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나고 싶었을지도 몰랐을

호프부르크 왕궁 속 그녀의 외피, 시시(Sisi) 박물관

by Total Eclipse






경찰차는 요란하게 불총을 쏘며 내 차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멀리서부터 알아차린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전광석화와도 같이 나의 뒤에 출현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아무 죄 없이 살아도 거리에서 만나는 경찰은 이유 없는 긴장감을 주기 마련인데 타국에서, 타국보다 낯선 타국의 고속도로 위에서 나를 추격하는 경찰차란 저승사자 급의 두려움이다. 난 그저 직진하고 있었을 뿐인데.


잘츠캄머구트 속 숨겨진 보석 같던 마을에서 한 나라의 수도로 옮겨가는 여정은 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알프스 자락을 따라 펼쳐진 한적하고 쾌적한 도로는 벌어지는 깔때기와 같이 어느덧 편도 4차선의 고속도로로 확장되었다. 내달리는 차량들의 배기음은 공격적이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어권의 고속도로는 자유롭고 가차 없다. 독일 아우토반이라고 하는 하나의 노선만 제한 최고속도가 없는 줄 알았는데, 오스트리아의 주요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들도 하나같이 속도 경쟁의 장이다. 유럽 내 운전의 빠른 적응을 위해 유튜브를 헤집고 다녀보면, 역시 가장 기본적이고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각 차선의 의미를 새기고 운전하는 것이었다. 편도 3차로를 기준으로 하면 가장 바깥 3차로는 트럭이나 저속 차량, 2차로는 주행 차로, 1차로는 추월 차량을 위한 공간이다.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상식이다. 다만 도로 사정, 높은 인구밀도, 그리고 결정적인 운전 습관 탓에 우리의 1차로는 2차로보다 많은 차들이 달리는 주행 차로가 됐을 뿐이다. 수도 빈으로 행하는 E60 고속도로에서도 나는 모범 운전자가 되고 싶었다. 주위 차량들의 흐름과 리듬에 맞춰 자연스럽게 굴러가는 것을 운전의 정석이자 미덕으로 알고 있던 나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시속 135킬로미터로 2차로를 정속 주행하고 있었다. - 옆 1차로에서 나를 추월하는 차들은 지나치는 속도로 볼 때 어림잡아 최소 17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듯싶었다 - 우리나라의 고속도로였다면 딱지를 떼어도 할 말 없겠지만 여기선 이 정도가 적정한 속도인 듯했다.


문제의 경찰차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순간 어둑해진 정신세계.

'여기 제한속도도 우리나라와 같은데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나? 그럼 날 추월한 차들은 뭐지?'

'트렁크에 짐을 너무 많이 실어서 뒷부분이 주저앉았나?'

'체코 국적 자동차라 이러는 건가?'

불안은 등골을 따라 타고 들어오며 서늘하게 엄습했다. 전조등의 점멸은 갓길에 차를 대라는 신호일 수도 있으니 일단은 3차로로 차선을 옮겨 점차 속도를 줄였다. 불총에서 그쳐야지 진짜 총에 맞을 순 없는 일 아닌가. 순간 어처구니없는 상황. 부딪힐 듯 뒤를 바짝 따라오던 경찰차는 2차로를 엄청난 속도로 그대로 쭉 내달리는 것이었다. 날 추월하는 경찰의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3차로를 주행하며 살펴보니 2차로의 차들은 대부분 시속 150킬로미터 이상으로 내달리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편도 4차선 고속도로에서 시속 135킬로미터쯤은 성능 좋은 승용차들의 앞길을 가로막아 오히려 위협이 될 수 있는 속도였고, 소박하게 3,4차로로 물러나 조신하게 지나야 어울릴 법한 속도였다. 시골 쥐가 서울 쥐를 만나기 위한 적응 단계인 것인가. 대도시의 리듬에 공명하는 속도감과 함께, 나는 한때 전 유럽의 심장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20240827_171559.jpg 빈의 중심지 그라벤 거리


오스트리아나 독일의 모든 도로엔 질서가 가득하다. 빠른 속도도 고속도로에선 운전 예절의 일종이지만 도시나 마을로 빠지는 출구가 가까워지면 제한속도는 급격히 줄어 내비게이션에도 속도 안내등이 뜬다. 마을 안으로 진입한 후에는 물론 훨씬 낮아진 속도의 단속이 엄격하다. 쏜살같이 내달려야 하는 것은 오직 고속도로 위에서나 통하는 방식이니 오해는 금물이다.

