그들의 가족이나 선조를 식별할 수 있었고, 정성스레 입혀진 무늬와 그림을 보며 추모의 마음을 길이 전할 수 있었다. 땅속 깊이 묻혀 삭아가는 유골은 두렵지만 매일같이 쓰다듬을 수 있는 할슈타트 납골당의 유골은 그러니 사랑스러울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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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5_131451.jpg 성모 승천 성당 부속 납골당에 안치된 유골들


여기에 놓인 유골 중 가장 신참은 누구일까? 1983년에 숨져 1995년에 안치된 한 여성인데, 심지어 그녀의 번쩍이는 금니까지 보관 중이라고 한다. 후대들에 자리를 내줘야 하는 것은 유골들도 마찬가지, 후배 유골(?)들이 들어오면 선배 유골은 밀려나 차례로 폐기되면서 납골당 안 유골의 수는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장(火葬)이 대세가 된 이후 납골당에 놓이길 원하는 할슈타트 주민의 유언은 뜸했고, 그 덕분에 이곳의 유골들은 영구 분양이 유력해졌다. 안내문에는 지금도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사후에 얼마든지 납골당 안치가 가능하다는 문구가 있다. 화장으로 한 줌의 재가 되는 나의 미래를 의심한 적이 없는데, 만약 할슈타트에 이사 올 수만 있다면 솔깃해질 분양 제안이다. 가능하다면 내 두개골엔 한글로 이름을 새겨 넣어줄 것을 부탁할 것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온 유해지만, 그래도 우리말과 우리글 번창을 위해 힘썼던 아나운서 출신 아닌가.


땅속에서 흙으로 질식돼 서서히 가루가 되어가는 유해는 외롭다. 토양 생물의 영양분이 되어 생태계를 한 순배 돌게 하는 거름의 역할은 기특할지언정,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간은 뼛속까지 망각 속으로 산화한다. 그에 비해 할슈타트 납골당의 유골은 여전히 후손들의 손을 타고, 방문자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으니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손을 탈수록 윤기가 어린 두개골의 표면은 파리가 앉다가 미끄러질 수도 있겠다. 외딴곳에 홀로 놓였으면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켰을 유해는 성당 납골당의 거처에서 집단을 이루니 아름답다고 탄성을 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들 역시 롤러코스터와 같은 삶의 궤적을 밟아온 한 사람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떤 유골은 비참한 내 생이 부끄러우니 죽어있는 나조차도 전시하지 말라고 울분을 토해내고 있을지 모른다. 아무런 말없이 감상물이 되어 있는 망자의 삶은 절대로 함부로 재단되어선 안 될 것이다.

동화나라를 떠날 때가 되었다. 70세 사망법안이 현실이 된다면 이 아름다운 호수 마을로 향하는 의무 사망 임박자가 넘쳐나지 않을까. "반갑습니다. 호수가 참 아름답군요. 실례지만 언제 돌아가실 예정이세요?" "아, 저는 1년 남았습니다. 마지막 여행 즐겁게 하시고, 부디 고통 없이 웃으며 사망하시길."

자신이 떠날 시간을 인식하며 사는 삶. 한 번쯤은 해봄직한 가정이기도 하다. 정확한 끝을 셈할 수 있게 되어 드러나는 삶의 가치는 지구보다 무겁고, 줄어드는 일 분 일 초의 시간은 천금보다 귀하다. 이상향 할슈타트에선 풀어질 것 같던 삶의 밀도가 높아져 되레 단단해진다. 생의 유통기한이 다 되어 기억의 필름이 눈앞에 어른거리게 될 때, 은빛 윤슬이 반짝이는 호수 마을의 전경도 또렷하게 담겨있을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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