관광만으로 특화된 몇 도시들을 거치고 나니 맞닥뜨린 대도시의 존재가 더 크게 다가온다. 여행에서 나는 알게 모르게,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약자가 되고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다. 보무도 당당하게 배낭을 짊어지고 낯선 곳에 발을 디뎠어도 간혹 두려워하는 나를 보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위축되어 버린 내가 큰 숨을 내쉬고 다시 의욕적으로 꿈꿀 것을 다짐하게 되는 과정의 반복이 결국 여행이 아닐까. 심약해진 존재의 거듭되는 솟구침. 여행자는 그래서 아름답다.


'세기말 빈'이란 풍성함이 폭발하는 시기의 메타포다. 그 영광과 찬사는 이제 식상할 정도다. 여전히 합스부르크가의 통치 하에 있었지만 20세기를 코앞에 두고 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선 음악과 미술, 장식예술과 문학의 열매가 사정없이 쏟아져 나왔다. 극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 후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을 비롯해 잘츠부르크에서 이미 만나 본 불세출의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를 위시한 작가 군단. 지금 걷고 있는 빈 도심과 기념비적 건축물을 설계한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와 오토 바그너(Otto Wagner, 1841~1918). 걸출한 지휘자에서 사후 교향곡의 대가로 인정받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조성을 해체하며 무조음악의 창사자로 불리는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1874~1951)와 그를 추앙한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 안톤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 두 제자들. '인간 세기말 빈'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빈 분리파의 거두,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물론이고, 방랑자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와 클림트의 직계 제자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로 대표되는 미술계. 이외에도 정신세계의 패러다임을 갈아치운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t Freud, 1856~1939)와 <논리철학 논고>의 저자이자 언어철학의 대명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 등은 같은 시공간을 윤색한 인물들이었다. 두 팀으로 나누어 올스타전을 치러도 될 만큼 수두룩한 다방면의 천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세기말 빈이 전무후무한 대가들의 무대로 인정받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새롭게 등장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특질이다. 전통적인 부르주아와 달리 빈에서 등장한 부르주아들은 개방적이었다. 청교도적이고 법치주의에 얽매였던 경직된 자세를 벗어버리고, 자연에 심취하며 문화를 찬미하는 신세대 부르주아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미술이면 미술, 음악이면 음악이라는 틀에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았다. 가뿐한 도약과 교류로 사회의 여러 요소를 예술에 가미할 수 있었다. 실제로 위에 열거한 세기말의 천재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어울려 다니며 시대정신을 각자의 예술에 투영했고, 문화예술사적으로도 전례 없는 이들의 무작위 조합은 곧 혁신적인 시대의 결과물을 보장하는 요소가 되었다. 세기말, 빈이라는 도시는 천재들의 뒤섞임을 위한 최적의 용광로였고, 명작이 창궐한 극장의 무대였다. 물론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수확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 과거가 다져놓고 일구어놓은 토양이 있었기에 문화예술이라는 꽃의 개화는 가능했을 것이다. 인재와 자원을 끌어모아 질시와 원망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온 합스부르크의 심장부 빈 속에는 또 하나의 심장부가 있다. 골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한데 모이고 다시 골목으로 흩어지는 기준점,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에 먼저 눈도장을 찍고 이동을 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20240826_183812.jpg 슈테판 대성당


여행자라면 반드시 목격하게 될 빈의 상징, 슈테판 대성당은 성 슈테판(St.Stephan)을 모시고 있다. 예수의 제자로서 슈테판은 현대에 태어났다면 <100분 토론>에 섭외되었을 법한 논객이었다. 전문 분야는 당연히 '종교 그리고 예수'. 그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격한 논쟁을 벌여가며 기독교의 교리를 내세운 것으로 유명했다. 해박한 교리의 해석을 무기로 많은 기독교도 팬을 몰고 다닌 그의 실책은 다름 아닌 '과유불급'이었다. 끊임없는 유대교 비판으로 랍비들의 분노를 사, 끝내 유대교 군중의 돌에 맞아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슈테판을 묘사한 조각이나 그림엔 투석형을 당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무리 봐도 둥근 지붕의 완만함은 보이지 않는 성 슈테판 대성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축물의 독일어 이름은 슈테판의 '돔'(Stephans'dom')이다. 애초 둥근 지붕이 덮여야 돔이 아니었나. 독일어에서 돔은 둥근 지붕이란 뜻 외에 그저 '대성당'이나 '사원'을 포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돔이란 단순히 규모가 크거나 한 도시의 대표 격인 성당을 부르는 의미로, 영어 Cathedral, 프랑스어 Cathedrale와 진배없는 표현이다. 이탈리아의 대성당도 'Duomo(두오모)'라고 흔히 명명되곤 하니, 건축물의 이름에서 형태를 확신하면 곤란할 수도 있겠다.


랜드마크가 수두룩한 도시 빈에서 슈테판 대성당을 먼저 찾는 사람들은 흔히 이곳을 도심여행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대성당 앞 널찍한 광장을 기준으로 여행자의 경유지와 목적지는 사방으로 포진해 있다. 만보기 어플은 이 자리에서 활성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화도시 빈의 클래식한 방문지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정보들이 웹과 책에 넘쳐흐른다. 관점에 따라 해석 역시 제각각일 수 있을지 몰라도, 이번엔 무언가 결이 다른 박물관으로 가 보려 한다. 누구에게는 이곳이 정통적 역사교육의 장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현대에 와서 팝문화로 변용된 '키치(Kitsch)'의 공간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날로 인기를 더하는 '시시 박물관(Sisi Museum)'이다.

20240827_155016.jpg 시시 박물관이 있는 호프부르크 왕궁


합스부르크 왕위를 계승해야 할 자신의 남편 카를 대공이 어리석어 자격이 없다며, 조피 대공비는 장남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Ⅰ,1830~1916 )를 옹립한다. 여장부인 어머니를 깊게 신뢰한 프란츠 요제프는 사촌인 바이에른 공국의 공주 헬레네와 혼인을 맺기로 하고 첫 만남의 자리를 갖지만, 정작 맞선의 자리에 따라 나온 그녀의 여동생 엘리자베트(Elisabeth Amalie Eugenie, 1837~1898)에게 홀딱 빠지고 만다. 프란츠를 금사빠라 하기엔 엘리자베트, 즉 시시의 매력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황당한 어머니 조피 대공비의 반대와 간청에도 불구하고 한눈에 반한 여인과의 결혼을 밀어붙인 아들 프란츠. 얼떨결에 합스부르크가의 황후가 된 시시는 어쩌면 그때부터 왕가의 고루함을 체득했을지 모른다.

씨씨.jpeg 프란츠 크사버 빈터할터 「엘리자베트 황후의 초상화 」1865년 253 × 133cm


당대 왕족이나 귀족의 초상화 전문 화가로 알려진 빈터할터(Franz Xaver Winterhalter, 1805~1873)에게는 이른바 보정 효과로 대우를 받았으리라는 의심의 눈초리가 향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엘리자베트의 초상화만큼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에 거의 모든 이들이 동의한다. 이미 사진 기술이 실생활에 적용된 시대라 그녀의 외모는 손을 대야 할 까닭도 필요도 없었다. 17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40킬로그램 후반의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엘리자베트는 강박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으며 거식증과 폭식증을 오가는 섭식장애로 큰 고통을 겪었다고 하니, 한시도 몸관리에 소홀할 수 없는 현대 모델의 극기를 이미 거쳐간 셈이다. 그러나 화려한 외모와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는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에 얄팍한 오해만 덧씌웠던 것도 사실이다.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바이에른 생활에서 느닷없이 합스부르크가의 황후가 되어버린 엘리자베트는 엄격한 황실 예법에 적응하기가 어려웠고, 시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와의 고부갈등도 점점 쌓여만 갔다. 첫째 딸을 헝가리 여행길에서 잃은 뒤 시어머니와의 사이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으며, 이어서 낳은 세 명의 아이들은 할머니 조피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감성이 풍부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엘리자베트는 황실의 삶을 경멸하며 역마살을 자초한 듯 도피 여행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헝가리의 왕비이기도 했던 그녀에게 헝가리가 보여준 사랑은 열렬했는데, 그런 환호는 1867년 헝가리가 독립내각을 구성한다고 밝히자 엘리자베트가 이를 강력하게 지지한 이후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비가 어째서 헝가리의 독립을 응원했을까. 결정적인 이유는 시어머니 조피가 독립의 열망이 꿈틀거리는 헝가리를 눈엣가시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싫어하므로 나는 좋아해야겠다'는 반발심의 발로였다는 것이다. 지극히 단순하지만 명쾌한 해답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부갈등은 위력이 크다. 국책을 좌우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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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 박물관 내부


빈터할터의 작품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의아할 정도로 무심하다. 빈 미술사박물관이나 벨베데레 미술관 관람객들의 자세와는 너무도 판이하다. 가장 저렴한 가이드 없는 입장료만 20파운드인데 무엇 하나에 침잠해 집중하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멀게는 나처럼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그들은, 복도로 화려하게 연결된 이 공간을 마치 인형의 집 바라보듯 하는 것이다. '역대 가장 아름다운 황후'라는 수식이 엘리자베트가 품고 있던 모든 심상을 대체해 버린 것은 아닌지. 평민 중의 평민인 내가 감히 그녀에게 연민을 보내는 이 상황이 헛웃음을 짓게 만든다. 2004년에 문을 연 시시 박물관은 다양한 전시물과 그것의 생생한 재현에도 불구하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스튜디오처럼 느껴진다. 21세기에 조성한 19세기 박물관은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시가 거처하고 꾸미던 호프부르크 궁의 일부는 합스부르크 저택의 모델하우스 기능에 충실하고, 세기말 빈의 화려함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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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_161531.jpg 시시 박물관 내부


다행히 박물관은 그녀의 비극적 최후도 설명하고 있다. 평생 함께 한 시녀와 스위스를 여행하던 중, 한 무정부주의자가 기습적으로 그녀의 가슴에 송곳을 찌르고 달아났고, 치명적인 상처임을 깨닫지 못한 시시는 선박에 탑승한 뒤에야 출혈이 심각함을 알아차렸다. 뒤늦게 호텔로 옮겨져 의사의 치료를 받았지만 황망한 죽음은 막을 수 없었고, 갑작스럽게 그녀의 부음을 전보로 접한 남편 프란츠 요제프는 혼절을 하고 말았다. 합스부르크가의 비극은 엘리자베트의 사망 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내의 죽음 9년 전 아들 루돌프가 자살해 후계가 끊어질 위기에 접하자 요제프 황제는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일찌감치 지명해 놓았는데 그 역시 세르비아인에 의해 사망했고, 알다시피 현대 인류의 첫 번째 비극인 세계 1차 대전이 촉발된 것이다. 스위스 시골의 보잘것없는 호족 가문이었던 합스부르크가의 광대했던 600년 집권은 이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240826_153714.jpg 쇤부른 궁전 내 기념품 샵에서도 단연 시시 관련 상품이 인기다
20240827_162335.jpg 시시 박물관 기념품 샵에서 판매하는 시시와 그녀의 남편 프란츠 요제프 1세를 다룬 도서


필적 감정사들은 그녀의 시시(Sisi)라는 애칭이 리시(Lisi)의 'L'을 'S'로 오해해 붙여진 애칭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엘리자베트(Elisabeth)는 '리시'로 줄여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고 하니 합당한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시시'라는 경쾌한 별명은 사람들에 입에 오르내리며 마지막으로 굳어진 그녀의 애칭이 되었다. 빈에 자리한 위풍당당한 박물관과 미술관 내 샵에서 시시를 만날 수 없는 곳은 없다. 세기말을 수놓던 그 어떤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보다도 그녀는 오스트리아인의 향수,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비누로, 손수건으로, 우산으로. 시시의 얼굴은 상품이 지닌 가치를 떠나 모든 오스트리아의 표면에 새겨지면서 현대인의 삶에 덧씌워진 지 오래다.

기구한 삶 혹은 외모지상주의의 본좌. 인간미를 버리지 못한 황후 또는 방랑벽에 찌든 낭만주의자. 그녀를 바라보는 이중적 시각은 수백 년 세월이 더 흐른 뒤에도 여전히 양립할 것이다. 어쩌면 현실과 이상을 수없이 오가며 상반된 얼굴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모습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황후에게서 겹쳐 보이는 것이 아닐까.

내로라하는 빈의 박물관 산맥 사이에서 새롭게 돋아난 시시 박물관에서 나는 실재와 실제를 보았다. 기적의 19세기말을 보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를 동시대 문화예술은 충실하게 포착해 냈을까. 그녀의 삶은 찬사와 동정을 빛과 물로 삼았던 화병 속 꽃과도 같았다. 가시 없는 장미의 향기를 발산하는 박물관에서 사람들은 속도 무제한 오스트리아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듯, 시선의 초점을 바삐 옮겨가며 복도 끝 소실점으로 사라져 간다.